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찍이서 허둥지둥 달려온 제이디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리안은 칼을 갈무리하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섰다.
“이크람에서 내 흉을 보고 다닙니까? 협력할 집단에서 그러면 곤란해요.”
으아, 눈앞이 핑글 도는 현기증에 제이디가 신음했다.
“상처받았습니다. 나름 많은 역경을 함께 헤쳐 왔는데….”
“아닌 거 알면서 장난치지 마요!”
칸나가 벙벙한 옷깃을 펄럭이며 칼을 수납했다. 굉장히 얌전하고 고와서 전투 능력을 갖췄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제이디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강한 사람 있으면 된다며.】
종이에 적힌 그 한마디에 제이디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는 분위기를 읽은 칸나가 한마디를 더했다.
【나 강해.】
“…그렇다고 하네요.”
“아까의 습격 정도로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제이디는 도로 풀이 잔뜩 죽어 어깨가 축 처졌다. 어째 오늘따라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나 강해.】
“…….”
칸나가 다시 한번 수첩을 보이며 강조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리안이 벌써 뒤돌아 걸어가는 제이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각사각, 칸나가 또 무언갈 적었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런 단순한 관계는 아니야.”
【그럼?】
“…….”
말을 하지 못하는 칸나에게는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혹 답답할 때가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칸나는 수첩에 메롱 얼굴을 그려 리안의 얼굴에 들이밀더니 돌아섰다. 허리춤에 손을 대고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리안이 결국 칸나를 불러 세웠다.
“데려가.”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칸나가 리안을 바라보았다.
“다만 네 목숨을 걸 수 있다면.”
“…….”
“내겐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니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단둘이 동행할 자가 얼마나 될까. 칸나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 *
제이디는 결국 다음 날이 되어서야 리안과 함께 칸나가 말한 동굴 벽화를 탐사할 수 있었다.
좁고 굽이치는 깊은 동굴 속으로 향할수록 어두워지는 데다 기온마저 낮아져 팔뚝에 오한이 들었다. 앞장선 칸나가 든 낡은 랜턴에서 끼익, 끼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렬로 좁은 통로를 통과하기를 잠시.
“와…!”
절벽 밑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 높고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제이디는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었다. 할라를 그린 커다란 상상화부터 고대 이크람의 족장들과 주민, 각종 짐승,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자로 벽이 꽉 차 있었다.
“이런 곳은 언제 발견한 거야?”
사각사각, 칸나가 대답을 적었다.
【친구가 없으니, 시간 때울 게 필요했어.】
제이디가 혼자만의 시간을 연구로 보냈다면, 칸나는 훈련과 탐사로 보낸 셈이었다.
칸나가 벽에 줄줄이 이어진 횃불에 불을 옮겨붙이자 동굴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러자 시야가 좁아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벽화에, 리안 또한 압도된 듯 멍하니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제이디는 랜턴을 내려놓고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보랏빛 약초와 비슷한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던 칸나가 마침내 약초 벽화를 발견하고 제이디를 이끌었다. 제이디는 그림을 자세히 보기 위해 랜턴을 더 가까이 벽에 댔다.
칸나의 말이 맞았다. 그 형태가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제이디가 봤던 약초와 비슷한 것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신성신과 대지신의 싸움을 그린 듯, 아래위로 갈라진 부대가 서로에게 공격을 하는 그림이 있었다.
“연관이 있을까?”
【장담할 순 없어. 이 약초가 어느 세력에 더 가까운지도 확실치 않아.】
“여기 글자가 있는데….”
고대 언어학을 공부한 제이디도 해석할 수 없는 문자가 빼곡하고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칸나가 허리를 굽혀 제이디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한참 문자를 읽어 내리던 칸나가 자리를 잡고 앉더니 수첩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벽과 수첩을 번갈아 보는 것이, 꼭 해석이라도 하는 듯했다.
“칸나, 이런 문자도 알아?”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칸나가 마침내 해석을 마쳤다.
【할라 신을 섬기는 고대 베르딘 원주민 문화에서는 대지에서 나는 모든 것을 신성시했어. 우리는 땅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가지고 토지를 소중히 여겼지. 그때 하늘의 신을 섬기는 지금의 황족이 등장해… 신성 마법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고, 황실은 원주민의 후예들을 학살했어. 원주민들은 척박한 동부로 밀려나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혹시 아는 내용이니?】
뮤리얼의 금서를 통해 대강의 역사를 알고 있는 제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비슷한 이야기가 적혀 있어. 조금 더 과거와 가까운 시제로.】
어느새 다가온 리안도 허리를 굽힌 채 손끝으로 문자를 더듬으며 해석해 나갔다. 알 수 없는 문자를, 알 수 없는 발음으로 읽어 내리는 리안을 제이디가 가만히 쳐다보았다.
“황실의 역사 교육과는 정반대입니다.”
맨 끝의 문장까지 해석을 마친 리안이 말했다.
“신기한 일이지. 같은 전쟁과 갈등도 전하기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게.”
“다르게 해석하는 거랑 거짓말을 하는 건 천지 차이 아닐까요?”
제이디가 황실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황궁에서는 후계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계를 착취하고 훼손하는 자들을 벌하기 위해 신성신께서 강림하였고,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든 것을 치유하는 힘과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을 동시에 내려 주었노라’라고.”
【진실은 과거만이 알겠지.】
“그래. 온전한 진실은 알 수 없어. 진실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해질수록 마모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진실은 있어. 우월의식에 잠식된 나머지, 세계를 착취하고 훼손하는 것은 도리어 신성신자 본인들이 되었지.”
제이디의 뒤로 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계 속 규칙처럼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것만은 아닌데 말입니다. 완전한 정답도, 완전한 오답도 없습니다. 오직 각자의 신념만 존재할 뿐. 우린 우리만의 신념을 따르면 되는 거예요.”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제이디는 벽화 속 그림과 더불어 고대 문자까지 공책에 베껴 담았다.
다시 돌아온 마을에는 아주 반가운 손님이 당도해 있었다.
온몸이 녹초가 된 채 까맣게 탄 헐리 무니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로제타도 함께였다.
“헐리 씨! 로제타 씨!”
제이디가 반갑게 호명하며 그들 앞에 달려갔다. 리안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예상보다 13일 17시간 늦었구나.”
헐리가 얼굴에 두르고 있던 면포를 끄르며 대답했다.
“못 들었어요? 헤어지기 전에 12일 23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했는데.”
“과하게 구체적이잖아요?”
대화의 맥락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제이디뿐이었다.
“조난자들을 아타르로 옮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이쪽과도 잘 진척되고 있어.”
“그렇군요. 추방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
죽을 뻔하고, 가까스로 구조돼서 살아나고, 자타야 님의 권력으로 원로들을 설득한 과정은 쏙 빠진 담백한 보고였다.
뭐가 됐든…
“이게 바로 혁명군의 생존력이군요.”
확실히 끈질기게 생명력이 강한 자들임은 틀림없었다.
* * *
830년.
제이디는 지난 우주의 830년에서 뮤리얼에게 기초 학문을 배우며 수련했었다. 조금 다르지만, 이번 우주의 830년에서는 아스타샤에게서 의술을, 칸나와 로제타에게서 전투술을 배웠다.
모두 리안이 열두 번째 황금 매 마리안 이크람의 손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었지만, 그 역사를 듣고 난 뒤 점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리안은 자타야에게 2년 후, 정체불명의 역병이 온 제국민을 휩쓸어 혁명이 실패하고 제국이 멸망 직전까지 몰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역병의 치료약을 개발한 이가 제이디이며, 그녀를 주축으로 이크람의 모든 ‘마녀’가 역병이 태동하기 전 약을 대량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이크람에 구축된 약제소의 규모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이 엿보이는 일이었다.
리안과 제이디를 위시한 혁명군의 사정을 알게 된 이크람 지도부는 긴 논의 끝에, 협조를 약속했다.
제이디는 아스타샤와 역병의 양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신성 마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어서 귀족 계층도 죽어 나갔어요. 공기로 전염되는 것 같았고, 시신으로 최대한 실험을 했었어요. 붙잡혔던 리안의 몸으로 생체 실험을 했었고요.”
그때가 생각난 제이디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스타샤가 말했다.
“아가. 이 세계의 역사를 이루는 근본적인 흐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네?”
말을 멈춘 제이디가 아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균형’이란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지. 이 세계의 역사는 곧 균형이 분명하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균형이든, 다른 무엇과의 균형이든…. 균형이 깨어지면 어둠이 깃들고, 우주는 그 균형을 되찾기 위해 자정 작용을 시작할 것이야.”
“…….”
“네가 지금 몰두하는 인간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지. 육체가 건강해도 영혼이 맑지 못하면 그건 불량이다. 반대로 영혼이 총명하여도 무릇 육체가 말썽이라면 그 또한 온전한 생명이라 할 수 없어. 모든 것은 균형이 맞아야 제대로 굴러가는 법이야. 우주라고 다르겠느냐.”
“그런 논리라면 이 세계의 육체와 영혼이 곧 땅과 하늘의 법칙을 닮았겠네요.”
아스타샤는 대답 대신 제이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확신이 드는구나. 하늘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땅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일 게다.”
한 세월 ‘마녀’로서 세상을 탐구한 그녀의 눈동자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그 시각, 임시 전술 사령부.
역병이 최초로 태동했던 831년에 가까워질수록 리안은 불안함을 넘어 급기야 간헐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오늘도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멍하니 사색 중이었다. 희망은 분명 눈에 선명히 보였지만 실체가 있어 손에 잡히는 부류가 아니었다.
이크람의 아이들이 가져다준 열매를 던졌다 받으며 멍하니 손장난만 치고 있을 때.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제이디가 아무렇게나 펼쳐 두고 간 공책이 보였다. 제이디와의 인연이 시작된 날, 정신없이 공책을 뒤적이며 자신을 치료할 약초를 찾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펼쳐진 쪽에는 제이디가 동굴에서 베껴 온 벽화와 문자가 담겨 있었다. 리안은 무심코 그것을 들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던 터라, 리안이 들어 올린 공책은 아래가 위로 가게끔 뒤집어진 채였다. 그러자 대지신의 편에서 싸우는 자들이 하늘로 가고, 신성신의 편에서 싸우는 자들이 땅의 위치로 가는 형태가 되었다.
“…….”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전복이라.’
그러고 보면 혁명군의 선전 문구에도 그런 단어가 있었다.
【광휘의 이름을 입은 자가 세계를 전복하고 대륙의 새 시대를 이끄는 광영이 되리라.】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된다.’
마치 기울고 기울다 보면 무너져 뒤집어지고 마는 천칭처럼. 내려간 시곗바늘이 다시 올라와 원을 그리는 것처럼. 그런 균형과 순환의 형상이 리안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침내 리안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제이디의 그림이 그려진 공책에 리안의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기르며 모두 고요하게 전쟁을 맞이할 준비를 해 나갔다. 계절은 빠르게 바뀌었고 제이디 또한 이전 우주에서처럼 순조롭게 성장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3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