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록산느 보육원.
훈련장에 모인 아이들이 저마다 떠들썩했다. 술래잡기를 하는 활동적인 아이들 사이 작은 아이 둘이 앉아 있었다.
뛰어가던 한 아이의 무릎에 여자아이의 어깨가 부딪히자,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감싸며 으름장을 놓았다.
“야! 조심해.”
“괘, 괜찮아!”
여자아이는 혹여 싸움이라도 날까, 재빨리 남자아이를 만류했다. 전에도 한번 비슷한 일이 있어서 한바탕 주먹다짐이 벌어졌던 터였다.
“바보야? 왜 맨날 맞기만 해?”
“싸우는 건 싫단 말이야….”
여자아이, 클로에가 잔뜩 몸을 웅크리며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네 몸은 스스로 지켜야지!”
지켜보던 남자아이가 잔뜩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곧 다이앤 록산느 원장이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오와 열을 맞춰 나란히 앉았다. 다이앤이 아이들 앞으로 다가가 섰다. 엄숙한 분위기에, 언제 떠들썩했냐는 듯 정적이 일었다.
“여러분은 훗날 혁명군의 ‘비둘기’가 되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네, 원장님.”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명심하세요. 이곳은 보육원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지켜 주고 있지만, 결코 완전히 안전한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요.”
“네, 원장님.”
“부모가 없고 나이가 어리고,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싸우는 법과 각국의 언어를 가르쳐 주겠어요.”
“네, 원장님!”
“…….”
복작복작 모여 순수한 눈망울을 빛내는 아이들을 다이앤이 죽 둘러보았다.
다이앤 록산느가 리안 베르딘의 역사를 읽고 가장 먼저 세운 계획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육원의 아이들이 스스로 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기존에 시행하던 기본적인 전투 훈련과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험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 한복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욱 치열한 훈련이 필요했다.
“…만약 제가 여러분을 더 이상 지켜 주지 못하게 되더라도, 여러분은 포기하지 말고 신념을 위해 싸우셔야 해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신념’이 뭐예요?”
다이앤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히 대답했다.
“‘신념’이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뜻해요. 여러분도 이곳에서 강해질수록 지키고 싶은 것이나 믿고 싶은 것이 생길 거예요. 잊지 마세요. 신념이 곧 여러분이 가진 힘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이번엔 다른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원장님의 신념은 뭔가요?”
다이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똑히 대답했다.
“나 다이앤 록산느의 신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한층 더 반짝 빛났다.
“자. 총을 쥐는 법부터 시작하겠어요.”
“네, 원장님!”
상자 안에서 총을 꺼내는 다이앤 원장을 한 소년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클로에에게 ‘네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다그친 남자아이였다.
다이앤 록산느는 현명하고 강인한 혁명군의 정보꾼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애들에게 실탄이 들어갈 수 있는 피스톨의 파지법을 교육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 한 달, 어느새 1년이 흐르자 기이함과 공포는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용기와 자신감이 채워 갔다.
싸우는 법을 알고 강해질수록 소년, 투산 라빈스키는 당당해졌다. 보육원 문밖만 나서면 제게 날아드는 온갖 멸시와 핍박, 차별과 손가락질을 감내할 깜냥이 생겨났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군홧발에 밟히고 차이는 어머니를 보고도 꼼짝 못 하고 울기만 하던 꼬마가 아니었다.
어느 날, 부쩍 말이 는 클로에가 투산에게 물었다.
“투산. 투산은 누구를 위해 싸우고 싶어?”
“글쎄. 실은 난… 누구를 위해서도 싸우고 싶지 않아. 이미… 그분은 돌아가셨으니까.”
“…엄마?”
“응.”
클로에의 눈썹이 축 처졌다. 투산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활기차게 말했다.
“클로에 넌? 네가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은 누군데?”
클로에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난, 백작님!”
“백작님? 딜레앙 백작님 말하는 거야?”
“응. 클로에는 꼭 강한 어른이 되어서, 백작님을 지켜 줄 거야!”
해맑은 미소가 주변을 밝히듯 환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투산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조그만 아이도 지키고 싶은 누군가가 있어 감당도 안 되는 총을 들고 매일같이 표적 맞히는 연습을 했다.
그래. 어차피 나약한 목숨이라면.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 검은 군인들에게 발악이라도 하고 죽는 게 옳지 않을까.
별이 된 어머니와 보육원 식구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료가 되자, 투산 라빈스키는 생각했다.
그렇게 미래의 ‘비둘기’들은 하루하루 더 진보해 나갔다.
* * *
보이지 않는 전운이 감도는 황성.
위장용 마차 한 대가 플라타너스 가로수길로 들어섰다. 목적지는 록산느 보육원이었다.
마차 안, 턱을 괴고 창밖을 응시하는 리안의 눈빛이 보육원에 가까워질수록 가라앉았다. 제이디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이 델로이에 머무를 때 황성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록산느 보육원 폭격도 그중 하나였다. 자고 있던 죄 없는 아이들이 모두 황제의 불에 타 버렸던 끔찍한 사건.
리안과 그 보육원의 밀접한 관계를 알았을 때, 그가 이번만큼은 반드시 이곳을 지키고자 하리라고 짐작했다. 황성에서의 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여유가 생기자마자 이쪽으로 향했으니, 역시 그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다.
마차가 멈췄다. 제이디는 먼저 내린 리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백작님!”
“와아!”
멀찍이서 공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곧바로 리안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보육원 입구로 향할수록 리안에게 따라붙는 아이들이 더 많아졌다. 와글와글 모여서 리안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하나같이 사탕처럼 반짝거렸다. 제이디가 몰래 웃음을 삼키며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인기가 많으시네요.”
멀찍이 황성의 ‘비둘기’ 다이앤 록산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이들을 통솔해 돌려보낸 다이앤이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다행이군요. 특별한 정보는 없습니까?”
“황실이 인쇄소 검열을 강화하긴 했지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놀드 경이 여전히 경무청을 꽉 쥐고 있으니,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젊은 친위대장에 대한 감시는?”
“아셔야 할 만큼 특별한 건 없습니다. 눈은 계속 붙여 두고 있으니, 염려 마세요.”
동부에서 1년 만에 귀환하자마자 나누는 대화치고는 어제 본 듯 자연스러워서 제이디는 조금 놀랐다.
그때, 다이앤의 치맛자락을 쥐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제이디가 고개를 기울여 다이앤의 뒤에 붙은 자그마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제이디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휙, 몸을 숨겼다.
“부쩍 쑥스러움을 많이 타네요. 클로에, 이리 나와 보렴. 백작님께 인사드려야지.”
다이앤의 부드러운 말에 쭈뼛쭈뼛 몸을 옆으로 뺀 아이가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백작님… 아, 안녕.”
“클로에. 왜 그러고 숨어 있어? 평소처럼 안기지 않고.”
“응…. 오랜만이니까.”
리안이 몸을 낮춰 ‘클로에’라 불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아이가 치맛자락을 놓고 리안의 품에 안겨 왔다. 유독 체구가 작은 아이를 한 품에 안았다 놓은 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계속 있어?”
리안은 안타까운 듯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아니. 잠깐 들른 거야.”
클로에는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별달리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킨 리안은 잠시 생각이 많은 얼굴로 잔디밭을 둘러보다 보육원 건물로 향했다.
조용히 다가온 제이디가 조심스레 물었다.
“친한 아이인가 봐요.”
“아. 갓난아기일 때부터 봐 왔습니다.”
제이디는 잠시 리안에게 수양딸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눈 내리는 824년 겨울, 보육원 앞에 버려져 있던 것을 거두었어요.”
“아….”
“글쎄요. 눈도 못 뜬 아이일 때부터 봤으니… 각별하네요.”
“백작님, 또 언제 올 거예요? 응?”
클로에가 리안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은 맞았다. 지난 과거, 보육원 폭격이 있던 날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클로에였고, 딸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도 가끔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아 살면서도 824년 겨울이 되면 꼭 클로에를 데리러 보육원을 찾았다. 아이는 매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버려져 있었다.
“아기가 요람째 놓여 있더군요. 차가운 새벽부터….”
리안은 일부러 그 운명을 뒤틀지 않고 자신과 클로에의 관계를 간직해 왔다. 처음 클로에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버려진 생명을 종내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모종의 다짐.
리안은 황성에 머물 때면 반드시 시간을 내어 클로에를 보러 왔다. 자신이 없는 새 몸을 뒤집고, 첫걸음마를 떼고, 말을 시작하고, 제법 많은 것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작은 아이.
클로에의 눈동자에는 언제나 반짝이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 중 하나. 내가 반드시 지켜 내어 이다음 미래로 가져가야 할 무엇. 리안은 이 불온한 시대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그것의 정체를 마침내 정의했다.
클로에는 리안 베르딘에게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각박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발견한 찬란. 이 아이가 살아갈 미래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해서라도, 리안은 제게 주어진 운명을 견뎌야 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혁명군이 될 수 없다’.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된 사람만이 혁명군이 될 수 있다, 고. 그렇지 않으면 내게 소중한 사람 때문에 언젠가는 발목이 잡히고야 만다.
바로 직전의 과거에서도 리안은 자신을 배신한 아에론 때문에 흔들렸고, 또한 결국 친동생인 아멜리아를 위해 스스로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었다.
언젠가 클로에도 제게 아에론과 아멜리아 같은 존재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떻게 제 손으로 희망을 버릴 수 있겠는가?
더 강해져야 한다. 누군가를 버리지 않아도 되는 혁명을 이루어 내자. 언제나 제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작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리안은 다짐했다.
보육원 지하로 들어선 두 사람이 비밀 집결지 문을 열었다. 먼저 도착한 아멜리아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보다 이르게 오게 해서 미안해. 친위대장이 냄새를 맡은 터라.”
리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멜리아가 발 빠르게 전령을 보내 준 덕에 친위대장의 감찰을 피해 미리 이크람 주둔군을 철수할 수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있었는데, 이제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할 때였다.
“그래. 알려 줄 것이 있다고.”
“응.”
아멜리아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화원’에 잠입할 경로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