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72)화 (73/116)

“무,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엄청난 비명이 들리던데….”

“이만 나가 주세요.”

화들짝 놀라 달려온 병사들을 물린 리안이 막사 문을 닫았다.

“리아안….”

“그거 알아? 난 리안이 좋아…. 리안 얼굴도 좋고 몸매도 좋고 다 좋아…. 제국 최고의 미남! 난 당신의 이 혈통을 지킬 거야…. 왜냐? 대대손손 이 얼굴을 물려줘야 하니까….”

“실은… 리안이 잘생겨서 살려 준 거였어요…. 그동안 숨겨서 미안….”

“헤… 부드럽다, 리안 몸….”

‘미쳤어…!’

지난밤 리안을 끌어안고 했던 갖가지 망언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리안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왜 하필 외적인 이유만 줄줄 읊었을까. 아니었다. 결단코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닌데…!

게다가 그런 미치광이 같은 발언으로도 모자라 몸까지 만지다니. 그건 추저분한 추행 중의 추행이었다.

‘이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죄인아… 아아아.’

지금 당장 자비에르를 찾아가 못난 날 처형해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죽여 줘… 날 죽여!

수치스러운 심경을 견디지 못한 제이디는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힌 채였다. 매끈하고 탄탄한 맨몸에 가운을 걸친 리안이 팔짱을 끼고 덩어리진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보기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네.”

“…….”

“내가 아니라 다른 사내였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상상도 하기 싫군요.”

“…….”

“그래도 무의식중 날 찾아온 건 아주 잘했습니다.”

미동도 없이 침상에 숨은 제이디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리안이 막사 밖을 나서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제이디는 그제야 꾸물꾸물 기어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다, 문가에서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안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굴이 홧홧한 것이 보지 않아도 완전히 달아올랐을 터였다.

“식사하면서 어제 못다 한 논의를 하죠.”

한마디를 남긴 리안이 그제야 막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사이로 이미 중천에 뜬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쭈뼛쭈뼛 일어나 앉은 제이디의 한쪽 어깨로 주륵, 이불이 흘러내렸다. 죄책감과는 별개로 부드럽고 탄탄한 리안의 피부를 만지작거리던 감각이 여전히 손끝에 감도는 것 같아서, 제이디는 다시 한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 * *

베르딘 황궁, 본성.

“딜레앙 상단이 동부를 개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 수상한 행보는 없었나?”

자비에르가 팔걸이를 톡톡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4황녀 아멜리아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코라냐크 협곡 지대에서 새 광맥을 찾았다는 정보가 나돌더군요. 크게 눈에 띄는 일은 없습니다.”

“광맥?”

자비에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게 말이나 되느냐? 사막의 광맥이라니. 황실 교통부는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게냐?”

“그렇다 해도 황실 소유 광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워낙 개척 정신이 출중한 가문이니, 그저 실험해 보는 것일지도요.”

흠, 자비에르가 언짢은 얼굴로 턱을 쓸었다.

“귀족 가문의 채굴을 규제하지 않으니 금의 흐름이 이렇게 쏠리는구나.”

탐욕스러운 눈빛이 번뜩이는 것을, 아멜리아가 기민하게 눈치챘다. 방어 전략이 필요한 때였다.

달그락. 아멜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유통 과정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본래도 지대가 험해 마차가 다닐 수 없는 데다 1년 전 있었던 거대 모래 폭풍으로 지형 또한 바뀌었으니. 광맥을 찾았다고 해도 황실의 운송 기반을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저 소꿉놀이에 불과하겠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딜레앙은 현재 유니스와 듀크를 위시한 티샤카인들과 협력하고 있어, 이미 수십 대의 운송용 자동차를 구비하고 있었다. 물론 황제는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황녀의 생각일 뿐. 딜레앙은 만만한 가문이 아니야.”

그러니 황제가 제 말을 쉬이 들어 먹지 않는 것은 딜레앙의 기술력을 알아서가 아니라, 여전히 딜레앙의 재력을 견제하는 데만 정신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궁정 회의에 가주를 직접 초대해 요령을 나누어 봐도 좋겠군.”

“…….”

“왜 갑자기 버려진 땅을 개척하고 있는지, 그 저의를 들어 봐야겠어.”

아멜리아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달그락…. 아멜리아가 다시 한번 고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시간이라도 확보해야 한다.

“시기는요? 크라테스가와 밀튼가의 신사업 견제로 혼란한 여론이 잠잠해질 때쯤이 좋겠어요.”

“그 건은 황녀가 잘 처리해야겠지. 고작 시시한 가문들 일로 계획을 미룰 필요는 없다. 혁명군이 잠잠하다 하나 언제 신경을 거스를지 모르니. 이 기회에 딜레앙에 견제를 넣어 국고를 정비해 두도록 하지.”

“…지당하십니다.”

아멜리아는 속으로 피곤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동안 혁명군과 은밀히 내통하는 동시에 황제가 딜레앙을 신경 쓰지 않도록 갖은 수작을 부렸건만. 위장용 사업이 커지니 결국 황제의 귀를 간질인 듯했다.

그래도 1년이면 많이 버텼다. 아멜리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다음 전략을 짤 때였다. 황제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친위대장 자카르 아르디오스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정찰을 보내 상황을 자세히 파악해 보겠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황실의 감시망을 피해 머나먼 동부 지대에 머무는 것일지도 모르니요.”

“그렇군.”

자비에르는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고민했다.

“친위대장의 뜻대로 하게.”

그리고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자카르에게 정찰 임무를 일임했다.

아멜리아는 화제에서 흥미가 떨어졌단 듯 시종에게 찻잎을 바꿔 올 것을 명하며 기민하게 자카르 아르디오스의 동태를 살폈다. 여전히 약쟁이 1황자의 수발이나 드는 주제에 뜬금없이 동부 정찰이라니. 뭔데 우릴 방해해?

“…….”

자카르는 아멜리아의 견제를 느낀 듯 그녀에게 조용히 눈길을 주었다.

1년간 황실에서 세력을 키운 아멜리아 또한 수확이 적진 않았다. 친위대장보다 먼저 리안에게 전령을 보내면서, 그간의 수확까지 보고하면 좋을 것 같았다.

“혹시… 알아봐 줄 순 없을까?”

“제이디의 직감이 무언가를 감지한 모양이라. 나 또한 정보를 알았으면 한다, 멜리.”

아마도, 그들이 가장 고대하고 있을 정보까지 포함하여.

드디어 ‘화원’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아멜리아는 동방에서 공수한 최고급 찻잎 향을 음미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한바탕 축제가 끝난 이크람의 아침 공기에는 타다 만 모닥불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해가 떴지만 먹구름이 깔려 어스름이 조금 내려앉은 채였다.

제이디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리안의 막사를 나오자, 집시 옷을 입은 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짜증 난다더니, 밤은 같이 보내고?】

“그런 거 아니야.”

제이디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홧홧해졌다. 칸나가 쿡쿡거리며 제이디를 이끌었다.

“어디 가?”

【오늘 같이 점 보기로 했잖아.】

“아.”

정신없었던 터라 칸나와의 약속도 잊고 있었다.

【엄청 용해서, 예언서에만 적혀 있는 일도 맞히곤 해.】

과학적이지 못한 점술은 제이디가 크게 신뢰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칸나를 따라 점을 보러 가는 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직 오전인데?”

칸나가 빠르게 대답을 적어 내렸다.

【좀처럼 열리는 천막이 아니라서. 이 시간에 가지 않으면 엄청 긴 줄을 기다려야 해.】

제이디가 수긍하듯 주억거렸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휘장이 쳐진 막사 앞에 두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입구의 천이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에 제이디가 두 눈을 끔뻑였다. 와, 탄성이 나오는 분위기였다.

먼저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제이디가 막사 안에 들어섰다. 온통 깜깜한 공간에서 마력구가 올려진 둥근 탁자만 빛나고 있었다.

제이디가 자리에 앉자, 어둠 사이로 로브를 쓴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모습은 마치 새벽 안개를 헤치고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사슴 한 마리처럼 신비로웠다.

점술가는 아무 말 없이 카드 한 덩이를 올려놓고는 한 장을 뽑으라는 듯 쫙 펼쳤다. 로브를 푹 눌러써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카드를 다루는 손등이 인형처럼 창백하고 고운 것을 보건대 젊은 여성이 분명했다.

제이디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카드 한 장을 집었다. 뒤집힌 카드에는 숫자 10과 함께 동그란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었다. 바퀴의 왼편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오른편에는 땅으로 내려가는 사자가 있었고, 가운데에는 새빨갛고 작은 악마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의미심장한 점괘를 예견한 제이디가 가만히 기다리자 점술가가 정체불명의 언어로 카드의 이름을 말했다.

“…무슨 뜻인가요?”

제이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운명의 바퀴.”

“운명의 바퀴…?”

“행운의 신이 그대와 함께하리라.”

좋은 점괘인 듯해 안심하고 있는데, 풀이가 이어졌다.

“허나 행운만 믿고 스스로의 운명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대로 추락할 것이니. 필시 운명의 바퀴에서 손을 떼어서는 안 되리라.”

“운명의 바퀴란 게 정확히 뭔데요?”

말간 호기심이 어린 질문에, 점술가가 가느다란 검지를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당신.”

“제가… 운명의 바퀴란 말씀이세요?”

“운명의 조타수가 되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점술가는 다시 안개처럼 흩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어쩐지 오싹해진 제이디는 어깨를 문지르며 천막을 나섰다.

【어땠어?】

“생각이 많아지는 점괘네….”

‘운명의 조타수’라니. 무슨 뜻일까?

제이디는 점괘를 곱씹으며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훈련을 준비하면서, 리안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썼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리안의 눈빛이 자꾸만 느껴졌다.

다행히도 황성에서 막 전령이 도착해 잠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이.

마침 이크람표 구움 과자를 우물거리며 로제타가 막사에서 나왔다. 그녀와 함께 이제는 일상이 된 아침 훈련을 시작했다.

로제타의 지시에 따라 단검을 던지고, 기계적으로 칸나의 습격을 회피하고, 장애물에 총을 조준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제이디는 내내 멍한 표정이었다.

그사이 근육이 많이 붙어서인지 1년 전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움직임이 날렵해졌다. 순발력 좋고, 자세 좋고, 감각 좋고.

로제타가 제이디를 가만히 관찰했다. 깜짝 시험을 치기에 최적의 순간이었다. 로제타는 제이디가 최근 내내 방어하지 못했던 기습 공격을 시험 삼아 다시 해 보기로 했다.

제이디가 휴식을 취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몰래 단검을 든 로제타가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처음 제이디의 실력을 시험했던 때처럼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여 그녀의 목을 노렸다.

캉!

제이디는 일취월장한 실력으로 그것 또한 막아 내었다. 아니, 막아 내는 것을 넘어 재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춰 로제타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성공했다.

“오?”

놀란 로제타가 박수를 쳤지만, 제이디의 표정은 여전히 멍했다. 훈련 내내 자꾸만 밀려드는 리안 생각을 멈추려고 애쓰면서도 이를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즉 제이디가 로제타의 공격에 반격한 것은 신체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공격을 막았는데도 별로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멍해 보이는 제이디를 로제타가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왜 그래?”

제이디는 로제타에게 꾸벅 인사한 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어딘가로 향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전령과 대화를 마친 리안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

갑작스러운 등장에 제이디는 뒤로 넘어갈 듯이 놀라며 당황했다. 리안은 어딘가 다급한 기세로 무겁게 말했다.

“돌아갈 시간입니다.”

“…어디로?”

“황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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