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86)화 (87/116)

펠리디오스 후작의 죽음을 받아들인 휘노는 딜레앙에 머물며 황실의 반대편에 서기로 완전히 결심했다.

차기 후작 아라드 펠리디오스 또한 황제파에서 축출된 후작가가 멸문하리라 직감했다. 후작가와 얽힌 다른 많은 가문이 있었으나, 혈족이 살해된 이 상황에 도저히 황제에게 몸을 굽힐 순 없었다.

이윽고 정통 황제파 가문 펠리디오스의 혁명파 선언문이 공개되었다. 혁명군의 수장이 누구인지,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된 사람은 휘노뿐이었으나, 그 점을 차치하고서도 펠리디오스의 혁명파 선언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친황실 고위 귀족 가문을 대상으로 한 암살 사건이 계속되며 그들 또한 황정 아래에서 절대적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음이 증명되고 있었다.

파격적인 상황에, 황성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이에 따라 젊은 귀족을 중심으로 결집된 베르딘 학생군의 세력이 하루하루 커져 갔다.

【베르딘 학생군 자유 행진 선언】

곧 학생군의 첫 결실이 될 자유 행진 집결문이 상아탑을 중심으로 배포되었다. 혁명군의 계획에 없던 일임은 자명했다. 모든 정황이 인과에 인과로 엮여 지난 역사와는 다르게 흘렀다.

늦은 밤, 황성 딜레앙 제1저택.

제이디는 연구를 마치고 휘노의 회복실로 향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꾸며 내고 싶었지만 도저히 어두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틀렸어. 악화를 막는 것 이상으로 호전이 되지 않아.”

“기제를 알아내기만 하면….”

“역병에 매여 있어서 오히려 답이 안 보이나.”

“좀 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할 수 있겠어요.”

밤낮으로 연구해도 벽에 막힌 듯 더 나아가지 못했다. 휘노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회복실 앞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서성이며 문을 열지 못했다.

그래. 어차피 휘노도 알아야 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알 권리가 있었다. 담당의로서 오늘은 꼭 사실을 알리자.

마음먹은 제이디가 그제야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순간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클로에…, 뭐 해?”

클로에가 자그마한 손에 살벌한 가위를 들고 금실 같은 휘노의 머리카락을 숭덩숭덩 자르고 있었다.

“내가 시켰어.”

갑자기 단발머리가 된 휘노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냥. 머리카락 같은 건 금방 다시 자라니까.”

“그래도!”

제이디는 냉큼 클로에에게 다가가 가위를 빼앗아 버렸다.

“내버려 둬. 재밌어하잖아.”

휘노는 제이디에게서 도로 가위를 빼앗아 클로에의 손에 들려 주었다.

“자, 클로에. 자르고 싶은 만큼 잘라 봐. 오늘은 네가 살롱 마담이야.”

클로에가 미용사 흉내를 내며 신나게 가위질을 했다. 제이디는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싹둑, 소리 한 번에 후드득, 반짝이는 꿀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턱선 언저리까지 머리가 짧아지자,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어 제이디가 다시 나섰다.

“식사 시간이야. 얼른 내려가자.”

“더 놀고 싶은데….”

“자. 언니 말 들어.”

제이디는 가차 없이 클로에의 등을 떠밀었다. 사용인이 클로에를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한숨 돌린 제이디가 팔짱을 끼고 휘노를 바라보았다.

“…….”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따가웠는지 휘노가 해명했다.

“그냥… 기분 전환.”

‘그냥’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제이디는 물러서지 않고 눈썹을 치켰다. 휘노가 가위를 들고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싹둑,

“학생군에 들어갈 거야.”

싹둑, 휘노의 머리카락이 걷잡을 수 없이 짧아졌다.

“세상을 바꿀 노래를 작곡해 보려고.”

“혁명가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응.”

제이디에게서는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이어졌다. 오직 머리를 다듬는 소리만이 적막한 방을 채웠다. 곧 휘노가 말을 이었다.

“난 이제 날 정의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났어. 이발은 그 애도이자 기념이야.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오빠들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고… 대신 다른 결심을 했어. 내가 가진 재능으로 세상을 바꿔 보자고.”

“…….”

“비록 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 같은 건 없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어?”

사뭇 달라진 친우의 모습에, 제이디는 여전히 말을 고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학생군에 동참하겠다니. 큰일을 겪은 친우가 다시 위험한 길에 들어서는 것을 제이디는 마냥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길을 반대하고 막아설 자격도 없었다.

가위질은 이어졌고, 마침내 사내아이처럼 짧아진 머리를 머쓱하게 훑어 내리며 휘노가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으려니 열불이 나서 안 되겠잖아.”

“…….”

“제이디!”

멀리, 어디선가 꾀꼬리처럼 자신을 부르며 환하게 웃는 소녀가 보이는 듯했다. 어렴풋이 떠오른 그 목소리는 금세 사그라졌다. 눈앞에는, 과거와 같은 얼굴이지만 어느새 전혀 다른 사람이 된 휘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영원히 나의 작은 천사로 남길 바랐어.”

너는 나의 ‘순수’였으니까.

“이젠 아냐.”

휘노가 대답했다.

“날개가 찢겨서 날아오를 수 없다면, 태워서라도 세상을 밝힐 거야.”

제이디는 깨달았다. 휘노 역시 아는 것이다. 아무리 해독제를 먹어도 자신의 병증이 호전되지 않는다는 걸. 최악의 경우, 제게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시한부일지도 모르는 삶을 투쟁으로 불사르려는 휘노의 결단이 마음 깊이 느껴졌다. 그만큼 제이디 역시 투지가 생겼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게.’

독기에 물들어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누구보다 반짝이는 미소를 짓는 친우를 바라보며, 제이디는 맹세했다.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지난 우주에서 역병 치료제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후. 휘노는 딜레앙 저택을 나가 학생군 본부로 향했다. 제이디가 잠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침대에 앉아 창문 너머 푸른 여명에 물든 황성을 바라보는 제이디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외로움이 사무치게 밀려들었다. 하루하루, 견딜 수 없이 답답하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마음이 정신을 잠식해 갔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잠든 동안에도 곁을 지켜 주던 리안의 온기가 필요했다. 리안이 그리웠다.

제이디는 더욱 커져 가는 그리움을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덮으며 일어섰다. 마침내 떠오른 해가 시린 얼굴을 비췄다.

*  *  *

혁명군 전술 사령부.

학생군 자유 행진 집결 건으로 혁명군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놀드 막시무스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자유 행진 집결문을 들여다보았다.

“황실의 ‘신무기’에 대한 완벽한 대응책이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신흥 마법 세력이 주축이라 해도 전폭적인 조력 없이는 어느 정도 희생이 뒤따를 겁니다.”

리안 역시 아놀드와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투쟁을 위해 나선 학생군을 혁명군이 무력으로 진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많은 우주에서, 이렇게 미래의 등불들이 직접 반동 세력을 조직한 적은 처음이었다. 리안으로서도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맹독 연구에는 진전이 있습니까?”

리안이 제이디와 헐리를 바라보았다.

“매진하고는 있습니다만….”

헐리가 고개를 저었다.

제이디는 눈을 내리깔았다. 왜인지 리안과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혁명군의 ‘마녀’로서 전쟁에 기여해야 하는데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다.

휘노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는 않을 테지만, 계속해서 벽에 부딪히는 상황이라 정신력이 고갈되는 것 같았다. 혁명군에서의 입지가 애매해진 만큼 자존감도 하루하루 깎여 나갔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연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긴 어렵겠습니다. 정보 없이 행진에 참여해야겠어요.”

리안의 판단은 다분히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제이디에게는 차갑게만 들릴 뿐이었다.

“학생군 지도자 정보는?”

“황립 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입니다. 학생회장 세시아 엘리엇 백작 영애를 주축으로 마법계를 비롯한 학계 교수들이 학생을 이끌고 있습니다.”

엘리엇이라. 대대로 높은 지위를 이어 오며 제국 마법학계에 주춧돌을 놓은 입지 높은 가문이었다. 신성 마법을 독과점하는 제국의 행보에 회의적인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엘리엇 백작가가 나섰으니, 막강한 마력으로 무장한 정통 마법 가문들이 행진에 동참할 의사를 계속해서 공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은…

“마법 전쟁이겠군.”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놀드가 대답했다.

“총칼이 끼어들 틈은 없을 겁니다. 제아무리 탄약에 독을 바른다고 해도 마법사의 방어진을 뚫진 못할 테지요. 여전히 구식 머스킷을 들고 알기 쉬운 전술을 쓰니 대응하는 데 크게 무리는 없겠습니다. ‘신무기’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독이 아닐 경우 문제가 되겠지만요.”

황실만 신무기를 가진 게 아니었다. 리안이 기술부와 개발 중이던 새로운 총기 역시 곧 보급될 예정이었다. 위장용 신분인 딜레앙 가문이 혁명파가 되었음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으니, 물밑으로 천천히 보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리안은 이번 학생군 자유 행진에서 혁명군의 신무기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혁명에 동참하는 제국민에게 우리가 그동안 발전시켜 온 모든 기술을 제공할 생각입니다. 다만 지금은 시의적절하지 않아요.”

모두가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정당한 세상. 부당한 권력에 맞서 나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세상. 리안은 숙원을 미룰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적기가 아니었다.

시의적절하지 않다니, 무슨 의미일까. 뜻밖의 말에 제이디가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예상하는 전황을 황실이 모를 리 없어요. 강력한 마법 부대도 분명 참전하겠죠. 모든 방면에서 철저히 준비해야 해요. 황실이 전면전을 선포한 이상 물러설 싸움은 아니지 않나요?”

어차피 해야 할 싸움이라면, 희생을 막기 위해 전력으로 학생군과 결탁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 자리에 있을 친우들을 생각하니 혁명군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 제이디는 바랐다.

“패를 일찍 보일수록 황실이 대응할 말미를 주는 셈입니다. 그러니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제국민의 분노가 최고조에 이를 때 마지막 싸움을 하는 게 옳습니다.”

“역병이 언제 창궐할지, 나타나기는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꼭 학생군을 역병 대신 미끼로 던지겠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날카로운 반응에도 리안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제이디의 의견에 동조하는 간부는 없었다. 그들 모두 수장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듯이. 그럼에도 제이디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리안의 마음은 알겠지만 학생군을 희생시킬 순 없어요.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을 중시하는 사상을 가진 제이디는 이런 혁명군의 행보를 쉽게 용인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리안과 아놀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의외의 인물이 리안 대신 나섰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큰 희생을 막는 게 중요해. 록산느 보육원을 내어 준 것처럼, 이번엔 학생군을 방패로 정보를 더 모아야 할 때야. 네 연구도 좀처럼 진행되고 있지 않다며.”

로제타였다. 제 딴에는 그간 정든 제자를 만류한답시고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로제타의 잔인한 말은 오히려 제이디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방패라니. 그것도 미래를 비출 등불들에게…. 목숨까지 걸고 제국의 미래를 위해 나선 청년들은 방패막이 이상의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혁명은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제이디 자신은 아니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친우들이 엮인 터라 냉정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발언을 하고 말았다.

“그게… 제국군의 논리와 다를 게 뭐예요?”

싸늘한 정적이 이어졌다. 보다 못한 리안이 언쟁을 일축하기 위해 나섰다.

“언제나 모든 것을 지키며 나아갈 순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희생을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리안이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제이디를 응시했다.

“‘제국군의 논리’라…. 그렇게 생각한다니 유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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