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딜레앙 제2저택.
북부 탈로스에 있는 웅장한 제1저택에 비하면 작고 실용적으로 건축된 저택이지만, 제이디의 눈엔 펠리디오스 후작가의 저택만큼이나 호화로워 보였다.
저택 정문을 지난 리안과 제이디는 열을 맞춰 선 사용인들의 끝에 자리한 헐리와 로제타에게 다가갔다. 둘은 리안과 제이디보다 먼저 황성에 도착해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다 같이 비밀 집무실로 향하던 때, 관리인이 다가와 제이디에게 서신 한 장을 전했다. 봉투에 적힌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제이디가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제이디는 편지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이탈해서 붉은 봉인을 뜯었다. 여전히 그 성격만큼 고지식한 필체가 반갑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 로건이다.
해도 너무하는군. ‘동녘 트는 곳까지 천만 걸음’이 뭐냐? 도저히 편지가 갈 곳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알려 준 저택으로 보낸다.】
첫 문단부터 너무나 로건 교수님다워서 제이디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본인도 뮤리얼의 주소를 알려 줄 때 만만치 않았던 것 같은데.
그동안 로건 교수님의 편지가 이크람까지 오지 못해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하던 차였다. 제이디는 재빨리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렸다.
맑은 미소를 걸고 편지를 읽던 제이디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다 편지의 말미에 다다라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제이디가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뮤리얼 웨버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연유가 궁금하구나. 비록 인사를 나눌 시간은 부족했지만, 네 덕분에 임종은 지킬 수 있었다.
괴팍하고 성격 나쁜 노인네였지만 그만한 ‘마녀’가 없었지. 유저도, 유서도, 유산도 남겨 놓지 않아 간소하게 정리했단다. 이런 식으로 흔적 없이 스러져 간 ‘마녀’가 얼마나 많을지 나는 알 수 없구나. 씁쓸한 일이야.
나는 다시 황성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이 편지가 닿을 때쯤이면 아카데미에 있겠군. 그쪽으로 간간이 소식 주거라.
나의 등불에게, 로건 리베르】
제이디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편지가 쓰인 날짜를 확인했다.
무려 2년 전에 쓰인 편지였다. 이크람에서 뮤리얼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모색하던 때 이미 뮤리얼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로건 교수님께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때처럼 몇 년의 말미가 있을 줄 알았다. 한 치 의심도 없이.
이전 우주에서의 뮤리얼은 이미 수명이 다한 상태였던 걸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제이디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뮤리얼은 불쑥 찾아온 제자의 딸에게 생전 이룩한 연구를 전하기 위해 힘껏 버텼던 것이다.
뮤리얼 웨버의 유저이자, 유서이자, 유산인 지식. 그것을 받아 전수한 제이디 헤이스터.
결국 뮤리얼을 다시 만나지도 못한 채 보냈다. 서신을 조금만 빨리 확인할 수 있었더라면.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쁘지만 않았더라면. 왜 뮤리얼의 시간이 달라질 거라는 가정은 조금도 하지 못했던 걸까…. 이런저런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제이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흐릿한 시선 너머 이국적인 문양이 새겨진 두건을 두르고 역정을 내는 고약한 ‘마녀’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제이디는 떨어지는 눈물을 황급히 소매로 닦아 냈다.
‘동요해선 안 돼.’
가장 중요한 시기를 앞둔 지금,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곧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의 부고를 확인하니 자꾸만 힘이 빠졌다. 요 며칠 제대로 먹지도 않았더니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쉬어야겠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침실로 향하는 제이디를 리안이 뒤따랐다.
“오늘은 싫어요.”
싸움이 다가올수록 불안까지 더해져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 와중에 가까웠던 누군가의 부고까지 전해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뿐더러, 앞으로도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느낄까 봐 두렵기도 했다.
리안은 말없이 다가와 제이디가 열려던 침실 문을 되닫았다.
“무슨 소식인데.”
“이제 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에요.”
문가에 기댄 리안이 설핏 인상을 쓰며 제이디를 내려다보았다. 제이디가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조금은 공유를 해 줬으면 합니다.”
“해결할 수 없다는대도요.”
“난 제이디의 기분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세요? 그렇게 신경 쓰이시면 오늘은 이만 놔주세요.”
제이디는 굳이 뮤리얼의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리안에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을 혼자 두지 못하는 리안에게 이보다도 더 약해 보이긴 싫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압니다.”
“…….”
“여전하네, 그 버릇은.”
【모든 주어진 고통을 다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기 위해 혼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수혜자가 부디 슬픔을 나누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언젠가 리안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라 제이디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래, 맞아. 쉽게 고쳐진다면 그것이 애초에 버릇이었을까.
제이디는 리안이 무어라 떠들든 문을 열었다. 정말 머리가 아파서 눈을 감고 긴장을 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한마디를 남기며 제이디는 매정하게 문을 닫았다. 후, 나지막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문밖에서는 여전히 리안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늘 그랬듯 자신의 쌀쌀맞은 대우에도 무덤덤한 얼굴로 고집을 피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결국 제이디는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그러자 리안도 함께 등을 맞대듯 앉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은 나도.’
제발 리안이 멀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리안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두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와 함께하는 생활에 길들여졌다는 맥락과는 별개로 그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불안했다. 다시 돌아온 이 과거에서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폭신한 바닥재의 문양을 손끝으로 하나하나 덧그리며 제이디는 멍한 두 눈만 끔뻑거렸다.
“당신은 고작 잃어버려선 안 될 카드 따위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도대체 이게 뭘까. 이게 무슨 사이일까.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를 이렇게 떠나지 못하는데 정녕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나.
무엇도 알 수 없지만 유일하게 확실한 감정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흔적 없이 스러져 간 ‘마녀’가 얼마나 많을지 나는 알 수 없구나. 씁쓸한 일이야.】
지금 이 순간, 리안과 문 한 짝을 사이에 두고 등을 맞댄 이 순간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말 한마디.
리안… 리안, 당신도. 아니, 당신만은.
“죽지 말아요.”
“…….”
리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날 혼자 남겨 두고 죽으면 안 돼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이디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에 뜨거운 눈물이 배어들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 버린 걸까. 그렇게나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니, 그가 가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갔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제이디의 본심이 드러났다. 잠재해 있던 슬픔과 두려움이 터져 나왔다.
“제발 내가 숨이라도 쉴 수 있게요. 내가, 이 감옥 같은 운명에서 제발… 벗어날 수 있게. 제발 날 위해 무사해 달란 말입니다.”
“그거 알아요? 나 역시 리안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무서운가 봐요…. 수많은 시간을 헤쳐 온 리안과 함께하기에 나는 너무 겁쟁이예요.”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니어도… 내 곁에 머물러 주겠습니까.”
“한 치 앞이 어두운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제발 날 위해 무사해요. 내 곁에 머물러요. 그리고 계속 살아 있어 줘요.”
살짝 열린 창밖에서 가느다란 겨울바람이 새어 들었다. 조용히 흔들리는 시폰 커튼에 저무는 태양 빛이 스몄다.
한참을 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린 제이디가 축축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훑었다. 꼼꼼하게 눈물을 닦아 내고 매무새도 정돈했다.
하, 심호흡을 내쉬자 그래도 조금은 후련해진 듯했다.
‘할 수 있어.’
황성에 돌아오자마자 뜻밖의 소식을 접해서 조금 놀란 것뿐이다. 그래서 잠깐 두려웠던 것이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지키면 된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호의를 보여 주고 가족처럼 대해 준 사람들. 교수님들, 그리고 친구들. 그들을 지키는 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결심한 제이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아프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 어리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고 평화 행진 날이 다가오는데, 작전 회의에 빠질 순 없었다.
제이디는 다시 한번 모습을 정돈한 뒤 문을 열었다.
“맥 씨.”
문 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맥 칼리스토 경이 서 있었다.
“가시죠.”
맥 칼리스토는 제이디가 집무실로 향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앞장섰다.
리안은 없었지만, 제이디는 방금까지도 그가 이곳에 자리했음을 머지않아 느낄 수 있었다. 온기를 품은 그만의 체취가 여전히 공기 중에 감돌았기에.
* * *
그날 밤.
유리창으로 새어 드는 달빛마저 눈부시게 느껴질 만큼 적막하고 어두운 침실 안.
여독에 더해 정신적으로도 동요가 많았던 제이디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커튼 사이로 저택 밖 동태를 살피던 리안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짙푸르게 반짝였다.
창가에 선 리안은 제이디가 잠들 때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문제의 편지를 이제 막 읽은 참이었다. 편지에는 그 옛날 마리안의 친우이자 제이디의 스승이라던 ‘마녀’ 뮤리얼 웨버의 부고가 적혀 있었다.
“그분께서 돌아가시기까지 3년간, 제게 모든 지식을 전수해 주셨죠.”
“지병이 있으셨거든요. 이번에 동부에서 그 병을 치료할 방법도 알아낼 생각이에요.”
“…….”
갈무리한 편지를 둥근 협탁에 내려놓고, 리안은 조심스레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야윈 은발 머리 여인을 내려다보는 리안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사그라들듯 깊게 가라앉았다.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쓰다듬는 손길마저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곤히 잠든 제이디를 바라보며, 리안은 끊이지 않는 갈망을 느꼈다.
“약속할게요. 리안이 날 먼저 떠나지 않는 한 언제나 리안 곁에 있겠다고.”
“제발 날 위해 무사해요. 내 곁에 머물러요. 그리고 계속 살아 있어 줘요.”
보호에 대한 갈망. 생존에 대한 갈망.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갈망.
소용돌이치는 제 마음과는 달리 고요히 잠든 여인은 천진할 뿐이었다.
리안은 알고 있었다. 한결같이 자신을 향한 신뢰와 동경을 보이던 제이디의 눈빛에 점점 불온한 기운이 스며들고 있음을.
제이디 헤이스터는 변하고 있었다. 일종의 강박 같은 자신의 소명 의식이 제이디에게로 조금씩 옮아가고 있었다. 가랑비처럼 젖어 가는 제이디의 눈빛을 외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슬픔과 불안마저 희망으로 꾸미며 혼자 감내했다.
‘내가 널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다정함과 간절함이 물든 손끝이 은실 같은 머리칼을 조심히 쓸어내렸다. 온기에 이끌린 제이디의 무의식이 리안의 옷깃을 붙잡았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에게 특별하다.
위험하리만치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 새삼스레 다시 깨달은 리안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제 옷깃을 붙잡은 그 하얀 손등을 제 뜨거운 손으로 덮었다. 가련한 소동물을 보듯이 허물어지려는 마음을 간수하며.
하얀 달이 기울고 푸른 동이 틀 때까지, 리안은 제이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