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77)화 (78/116)

혁명군 거점, 레티나의 술집.

왁자지껄한 취객 사이를 로브를 쓴 작은 여인이 헤집었다. 손에 든 쪽지에 적힌 약속 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한 여인은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돌아가는 고개에 빠져나온 꿀빛 머리카락이 주광색 마력구에 비쳐 반짝거렸다.

요란한 술집 한복판에 등장한 하얗고 여린 여인을 발견한 짓궂은 취객이 시비를 걸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가 올 만한 덴 아니올시다.”

“…….”

“귀족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입장 금지라고. 세상 돌아가는 흉흉한 얘기도 못 들었나?”

“관두게. 취했어.”

같은 자리에 앉은 동료가 취객을 말리며 나섰다. 귀족이 단지 모습만 드러내도 차별받는 이유는 단순히 이곳이 친혁명 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혁명군의 평화 시위가 유혈 사태로 끝난 후, 제국군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귀족 계층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여인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취객은 약이 올라 앞을 가로막고 빈정거렸다.

“왜 당신네들이 환영받지 못하는지 알려 줄까? 어?”

“관두라고 하는데도.”

동료가 재차 말렸지만, 아무래도 취한 탓에 홧김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덜컹, 취객이 휘청인 탓에 나무 탁상 위 술잔과 그릇들이 흔들렸다. 취객의 다리 한쪽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

제대로 처치받지 못해서 핏물이 배어나는 다리를 여인이 내려다보았다.

“미안하네. 얼마 전에 다친 후로 고통을 잊기 위해 술독에 빠진 걸세. 얼른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도와주는 걸세….”

동료가 미안한 얼굴로 여인에게 일렀다.

그때, 콰당! 통증을 이기지 못한 취객이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여인은 고민에 빠졌다. 비록 신성 마법을 쓰지 않은 지 오래기는 하나, 제 손길 한 번이면 낫게 할 수 있을 텐데…. 아마 상대는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

넘어진 취객은 급기야 서러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사정을 아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다가와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주인 레티나 또한 소란을 눈치채고 헝겊으로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마침내 고민을 끝낸 여인, 휘노 펠리디오스가 신성 마법을 써 주기로 결심했다.

그때, 어디선가 불쑥 뻗어 온 팔이 로브를 걷으려던 휘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선 안 돼.”

“……!”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자 연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가 몸을 숙여 작게 속닥거렸다.

“협회에서 나온 감찰자가 있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정말 구석 자리에 앉아 상황을 주시하는 수상쩍은 눈이 있었다.

“리노….”

“얼른.”

리노 슈펜하이어는 망설이는 휘노를 이끌고 서둘러 약속 장소인 술집 창고 지하로 향했다. 그런데 창고 앞에 문지기처럼 서 있는 사내가 쉽게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당황하는 휘노를 뒤로 물린 리노가 쪽지를 보여 주며 사내와 눈싸움을 벌였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봐. 언질이 가지 않았어?”

“…….”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말이 없는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본 휘노는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낯설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어디서 봤더라?

더 지체할 수는 없어 휘노는 우선 고민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로브를 좀 더 깊게 눌러쓰며 자그맣게 말했다.

“친구가 안에 있어요. 자정 전에 꼭 만나야 해요.”

“증명해.”

“이거면 되겠어?”

리노가 대뜸 허리에 맨 가죽 끈을 끄르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휘노가 빨개진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리노가 셔츠를 빼내고 아랫단의 단추를 끌러 맨살을 보일 때엔 급기야 두 눈을 꾹 감았다.

리노의 한쪽 골반 위, 아주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기’ 표식을 확인한 사내가 비로소 문 앞에서 비켜섰다.

휘노는 그제야 자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눈치채고는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졌다.

“혁명군에 아주 유능한 ‘마녀’가 영입됐다고 하더니.”

“너 미쳤어? 어쩌려고 이래! 죽을 수도 있어!”

“사랑은 가끔 사람을 미치게 하더라.”

“뭐?”

“내 연인에게는 숨기는 게 없는 사람이고 싶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옷을 벗지 않던 연인이 처음으로 제 소속을 고백한 날, 리노는 제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몸소 그와 같은 소속이 되었다. 이미 3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설마 제이디도….”

휘노는 여태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을 직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위험했다. 너무도 위험했다. 누구든지 혁명군인 게 발각된다면 자신의 말대로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친우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했다.

마침내 제이디와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끼익, 두 사람이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계단과 복도의 음습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련되고 깔끔한 공간이 나타났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제이디가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친우들에게 달려갔다. 잠시 말없는 포옹이 이어졌다.

“보고 싶었어….”

뮤리얼의 죽음을 알고 더욱 친구들이 그리웠던 제이디였다. 애틋한 분위기가 흘렀다.

“맥 씨가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가 있으려던 참이었어.”

“아아.”

휘노는 그제야 기시감의 배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에서 본 적이 있는 사내였다. 제이디가 정체불명의 신사와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출 때,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자였다.

그랬던가.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제이디는 혁명군과 얽혀 있었나….

“난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 그리고… 어떻게든 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네가 져 줘.”

“휘노. 너의 삶을 살길 바랄게.”

언제나 앞서 나가며 알게 모르게 주변에 영향을 미치던 친우였으니. 생각해 보면 격변하는 시대를 앞장서서 이끄는 자가 됐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래. 어쩌면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워낙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서.”

“아. 리노가….”

휘노는 ‘혁명군’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조차 어려워 머뭇거렸다.

제이디는 제 정체를 숨기려 애쓰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면 두 사람 모두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게다가 리노가 혁명군이 되었다는 소식은 사실, 리안의 짤막한 언급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화 행진이 끝나자마자 더더욱 조급한 마음으로 친우들을 불러 모았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제이디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황성을 떠나.”

한마디 말과 함께 내밀어진 것은, 아주 작은 병에 담긴 호박색 액체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떠나라니?”

“곧 큰 전쟁이 일어날 거야. 너희가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

“부탁할게. 날 위해 무사해 줄 수 있을까?”

너희까지 잃으면 난 견딜 수 없을지도 몰라. 드러내지 않은 속마음을 삼키며 제이디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작은 병만 내려다보는 휘노 옆에서, 리노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싫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웃으며 싫다고 말하는 리노를, 제이디가 애원하듯 설득했다.

“멜라크 씨가 걱정되는 거라면 함께 떠나도 좋아. 두 사람을 위해 모든 교통편, 거처까지 마련해 줄 수 있어. 제발… 날 위해 떠나.”

멜라크는 리노의 연인이었다. 그는 오랜 혁명군으로, 경무청장 아놀드 막시무스의 휘하에서 귀족가의 정보를 통제하고 물어다 주는 충실한 정보꾼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도망칠 일은 없을 거야.”

“…….”

“멜라크가 없어도 마찬가지야. 네가 떠나 있던 동안 나한테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

“리노… 제발 내 말 들어.”

“너도 알잖아. 가문을 등지고 반항했던 때부터 난 이 길을 걷게 될 애였단 거. 그리고….”

제이디, 너는 알까?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사랑을 하든 나는 언제나 네 편이고, 늘 너를 응원할 거야.”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 날, 네가 해 준 말 한마디가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이었다는 거.

“나도. 네가 어떤 길을 가든 무조건 지지할 테니까.”

리노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진정한 우정에 알량한 호기심과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 오직 필요한 건 공감뿐.

제이디 헤이스터가 혁명군의 ‘마녀’임이 밝혀진 지금, 오히려 좋았다. 리노는 옛 시절 친우를 두고 황성을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무튼 난 싫어.”

리노는 그 언젠가 아카데미 교정에서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제이디가 애처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맥락을 파악하던 휘노가 제이디가 내민 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뭐야?”

“아직 말해 줄 순 없어. 곧 알게 될 거야. 그 전까지는 늘 품에 지니고 다녀.”

“나한테도 못 알려 줘?”

“…응. 미안해.”

역병으로부터 친우들을 보호해 줄 물약이었다. 제이디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결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계속 같은 부탁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만큼 진심이어서 그래. 황성을 떠나지 않을 거면 제1저택으로라도 돌아가. 너희 정도의 가문이면 괜찮을 거야.”

최대한 간곡히 설득해 보아도 리노는 뜻을 굽힐 마음이 없어 보였다. 제이디는 부디 휘노만이라도 제 부탁을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 고민하던 휘노가 마침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고개를 든 휘노는 덤덤해 보이기도, 조금 화나 보이기도 했다.

“제이디 너도 예전부터 네 신념에 목숨을 걸고 있고, 리노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하는데… 왜 난 떠나야 해? 내가 ‘혁명군’이 아니어서? 내가 펠리디오스의 이름을 달고 있어서?”

휘노는 무언가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치미는 것 같았다.

“…….”

휘노의 어조가 심상치 않았다. 제이디와 리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차분하게 친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휘노는 조금 답답한 듯 목을 죄던 로브를 풀어 헤쳤다.

“나… 졸업 무도회 날에 제이디가 해 준 말 덕분에 처음으로 아버지 뜻을 꺾을 수 있었어. 너희가 그동안 너희만의 길을 걸으면서 많이 변한 것처럼, 나도 그래. 나도… 아카데미를 벗어나서, 내가 평생 갇혀 있던 새장을 벗어나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어. 그런데 왜 나만 떠나야 되는데?”

“…….”

“너희가 황성에 남겠다면, 나도 남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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