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71)화 (72/116)

Ⅳ. 망가진 찬란한 내일을 위하여

【혁명이 다가올수록 나는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지 고민했다.

깊게 뿌리내린 이념과 무너진 정의 사이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 나의 존재는 종내 어떤 의미로 남을지. 내 속에 심겨 있던 뜨거운 씨앗이 마침내 꽃피운 뒤 재가 되었을 때, 그 자리는 어떤 감정으로 메워질지.

그때 우리는 각자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파헤쳤다.

그는 말했다. 불확실한 내일의 확실한 어제에 서서 나는 모든 지나온 우주를 생각한다고. 망가지고 엉망이 된 미래여도 좋다고. 너와 함께면 그조차 아름다울 테니, 나를 따라 미래로 가자고. 망가진 찬란한 첫 번째의 내일로.

나는 대답했다. 당신과 나의 ‘오늘’을 잊지 말자고.

마침내 다시 한번 희망이 피어올랐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날카로운 단검이 허공을 휘갈랐다.

휘익─ 탁!

단검은 정확히 붉은 머리 여인의 옷깃을 뚫고 나무에 박혔다.

“다시.”

로제타의 지루한 한 마디가 단검 주인에게로 향했다.

휙─

다시 한번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스치듯 지났다.

“다시.”

“로제타 씨 머리를 어떻게 맞혀요? 다치잖아요.”

“내가?”

내내 지루한 얼굴이던 로제타가 재미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그 모습에 열이 오른 제이디가 가죽띠를 두른 허리에서 단검 한 자루를 더 꺼내 기세 좋게 자세를 잡았다.

“좋아요. 그럼 걱정 않고 던질게요.”

얼른 해 보란 몸짓이 돌아왔다. 탁, 탁… 제이디는 몇 번 단검을 던졌다 받으며 각도를 쟀다. 마침내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로제타를 향했다.

그때였다. 화악─ 제이디를 덮치듯 허공에서 무언가가 갑작스레 날아들었다. 기민하게 기척을 알아챈 제이디가 순간적인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굴렸다. 그리고…

철컥.

단숨에 일어서 총구를 겨눈 곳에는, 검은 생머리를 찰랑이며 검을 쥔 여인이 서 있었다.

사각사각. 습격의 주인공, 칸나가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제법?】

돌아본 곳에는 제이디가 던진 단검을 박수 치듯 받아 낸 로제타가 서 있었다. 정확히 미간으로 날아간 단검이었지만, 역시나 로제타를 상처 입힐 순 없었다. 하지만 요구한 표적에 던진 건 맞으니 칭찬해 줄 만했다.

“제법?”

“이제 나도 좀 하죠?”

“아. 하지만 제국군을 상대하기엔 아직 멀었다.”

“리안도 그렇고 로제타 씨도 그렇고, 정말 칭찬에 박하다니까요.”

싱긋 미소 지은 제이디의 잔머리를 선선한 가을바람이 흩트렸다. 맑은 장밋빛 눈동자가 햇살 아래 반짝였다.

훈련을 마치고 거처로 돌아오니 반가운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이크람 전통 문양으로 직조된 천이 덮인 탁자 위, 서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신인을 확인한 제이디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악단 생활은 무지무지 즐거워. 여전히 피오레가 찾아와서 훼방을 놓긴 하지만 동료들도 너무 좋고,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하루 종일 켤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 살아 있다는 기분이랄까?

리노랑 릭시랑 주기적으로 만나서 술 한잔 기울이기도 하고. 참! 리노가 악단에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서 선물해 줬어. 제이디한테도 보여 줄 날이 오면 정말 좋겠다.

제이디가 해 준 말이 없었으면 난 아마 아버지의 요구대로 황립 대학에 들어가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부만 하고 있었겠지... 상상만 해도 죽음이야. 정말 고마워, 제이디.】

‘내가 무슨 말을 해 줬더라….’

약간 아리송한 부분이 있었지만, 제이디는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렸다.

【저번 편지도 잘 읽었어. 후견인께서 널 잘 보살펴 주셔서 다행이야. 그런데 말이야, 사람 시체를 째서 몸을 해부하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무서워.

발바닥을 갈라서 부러진 뼈를 맞춘다니... 머리 뚜껑을 열어젖힌다니... 우욱!

동부엔 정말 대단하고 기이한 게 많구나.】

이크람의 의사에게 배우고 있는 외과술을 말하는 거였다. 뮤리얼에게서도 다양한 수술 이론을 배웠지만, 실습 표본이 부족했으니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크람에는 오래전부터 의술 교육 체계가 갖춰져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저 또한 익숙해지기까지 몇 주나 걸렸으니. 한 번도 외과술을 접해 본 적 없는 휘노에게는 아무리 글로 적힌 이야기라도 거북했으리라. 휘노의 순진무구한 반응에 제이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비위를 상하게 할 만한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아무튼 너만 즐거운 연구라면 됐지, 안 그래? 부디 너도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길 바라.

그나저나 이 편지가 어떻게 매번 그 머나먼 동부까지 제대로 가는지 참 신기해. 뭐, 황성 우체부가 못 가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니까.

황성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해 줘. 너무 보고 싶다.

친애하는 친우에게, 휘노 펠리디오스.】

휘노의 편지는 언제나 기분 좋은 기운을 담고 있어 읽고 나면 경쾌해졌다. 제이디는 얼른 답장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다시 돌아온 831년.

지난 우주에서는 이 해, 2차 반란기가 심화되고 황실의 정보 압제와 검열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잦은 시위와 게릴라전이 발생하던 중 역병이 태동해 모든 것을 휩쓸었다.

이번 우주에서는 근 1년간 혁명군이 잠잠했던 터라 이전보다는 황실의 압제가 덜했다. 또한 역병 시작 시점이었던 831년 여름이 지나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중앙 장벽에 파견된 첩자들에게서 주기적으로 보고서가 올라오니 정보가 막힌 것도 아니었다.

남부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어떤 변수 때문인지 알 수 없었기에, 리안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대륙 최남단 헬리오스를 지속적으로 주시했다.

혁명군은 이크람을 거점으로 역병 치료제를 대량으로 생산할 기반을 마련했고, 다수의 ‘마녀’가 치료제에 들어갈 약초들을 길렀다.

문제는 약초마다 자라는 환경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건조 기후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 약초가 있는 반면, 마른 대지에서만 자라는 약초도 있었다. 인공적인 온실 운영에는 한계가 있었고 치료제 유통망을 분산시키는 일도 필요했다. 이에 제이디는 리안을 따라 서부, 남부를 오가며 각 지방의 약초 식생을 관리했다.

제이디가 치료제 생산에 전념할 동안 리안은 혁명군 지부를 결집하고 훈련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황실에 대항할 전략을 세워 나갔다.

“여름 동안 비가 많이 내려서 헬리오스의 습도가 높다고 해요. 남부 온실 상황을 살펴봐야겠어요.”

“이번 출장에서는 황성의 비밀 결사대를 만나야 합니다.”

“약초 상태를 빨리 확인하지 않으면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은데….”

“헐리가 있으니 괜찮아요.”

“직접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요.”

“안 됩니다. 날 따라 황성으로 가요.”

제이디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못마땅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리안은 왜 항상 제멋대로예요?”

리안은 제이디에게 눈길 한 번을 주더니 시선을 돌리고 차갑게 말했다.

“근거가 있는 결정입니다. 내 일을 대신 할 자는 없지만 제이디의 일을 대신 할 자는 있지 않습니까?”

“…….”

“제이디가 매번 효율을 언급하니, 나 또한 최선의 상황을 고려해 효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제이디는 말문이 막혔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시야에서 자신을 떼 놓으려 하지를 않는 리안 때문에, 제이디의 일에 종종 차질이 생겼다.

제이디는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혁명군으로서 스스로의 가치가 퇴색되는 듯해 마음이 조급해졌고, 리안은 그런 제이디의 심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불안을 달래는 데만 급급했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잠시 더 이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화가 나.’

리안이 의사 선택에 제 의견을 고려하지 않을 때마다, 자신이 다칠까 일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못 하게 막을 때마다, 오늘처럼 ‘대신 할 사람’ 운운할 때마다 제이디는 꼭 자신이 성장하지 못하는 게 리안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납치 사건 이후 시간도 많이 지났고 훈련하다 자잘한 부상만 입었을 뿐 이렇다 할 큰일은 없었다.

하루쯤은, 더도 말고 딱 하루만큼은 리안의 감시 없이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제이디는 리안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아직 리안과 협상을 마치지 못했지만 어차피 이번에도 자신은 리안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었다. 체념한 제이디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마을 쪽으로 향하는데,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집시들이 왔어요.”

“올해는 조금 늦었군.”

‘집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제이디가 어리둥절했다.

【마을에 집시들이 오면 축제 날이야.】

칸나의 수첩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칸나가 제이디의 팔을 끌어 어딘가로 향했다. 제이디가 축 처진 얼굴을 하고 있자니, 칸나가 알 만하다는 듯 말했다.

【또 싸웠지?】

“몰라.”

퉁명스럽게 내뱉은 제이디가 발바닥에 힘을 주어 걸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귀엽네.’

연극도, 신문의 연재소설도 없는 마을이라서 그런지 칸나는 요즘 제이디와 리안의 싸움 구경으로 무료함을 때웠다. 두 사람을 향한 답답함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보는 재미는 있었다. 오늘도 흥미롭게 두 사람의 동향을 관찰하던 차에 마침 집시들이 마을을 방문한 것이었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제이디는 마을 입구에 바글바글 모인 유랑민을 보며 물었다.

그들은 저마다 치렁치렁 늘어진 이국적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몇몇은 원단을 더 많이 쓴 옷으로 화려함을 뽐냈다. 사막을 건너와서 그런지 살갗이 까무잡잡한 것이 꼭 예전에 봤던 남부 일리아노스의 건강한 주민들을 떠올리게 했다.

집시들의 지도자로 보이는 자가 열네 번째 황금 매 디디야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대륙 전체를 유랑하며 노래하고 장사하는 이들이야. 이크람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교류하고 있어.】

“책에서 읽어 본 것도 같아.”

【곳곳에서 공수한 진귀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아주 용한 점술가가 있어서 내키면 천막도 펼쳐 줘. 그럼 우린 음식과 술로 대접을 하지.】

“점술가?”

신화나 동화에서만 보던 점술가를 실제로 볼 수 있다니…! 조금 전까지 리안과 싸워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상승했다.

제이디는 칸나가 이끄는 대로 마을 축제 준비를 도와주며 집시들을 구경했다. 심란했던 기분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이디는 리안이 여전히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일부러 그를 피해 다녔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고 나니 금세 밤이 되었다. 마을 중앙에 커다란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디링, 집시들이 처음 보는 작은 현악기로 경쾌한 리듬을 연주했다. 음률을 따라 노래를 부르던 자들이 저마다 빙글빙글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 아름다운 들판 위 소녀야. 깃털을 따라 달려가는구나. 난 남쪽으로 갈 거야. 나의 태양을 찾아서. 골짜기에 핀 안개꽃을 찾아서 …”

칸나가 제이디의 손을 이끌었다. 춤 실력은 꽝이라 리안의 발을 엄청 밟은 전적도 있지만. 과실주를 몇 잔 마시고 두 뺨이 달아오른 제이디는 흥을 참지 못하고 기꺼이 불 옆으로 나섰다.

어설프게나마 집시들의 춤사위를 따라 하며 제이디는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동심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뛰어야 해. 뒤돌아보지 마. 어서 가. 등 뒤로 뻗어오는 ‘마녀’의 손길. 오, 나는 누굴까요? 오, 아름다운 들판 위 소녀야 …”

술에 취하니 리안을 의식하는 마음이 희미해져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음주 가무를 즐기는구나.

그 후로도 제이디는 집시들과 어울리며 계속해서 술을 받아먹고 무용담을 들으며 밤을 보냈다.

어느새 자정이 훌쩍 꺾였을 무렵에는 모두 술독에 빠져 서로 어깨를 빌려 베고 잠들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제이디의 기억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게 될지 알았다면, 결단코 짓궂은 집시들의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지 않았을 텐데.

다음 날 아침.

깨질 듯이 어질어질한 머리가 뭘 베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뜨끈한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고. 제 손이 더듬는 것도 조금 딱딱하긴 했지만 느낌이 부드러운 것이 썩 괜찮았다.

하지만 머리 위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아주 자알 놀더군요.”

“으응….”

“주사가 이렇게 지독할 줄 알았으면 술 같은 건 한 방울도 입에 못 대게 했을 텐데.”

“응…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얼른 내려오세요.”

“…….”

몇 초 후, 새된 비명이 막사를 뚫고 온 마을에 퍼졌다.

그러니까, 리안의 맨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대고 리안의 옆구리를 더듬게 될 미래를 알았다면, 결단코 짓궂은 집시들의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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