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80)화 (81/116)

친위대 병력과 마법대가 가세하자 혁명군은 빠르게 열세로 몰렸다. 비폭력, 비무장을 내세웠기에 지닌 무기도 가벼웠고, 보육원을 터뜨릴 적군을 남겨 두어야 했기에 병력을 증원하여 전력을 다할 수도 없었다.

즉, 전멸하지 않을 정도의 전력만 남아 적군을 보육원으로 유인해야 했다. 제국군이 확신에 차서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수 있도록.

그저 평화 행진을 하려 했을 뿐인데 어째서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았을까. 힘없는 일반 제국민을 제압하는 데 총과 마법까지 동원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시위자뿐만이 아니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싸움에 휘말린 행인이 많았다. 황실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대다수였다.

마침내 전장 한가운데 들어온 제이디는 눈에 익은 혁명군 전투원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아직 가장 선두에 있는 리안은 만나지 못했지만, 로제타와 함께 적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이어 갔다.

탈칵…!

총알이 모두 떨어졌다. 제이디는 재빨리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우측에 이제야 합류한 맥 칼리스토가 보였다. 천년의 원수라도 맞닥뜨린 듯 노려보는 맥 칼리스토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제이디는 능청을 떨었다.

“아유, 이게 무슨 냄새야.”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영광이에요.”

왼쪽에는 로제타, 오른쪽에는 맥 칼리스토가 서서 함께 싸웠다. 이들 사이에 섞여 전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둔기를 든 제국군 따위, 이제는 너무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제이디는 새삼 자신의 성장을 실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리안한테서 회중시계를 빼앗아 엄마가 살아 있던 때로 시간을 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때 그 제국군 녀석들한테 복수하고 싶었다.

“폭격입니다!”

가까스로 광장 북서부 진입로가 뚫렸을 때였다. 건물 위 저격수들에게서 수신호를 받은 누군가가 외쳤다.

보육원으로 제국군을 유인한 뒤 신성 마법 선전을 해 폭격을 유도하는 계획은 이로써 실패했다. 친위대와 마법대의 참전으로 벌써 폭격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어떡하죠?”

보호막을 쳐 줄 마법사는 모두 록산느 보육원에 가 있어서 전장에는 전력이 없었다. 돌아보며 묻는 제이디에게 로제타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운에 맡겨야지.”

“…네?”

“행운을 빌게.”

그게 뭐야…! 마법 폭격 앞에서는 혁명군도 속수무책이야?

“…….”

흩어지며 보육원 쪽으로 도망치는 전투원들을 제이디가 멍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육원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멍청하게 동요할 때가 아니야.’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리안이 당부했던 대로 폭격을 조금씩 보육원 쪽으로 유도할 셈인 듯했다. 의도를 알아챈 제이디도 곧 그들을 따라 달렸다.

쾅─

마침내 황실 마법대의 폭격이 시작됐다. 등 뒤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

충격에 휩쓸려 넘어진 제이디가 도로 위를 굴렀다. 얼굴이 긁혀 상처가 났다. 얼른 따라가야 하는데… 무릎을 찧어서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일어나 뒤를 돌아본 제이디는 마음이 선득해져 도로 주저앉을 뻔했다. 차마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잔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팔다리에 화상을 입어 고통받는 자도 있었고, 폭격에 부서진 건물이나 도로의 파편이 몸에 박힌 자도 있었고….

개중에는 안면이 있는 전투원도 있어 마음속에 더욱 갈등이 일었다. 제이디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지체할 수 없었다. 치료 도구도 마땅치 않을뿐더러, 혹여 저들을 도와줄 수단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얼른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제이디는 결국 후, 숨을 내쉬고 다친 사람들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들을 버리고 갈 순 없어.’

최소한의 조치만이라도 해 주자. 그렇게 주변의 다친 사람들을 챙기고 부축하느라 제이디는 광장 인근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곧 있으면 또 폭격이 떨어질 텐데. 미칠 노릇이었다.

‘리안….’

제이디는 분명 리안도 아직 여기 있을 거라 확신했다. 마법 폭격이 시작된 이상, 리안 또한 제국민을 엄호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제이디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한번 펜던트 목걸이를 꼭 쥐었다.

리안이 아직 전장에 있다. 끝까지 제국민을 엄호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제이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혁명을 이루려는 근본적인 목적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누구도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그도 아직 여기 있는데, 다친 사람들을 팽개치고서 도망칠 순 없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그러니 아무리 무서워도 리안이 있는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생명을 버리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명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다시 대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 뒤틀린 기상이 또 한 번의 폭격을 예고했다.

부상자들을 챙기느라 이동이 늦어져서 폭격의 사정거리 안에 제대로 잡혔다. 제이디는 석재 파편에 옆구리가 관통된 사람을 도로 옆으로 옮겨 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 눈에 띄는 부상자는 없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다 했다.

의무를 마쳤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에서 힘이 빠졌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리안을 찾아보려 했지만, 무릎을 다친 데다 여러 사람을 챙겨 주느라 힘에 부쳤다. 체력이 모자랐다.

숨을 몰아쉬며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그 언젠가 봤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뭉친 먹구름을 가르고 천공에 맺히는 붉은 덩어리들은 금방이고 대지로 떨어져 모든 것을 파괴할 듯 흉흉했다.

“싹 다 태워 버려!”

“…….”

그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은 제이디는 갑작스러운 공포에 잠식되었다. 마치 순식간에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 전쟁은 정신력 싸움입니다. 보고, 듣고, 겪는 모든 것을 감당해 내야 해요.”

문득 2차 평화 행진을 시작하기 전 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이디는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건 단순히 무력을 겨루는 싸움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양극단의 이념이 맞붙는 싸움.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겪느냐에 따라 언젠가 한 번 정도는 정신력이 소진될 수 있다, 고.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도, 숨어 있는 ‘마녀’도 아닌, 혁명군의 일원으로 이렇게 직접 참전하기 전까지는.

소진된 제이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서 움직여야 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을 많이 다쳤나.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다친 사람들을 챙기면서 잘만 움직였는데….

‘갑자기… 왜.’

“이거 놔요! 우리 엄마 놔 달라고요!”

“리안─!”

심장이 쿵쿵 빠르게 맥동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하늘에서 시선을 내린 제이디가 중앙 광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 와중에도 제게 달려드는 제국군이 있어, 몸을 물리는 동시에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더 꺼내 힘껏 던졌다.

팍! 단검은 정확히 군인의 미간을 파고들어 꽂혔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또 느리게 흘렀다. 주저앉은 자신의 옆을 스쳐 도망치는 행인들, 그리고 그들을 쫓아 달려가는 검은 군인들… 흩날리는 재 가루. 제이디는 이 느낌을 알았다. 익숙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순간에만 느껴지는 감각.

처음 시가전에 휘말렸던 순간. 졸업 시험 날 절벽에서 떨어지던 순간. 그리고… 처형장에서 총에 맞은 리안이 쓰러지던 순간.

그 순간들에 느꼈던 강렬한 감각, 바로 ‘죽음’의 감각이었다.

제이디는 본능적으로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미 늦었다.

【이런 식으로 흔적 없이 스러져 간 ‘마녀’들이 얼마나 많을지 나는 알 수 없구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끔찍한 악몽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

그때였다. 차라리 두 눈을 꼭 감고 현실을 잊으려던 때, 저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이디!”

제이디의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흐릿하고 일렁이는 시야 속, 무어라 외치며 제게 다가오는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가 땅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쿵, 쿵, 덩달아 심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제이디 앞에 당도한 그가 그녀를 끌어안자, 제이디의 시간은 원래의 속도를 되찾아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환각에서 깨어난 듯 몽롱한 제이디를 가장 먼저 일깨운 것은 시원한 숲을 닮은 향기였다. 희미한 화약 냄새가 섞인, 아주 짙고 푸른 녹음의 향….

“리안! 리안….”

제이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흡이 가빠졌다. 쏟아지려는 눈물에 시야가 또 한 번 일렁였다. 재빨리 두 팔을 뻗어 리안을 마주 안은 제이디는 그제야 그와 자신이 아직 이 세상에 실존함을 체감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이 제이디의 뺨을 훑었다. 리안이 무어라 말하는 듯했지만 연이은 굉음에 귀가 먹먹해진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마주친 장밋빛 눈동자에 마침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붉은 불덩이가 맺혔다.

제이디의 눈동자에 맺힌 붉은빛이 점차 그 크기를 키웠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불덩이를 향한 제이디의 동공 또한 서서히 확대되었다.

마침내 그것들이 대지에 맞닿아 터지려는 때였다.

쾅─

불투명한 막이 제이디와 불덩이 사이를 빠르게 가로막았다. 방어 마법이었다. 제이디와 리안을 중심으로 매우 넓은 반경에 둥근 보호막이 생긴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피격됐을 텐데….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리안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제이디가 자신을 구해 준 마법사를 발견했다.

제멋대로 올려 묶은 머리, 이 와중에도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잃지 않는 태도.

첼시 아도라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로건, 휘노, 리노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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