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84)화 (85/116)

다음 날, 휘노가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다.

창가로 새어든 햇살이 창백한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을 뜬 휘노가 제 손을 잡고 엎드려 잠든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이런….”

“아버지!”

“딜레앙의 제이디를 찾아가 줘요.”

의식을 잃기 전 있었던 사건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살았구나. 제이디가 어떻게든 자신을 살려 준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독대 중이던 서재에 침입한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스치듯 본 단검의 끝에는 분명 황실 친위대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더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고 조사하기 전에, 아버지는 무사한지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상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복부에 붕대가 감긴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칼에 찔린 환부를 더듬던 휘노는 마침 인기척에 깨어난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외상의 충격이 멍한 눈빛에 여전히 담겨 있었다.

휘노가 의식을 차렸음을 확인한 제이디가 재빨리 일어나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문은… 아버지는?”

갈라진 목소리로 휘노가 먼저 물은 것은 후작가의 소식이었다. 제이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후작가가… 황실의 표적이 돼서….”

“아버지는 무사하지? 내가 분명….”

치료를 했었는데.

제이디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어두웠다. 직감적으로 후작의 죽음을 눈치챈 휘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차오른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이불로 떨어졌다.

“나만, 살아남은… 살아남았어?”

“…….”

“왜…? 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럽게 우는 휘노를 제이디가 아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가문을 등지고 나왔다고 해도 혈육은 혈육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는 기분이 어떤지 제이디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온 세상이 까맣게 암전되는 것처럼, 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지반이 끝 모를 지하로 꺼지는 것처럼, 공허하고 아픈 감각.

“계속 고민을 해 봤단다. 무엇이 우리 막내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일지….”

“아가, 이 아비는 너만 행복하면 돼. 더 이상 무엇도 바라지 않으마.”

“흐윽….”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르자 가슴이 더욱 미어졌다. 차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제이디는 서럽게 우는 친우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아라드 펠리디오스 영식입니다.”

문밖에서 방문객을 알리는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빠른 걸음으로 회복실에 들어선 사내는 휘노의 첫째 형제였다.

“당신이 제이디 헤이스터군요.”

자리에서 일어선 제이디가 차기 후작 아라드 펠리디오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라드는 무사히 의식을 되찾은 막냇동생에게 단걸음에 다가갔다.

“오빠….”

몇 년 만에 재회한 아라드를 보며 휘노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라드의 요청에 회복실을 나선 제이디는 어젯밤 떠올린 가설을 리안에게 보고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신성 마법이 통하지 않는 독과 역병의 상관관계. 강한 직감이 왔다. 스물두 번째 우주에서 혁명을 성공시킬 열쇠는 분명 이 가설에 있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집무실 문을 연 제이디는 그러나, 곧 공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제 책상 옆에 있어야 할 리안의 집기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며칠 동안 휘노를 간병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잊고 말았다. 어쩌면 무시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걸.

“생활을 좀 같이해야겠습니다. 시야에서 제이디가 벗어나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내가 나가죠.”

“…….”

흘러가는 시간, 격변하는 상황에 따라 모두를 둘러싼 이해관계도 변하고 있었다. 그 격류 안에 선 제이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울컥 치미는 서러움을 꾹 누르며, 제이디는 뒤돌아섰다.

“리안의 새 집무실로 안내해 줘요.”

사용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제이디는 다짐했다. 결코 이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고.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대의를 잊지는 않겠다고.

*  *  *

베르딘 황궁, 본성.

군사 회의 소집 명령에 모여든 각 부대 간부가 일사불란하게 도열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알현실, 열린 문 너머 멀찍이서 자비에르 황제와 4황녀 아멜리아가 걸어왔다. 황좌로 이어진 푸른 카펫을 내딛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숙연한 알현실에 울렸다.

이 자리에 선 모두가 오늘 군사 회의의 주제를 짐작했다.

“계엄을 강화하고 반군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겠다.”

자비에르의 엄숙한 목소리가 떨어지듯 내려앉았다.

“각개전투의 강도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한다. 필요하면 발테온 왕국의 병력을 끌어와서라도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지.”

“……!”

전면전이라면 더 이상 여론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이겠다는 의미였다. 무고한 제국민과, 제국의 등불들로 규합된 학생군까지 최고 수준의 병력으로 진압하겠다는 선포였다. 엄청난 수의 제국민이 죽어 나갈 모습이 불 보듯 선명했다.

또 한 번의 피바람이 예고된 순간, 회의에 자리한 경무청장 아놀드 막시무스가 분노를 감추기 위해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허나 제국군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위대한 광휘의 베르딘 제국이 이깟 내전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야 되겠느냐?”

불편한 심기가 역력히 드러나는 어조에, 모두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마침 신무기의 효력이 입증되었으니 이를 시험해 볼 적절한 장이 되겠구나.”

“정규군의 무기를 새로 정비하겠습니다.”

자비에르의 말에 친위대장 자카르가 대답했다.

‘신무기’란 혹 최근 귀족가 암살에 사용되는 독을 뜻하는 것일까. 아놀드의 날카로운 청회색 눈이 자카르에게 향했다. 그 독이 정규군의 화기에도 적용된다면 참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놀드의 차가운 심장이 선득해졌다.

“경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자리에서 일어선 자카르가 알현실 정문까지 도열해 선 간부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말했다.

“과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하네.”

“당치도 않습니다.”

마법대장 율린이 틈을 놓치지 않고 살랑거렸다. 누구도 입도 뻥끗 못 하고 선 알현실에, 아까처럼 황제의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절대 권력으로 세워진 제국의 통치 이념은 변하지 않아. 뿌리가 흔들리면 그 결실 또한 썩어 버리는 법. 여기 이 자리에, 반군들이 외쳐 대는 ‘자유’와 ‘평등’을 정확히 정의 내릴 자가 있는가?”

“…….”

“오직 저 하늘에서 내려온 절대 권력으로써 통일된 국가가 그 통치 이념을 벗어 버린다면, 과연 그것이 국가로서 기능할 수 있겠느냐는 말일세. 신성 제국의 힘을 얕잡아 보며 호시탐탐 은빛 황좌를 노리는 왕국의 번견들이 들끓는 이 시국에, 제국민을 제국민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신성신의 힘뿐이거늘.”

자비에르가 붉은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그게 ‘악’이 될 수 있느냔 말이오. 내 말이 틀렸는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러니 모든 것은 신의 뜻이요, 그 힘을 받은 절대자로서 이 반란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걸세.”

자비에르는 이어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알현실을 나섰다.

“짐은 복종시키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역사를 이어 갈 제국민을 결집할 뿐.”

“위대한 광휘의 베르딘을 위하여.”

“위대한 광휘의 베르딘을 위하여!”

황제가 떠나고 남은 자리. 자카르 아르디오스가 4황녀 아멜리아를 주시했다.

자카르는 2차 평화 행진 현장에서 우연찮게 재회한 은발 머리 여인을 기억했다. 그 옛날,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리라 예감했던 장밋빛 눈동자의 소녀.

‘자유’와 ‘평등’의 편에 선 여인은 전장 한복판에서 맹렬하게 투쟁하고 약자들을 도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던 진갈색 머리 청년과 함께 록산느 보육원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피로 물든 행진이 끝난 후, 혁명파가 되었음을 선포한 귀족가 목록의 초상화에서 자카르는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딜레앙 가주의 대리인을 자처했다. 자카르는 묘한 위화감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의 이목구비가 2황자의 소년 시절 초상화와 무척이나 닮았음을 차치하고서도. 화약 연기 사이로 번뜩이며 자신을 노리던 녹색 눈동자가 낯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강렬한 직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던 그 순간, 자카르는 그 눈빛에서 4황녀 아멜리아를 보았다.

선명한 진녹색 눈동자와 연결되는 지점은 4황녀뿐만이 아니었다. 초상화 속 2황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선 여인, 1황비의 눈빛 역시 그와 같은 결이었다.

숨길 수 없는 동질감이 동시에 세 사람을 겨냥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자카르가 아멜리아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 보니, 2황자께서 살아 있다면 딱 스물 후반쯤 되었겠군요.”

뜬금없이 날아든 화제에 돌아선 아멜리아가 자카르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두 번째 태양은 황궁에서 잊힌 지 오래입니다. 그 생사도 밝혀지지 않은 터, 부적절한 언행은 삼가세요.”

“당신의 입지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는데 오라버니를 찾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

어딜 감히 나서는 걸까. 여전히 1황자의 발닦개인 주제에.

냉소한 아멜리아가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내뱉었다.

“갑자기 2황자의 거취를 궁금해하는 저의가 무얼까요.”

“…….”

“경께서 뭐라도 될 수 있을 줄이나 아십니까? 개라면 개답게, 어엿하게 살아 있는 당신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말은 입에 담지 말아요.”

‘주인’이란, 1황자 렉시드를 뜻할 터. 자카르는 아멜리아의 냉대에도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이었다.

“2황자께서 돌아온다면, 4황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군요. 최근 여러모로 캐고 있는 것 같던데.”

“…….”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폐하의 눈은 어디에나 있으니.”

나지막이 경고한 자카르가 유유히 사라졌다. 아멜리아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화원’ 건을 해결하면 당장 저 건방진 젊은 친위대장부터 쳐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성으로 돌아온 아멜리아에게 측근이 다가와 서류를 전달했다. 기다리던 소식이 드디어 입수되었다.

혁명군의 신성 마법사 미하리가 펠라스 산에 있는 황제의 제1화원에 성공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정보였다. 아울러, 인력 관리 쪽 인사권은 황제가 꽉 쥐고 있어 도무지 얻어 낼 수 없었지만, 대신 그 자리에 새로 임명된 신입 관리자에 관한 정보는 캘 수 있었다.

【릭시 유디아】

아멜리아가 반가운 이름을 알아보며 흥미로워했다. 조금 더 선명해진 이목구비를 빼면 아카데미 시절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초상화 속 여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멜리아는 서랍 한편에 넣어 둔 그림 한 장을 꺼내 유심히 살폈다. 잘 관리되어 조금도 바래지 않은 선명한 청보랏빛 풀. 제이디 헤이스터가 찾고 있다는 기이한 풀이었다.

“고생했어. 그럼 시작하자.”

“네, 황녀 저하.”

기반이 마련되었으니, 이제 정보를 빼내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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