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크람 체류 2주 차.
리안과 제이디는 점차 낯선 공동체에 적응해 나갔다.
특히 제이디는 이크람 사람들과 금세 친해졌다. 자연, 약초, 민간 의술 등 공통 관심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제이디는 거의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우러졌다. 처음에 낯선 방문자를 경계하던 이들도, 원만하고 호기심 많은 제이디의 태도에 점차 유연해졌다.
리안이 자타야의 영향력을 업고 이크람 지도부와 정보를 나누며 이런저런 협상을 하는 동안.
제이디는 친해지게 된 이크람 여인 ‘칸나’와 함께 또 다른 원로 중 한 명인 ‘아스타샤’에게 침술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새 이크람 전통 복식을 빌려 입은 제이디는 아스타샤의 옆에 찰싹 붙어 신비로운 석침술의 세계에 매료돼 있었다.
“…이게 된다고요?”
허리에 알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던 자가 아주 작고 가느다란 침 몇 방을 맞더니, 멀쩡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튀어나올 듯 두 눈이 커다래진 제이디가 흥분해서 물었다.
“원리가 뭐죠?”
‘마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의 몸에는 혈맥이라는 것이 있어, 이를 뚫어 기를 통하게 하면 병이 낫는 것이란다.”
“……?”
이해할 수 없는 이론뿐이었지만, 놀라웠다.
매일매일이 탄복의 연속이었다. 로건 교수님도 왔다면 함께 감탄했을 텐데. 물론 언제나 의심투성이인 로건 교수님은 사기가 분명하다고 열 먼저 올릴 테지만. 이크람이 가진 의술 수준은 그만큼이나 독특하고 대단했다.
‘신성신’은 이름이 없으며 그 신화 또한 허무맹랑한 가짜라고 주장하는 그들 앞에서 제이디는 혼란을 느꼈지만, 원주민들이 보여 주는 민간 의술의 신비로움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어쩌면 황실이 정말 사기극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오늘도 제이디는 아스타샤를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의술을 배웠다.
아스타샤 또한 제이디의 지식수준이 나이에 비해 월등히 높아 그녀 나름대로 놀라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잘 알겠지만 초를 환이나 물약으로 가공하는 곳이란다.”
“이렇게나 다양한 도구가….”
약제소를 방문한 제이디는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거대한 연구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익히 알고 있는 물건과 처음 보는 물건이 섞여 있었고, 그 모든 것을 여러 ‘마녀’가 다루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분명 리안의 계획이 성공할 터였다. 리안은 제국에 역병이 몰아닥치기 전 치료제의 대량 생산을 목적하고 있었다. 이크람은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뮤리얼이랑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잠시 그리움에 잠기던 제이디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을 스승에게 물어보고자 했다.
“아스타샤 님. 혹 이크람에서도 치유하지 못하는 병이 있나요?”
“이크람이라고 하여 모든 병을 다스리지는 못하나, 익히 알려진 병 중 치료하지 못하는 병은 드물단다.”
환을 만드는 구역을 지나쳐 물약을 끓이는 곳에 당도했다. 쓰디쓴 풀의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제가 아는 어떤 약으로도 호전시키지 못한 병이 있어요. 제 스승님의 병이에요.”
“아는 데까지 이야기해 보려무나.”
제이디는 아스타샤에게 뮤리얼의 병증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아스타샤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스승님께서는 신성 마법으로 수명을 늘리는 것에 반대하셨어요. 우리 선에서 해결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겠다만, 듣기만 해서는 몸에 아주 해로운 것이 자라 건강한 부분까지 오염시키는 원리인 듯하구나.”
“네. 처음에는 아프지 않던 곳도 시간이 갈수록 아파하셨으니. 몸 안에서 점차 퍼지는 유형이 분명해요. 피부병처럼요.”
아스타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리 이크람에서도 해결하기 위해 분투 중인 병과 유사하다. 네 스승이란 자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듯하구나.”
“정말요?”
음, 아스타샤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대 장로께서도 그 병으로 대지 곁에 돌아가셨다. 역사가 오래된 병이지만 우리 또한 여전히 답을 찾진 못했어.”
제이디는 기대했던 답을 듣진 못했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크람이 연구 중인 병이라면, 어쩌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제이디는 한 가지 더 물어볼 것이 떠올랐다. 메고 있던 가죽 가방에서 낡은 공책을 꺼내어 표시해 둔 쪽을 펼쳤다.
종이가 조금 바랬지만 그 청보랏빛 색감이 여전히 선명한, 정체불명의 기이한 약초 그림이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저, 이 약초에 대한 정보도 필요해요. 황실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한데 아는 바가 없어 지식을 구하고 있어요.”
그림을 본 모두가 그랬듯 아스타샤 또한 구부정한 허리를 더 구부리며 약초 그림을 자세히 관찰했다.
‘제발… 뭐라도….’
이크람에서도 단서를 찾지 못하면 곤란했다. 살아온 나날 중 이만큼이나 규모가 큰 ‘마녀’ 공동체를 발견한 건 처음이었다. 이곳에도 실마리가 없다면 해답은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제이디가 몹시 긴장하며 답변을 기다리길 잠시. 아스타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꼭 환상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기이하구나.”
제이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 맞아요. 실제로도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저 그림일 뿐인데 오한이 느껴지는 것이 필시 평범한 약초가 아니야.”
“이곳 동부에서 혹시 발견된 적은 없을까요?”
제발….
“안타깝지만 이런 기분 나쁜 식물은 내 평생에도 본 적이 없구나. 스치듯이라도 봤었다면… 나 또한 결코 잊지 못했을 게다. 표본은 어느 정도였느냐?”
실망한 제이디의 눈썹이 축 처졌다. 제이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단 하나였고 그조차 채취하자마자 곧 시들어서 말라비틀어졌어요. 아무 실험도 못 하고… 그저 생초를 그리는 것만이 최선이었어요. 뭘 해 볼 틈도 없이 바스러지더라구요.”
“그것참… 그것 또한 매우 이상하구나. 일반적인 생초라면 뿌리가 뽑혔다 하여 바로 바스러지지는 않지. 그런 게 있다고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네…. 마찬가지예요.”
그 생김새와 특징이 참으로 수상하다.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것이 아스타샤가 내린 결론이었다.
잊어야 할까…. 아멜리아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지만. 이크람에서도 모르는 걸 아멜리아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지라, 제이디는 체념을 느꼈다.
그때, 곁에서 가만히 제이디와 아스타샤의 대화를 듣던 칸나가 제이디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응?”
칸나는 제이디와 동갑인 여인으로, 들을 순 있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각 지역의 방언뿐 아니라 동방의 언어까지 통달한 수재였다. 제이디는 그런 영리한 칸나가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나이도 같아서 이크람에 온 이후 가장 친근하게 지내고 있었다.
제이디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자 칸나가 품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동굴에서 비슷한 그림을 본 것 같아.】
“동굴?”
리안과 제이디가 이크람에 붙잡혀 오기 전, 야영을 했던 곳 인근에 있는 절벽 동굴을 뜻하는 듯했다.
【가 보자.】
칸나와 제이디가 허락해 달란 뜻으로 아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스타샤는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약제소를 떠났다.
두 사람은 서둘러 간소한 여장을 챙겨 동굴로 떠날 채비를 했다. 물주머니를 허리에 매달며 제이디가 물었다.
“그런 곳은 언제 탐방했어? 험지라서, 혼자서는 위험했을 텐데.”
칸나는 조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사락, 매끄러운 검은 생머리가 그녀의 볼 언저리로 흘러내렸다. 친구가 없던 칸나 또한 제이디가 마음에 들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자못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동굴 탐사 준비가 끝나자, 제이디가 눈짓으로 멀찍이 떨어진 리안을 가리키며 어깨를 축 내렸다. 칸나 또한 2주간 봐 온 게 있어 금방 수긍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의 허락 없이는 절대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또한 가는 곳마다 감시하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리안 베르딘의 반응은 칼 같았다.
“안 됩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매번 외출을 할 때마다 이런 식이니. 결국 이번에도 제이디는 리안의 분신을 옆에 붙이고 나가야 했다. 문제는 리안의 분신인 맥 칼리스토가 이크람에 없다는 것이었다.
헐리 씨도, 로제타 씨도. 아직 리안과 제이디를 제외한 혁명군의 누구도 이크람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보단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내가 맥 씨나 로제타 씨만큼 강했으면 리안도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강하고 말고의 맥락은 아니었지만. 제이디의 생각이 그렇게 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안은 완고했다. 리안의 일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만 기다리면 그와 함께 갈 수 있겠지만, 그럼 칸나를 기다리게 해야 했다.
후우, 제이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중요한 정보예요.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실마리를 얻을 기회요. 매번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움직일 순 없어요.”
“조금 비효율적이라도 나는 제이디의 완벽한 안전을 추구하겠습니다.”
“그러시겠죠.”
“서로 충분히 협의한 사항 아니었나?”
“나는….”
리안의 시간도, 칸나의 시간도 빼앗고 싶지 않다고요. 그저 나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괜스레 진심을 삼킨 제이디는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릴 뿐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리안은 결코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둘을 지켜보다 분위기를 파악한 칸나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제멋대로야.”
‘저 사내도, 참. 그냥 걱정돼서 그런다고 말하면 될걸.’
“으, 짜증 나!”
‘바보네, 바보.’
“맥 씨는 황성 일을 처리하기 바쁘고, 로제타 씨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애도 아니고 매번 리안을 달고 어떻게 다녀?”
‘집요한 남자구만.’
툴툴거리는 제이디를 보며 속엣말로 맞장구를 치던 중, 칸나가 묘수를 떠올렸다.
【강한 자가 붙어 있으면 되는 건가.】
“맥 씨나 로제타 씨만큼 강하면서 리안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여기 있을지,”
뭐야. 간단하네.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제이디가 고개를 휘휘 돌리며 칸나를 찾았다. 기척 한번 없이, 바람처럼 사라진 여인이 향한 곳은 리안이라는 사내의 등 뒤였다.
불길한 기운을 느낀 리안이 걸음을 멈췄다.
캉─
칸나의 칼날이 리안의 단검과 맞부딪쳤다.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는지 모를 동방풍 장도를 짧은 검으로 막아 낸 리안이, 교차한 칼날 너머 칸나의 눈을 주시했다.
‘이크람의 전력도 만만치 않을 거란다.’
칸나의 눈빛에 소리 없는 말이 담겼다. 정적이 흐르고, 제이디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챘다.
“아니야, 아니야! 죽일 만큼 밉다고 한 건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