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67)화 (68/116)

또 한 날의 지평선이 밝아 왔다. 제이디와 리안은 모래 폭풍에 지체된 여정을 유니스, 듀크와 함께 다시 시작했다. 그들은 도망친 길잡이 테오스 못지않게 꽤 사막 지대에 능통한 데다 자동차까지 있어 동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무사히 이크람에 도착하는 대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헐리 씨나 로제타 씨… 다른 분들은 무사하실까요.”

동트는 푸른 사막 위를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는 자동차 안. 제이디가 먼지 묻은 로브를 여미며 리안에게 물었다.

“더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온 이들입니다.”

“…대단하네요, 혁명군들은.”

“어이, ‘혁명군’ 형씨. 너무 코라냐크를 만만히 보는 거 아니야? 형씨들도 우리한테 발견되지 못했으면 이미 저세상이었을 거라고.”

조수석에 앉은 유니스가 팔 한쪽을 의자에 걸치며 말했다. 리안이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수긍했다.

“그래. 여긴 만만치 않구나. 어쩌면 예전만큼 어려울 수도 있겠어.”

“예전이요?”

“과거에 이곳에 왔을 때도 쉽지 않았거든요.”

리안의 과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제이디는 절로 귀가 기울었다.

“그때 이곳을 오랜 시간 떠돌았지만 모든 것이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리안은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고, 제이디 또한 더 캐묻진 않았다. 다만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가 있었다.

“리안. 리안은 많은 시간을 되돌리고 살아내고… 다시 되돌렸잖아요.”

“네.”

“혹시나 해서요. 그 언젠가의 과거에서… ‘헬렌’이라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나요? 아주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에 저와 닮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에요.”

리안이 과거에서 뮤리얼 웨버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내내 제이디의 심중을 떠나지 않은 질문이었다. 리안은 헬렌이 제이디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리안이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원하는 답을 못 줄 것 같아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이 넓은 땅에서 그런 우연을 기대하는 건 무리죠.”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유니스가 투덜거렸다.

“나, 참.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 혁명군인가 뭔가, 사이비 같은 거 아냐?”

“비슷한가?”

“전혀요.”

“뭐가 됐든. 약속은 꼭 지켜야 돼. 내가 너희 편에 기술을 공유하는 대신 날 보호해 주기로 한 거 말이야.”

“기술자 보호가 필요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지만.”

“위험한 건 형씨들이 알아서 하고.”

“꽤나 사리는군.”

“형씨도 감옥에 한번 갇혀 보라고. 사리지 않고 배기나.”

“감옥이라면 황성 비밀 수용소? 레바노스 지하 감옥? 아니면 탈로스 제3수용소였나. 밥이라면 황성 쪽이 가장 나았는데. 그마저도 이상한 벌레를 섞은 수프였지만.”

“…….”

유니스는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며 절레절레하더니 도로 몸을 틀어 조수석에 바로 앉았다. 짧은 정적이 일었다. 제이디는 리안이 방금 농담을 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리안이 언급한 세 감옥은 모두 그 악명이 높기로 자자한 곳이었기에.

슬퍼하는 제이디를 본 리안이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농담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요.”

리안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어느새 붉게 떠오른 해가 그 얼굴을 뜨겁게 비추었다.

마침내 깎아지른 절벽이 보였다. 미미한 강줄기 위로 고개를 한껏 꺾어도 시선이 정상에 닿지 않는 높은 절벽이 우뚝 선 곳. 영혼 상태의 리안이 낭떠러지 위 약초를 꺾는 뮤리얼 웨버를 발견한 곳 인근이었다.

“네가 말한 지역과 비슷한 곳은 아마 여기뿐일 거다.”

코라냐크 세부 지도를 접으며 듀크가 말했다. 테오스를 잃어버려서 난처한 상황이었는데 뜻밖의 인연을 만나 다행이었다.

차에서 내린 리안과 제이디는 이곳까지 태워 준 유니스와 듀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리안은 이걸 가지고 아타르의 한 여관까지만 잡히지 않고 가면 그곳 관리인이 알아서 안내해 줄 거라며, 딜레앙 가문의 인장이 박힌 반지를 새끼손가락에서 빼 건네주었다.

“그건 돌려줬으면 해.”

그렇게 말하며 리안이 가리킨 곳은 듀크의 바지 주머니였다. 듀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리안의 회중시계를 꺼내 건넸다. 못마땅한 듯 시곗줄을 놓지 않으며 듀크가 엄숙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당부하지.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일이 뜻대로만 된다면 약속한 것 이상의 보상을 약속하지.”

리안은 내내 해결하고 싶었던 물자 수송 및 보급 문제를 자동차 기술을 가진 티샤카인을 통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 해결에만 도움을 준다면 이들이 원하는 안전 보장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협상을 마치고 그들이 떠나자,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두 사람만이 오롯이 남았다. 밤이 깊어 기온이 뚝 떨어졌기에 절벽을 넘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야영을 준비했다.

두 사람은 다시금 나란히 누워 하늘에 뜬 은하수를 마주했다. 제이디는 불현듯 세상 한가운데 리안과 단둘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살아서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제이디 덕분입니다.”

그는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제이디는 머나먼 밤하늘에 뜬 별 무리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제가 여기까지 살아서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리안 덕분이에요.”

모래 폭풍에 휘말린 여파가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데다, 며칠째 사막의 일교차를 맨몸으로 견디었던 탓에 밤만 되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노곤했다. 유니스와 듀크에게 나눠 받은 물과 식량은 고작해야 이틀 치였다. 내일 반드시 마을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하고 해답 없는 상황임에도 제이디는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리안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이제 어떡하죠?”

가느다란 목소리로 힘겹게 물음을 내뱉은 제이디는 그길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던 리안이 한참 늦은 답을 내놓았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정답에 가까운 기분입니다.”

듣는 이 없는 대답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또 한 날의 시작이었다. 다만 어제와는 달리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먼저 잠든 제이디를 위해 절벽에 기대앉은 채 보초를 서던 리안은 해가 떠오를 무렵 깜빡 졸고 말았다. 그 찰나가 얼마나 길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날카롭게 벼려진 창살들이 제 목에 겨누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상대들을 확인하기도 전에 리안은 허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폭풍에 휘말린 리안에게 남은 건 옷감에 단단히 고정해 뒀던 회중시계뿐.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금속과 가죽으로 이루어진 경갑옷을 입은 무리였다. 떠오르는 햇빛이 그들의 뒤에서 비쳐 와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리안은 저를 껴안은 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이디를 감싸 우선 보호했다. 그때,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무리가 서서히 갈라졌다.

터벅, 터벅…

무리 사이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가 알 수 없는 토착 언어로 무언가를 명령하며 손짓하자, 날카롭게 겨누어져 있던 창살들이 물러났다.

“신분을 밝혀라.”

베르딘 공용어가 들렸다. 그리고, 아침 해가 기울어지며 마침내 그들의 얼굴을 비쳤다. 리안은 그들의 의복 양식과 장신구의 형태를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어서 가자. 곧 해가 질 거야.”

“예, 예. 부디 제대로 몰아 주시죠. 네가 모는 말에만 타면 멀미가 난단 말이지.”

“조금만 더 상냥하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 마리안 님. 아가씨가 모는 말에 타는 것은 언제나 영광입죠.”

소녀 뮤리얼 웨버와 조모 마리안을 발견했던 날.

마리안이 착용하고 있던 수술 귀걸이와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활동복을, 지금 눈앞에서 절 내려다보는 여인이 똑같이 착용하고 있었다.

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요란한 인기척에 제이디가 그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식간에 잠기운이 날아간 제이디 또한 기민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안개 같은 기시감 속을 잠시 더 헤매던 리안이 천천히 자세를 바꾸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리안이 말했다.

“여명의 주인을 뵙습니다.”

“…….”

이크람의 지도자를 향한 인사말을 알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좌중이 동요했다. 제이디는 누구에게도 허리 한번 숙인 적 없는 리안이 보인 태도에 잠시 놀랐지만, 눈치껏 재빨리 그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미동 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여인이 마침내 명령했다.

“인솔하라.”

14대 ‘황금 매’ 디디야 이크람이었다.

*  *  *

【천년의 손님이 여명의 땅 이크람에 당도하니, 열네 번째 황금 매는 그 유지를 이어 세계의 전복에 기여하리라.】

“예언서의 ‘천년의 손님’이 이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소. 묘사된 외양이 너무 다르지 않소. 분명 신께서는 여명을 닮은 사내가 올 거라고 했소. 저자는 여명은커녕 그 기운이 불길한 것이 단순 조난자임이 확실하오. 이크람의 규율을 따르는 것이 조금 더 현명한 여명의 길일 듯하오.”

드디어 약속과 예언의 땅, 여명의 이크람에 당도한 리안과 제이디는 그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발전하지 않은 문명일 줄 알았던 동부 원주민의 마을은 ‘마을’이 아니라 가히 ‘도시’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그 기술 수준이 높았다. 베르딘 제국령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이국적인 모습에 특히나 제이디가 더 놀라고 있었다.

“너무 놀라는군.”

“이색적인 문명에 감탄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때처럼 양손이 묶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마치 제이디가 아타르의 약탈꾼들에게 납치되었던 그때처럼, 두 사람은 현재 양손이 포박된 채 무릎 꿇려져 있었다.

“우리한테 발언 기회라도 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에요. 무슨 말을 나누는지도 모르겠으니 답답하네요.”

“걱정 말아요. 처신을 논의 중인 듯하니.”

탁…!

감시 중이던 이크람 군사 하나가 조용히 하란 듯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부딪쳤다. 눈을 한 번 굴린 리안이 입을 다물자 제이디도 곧 조용해졌다.

석재와 금속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은 저마다 특색 있는 기하학적 패턴으로 건축되어 있었고, 마른 흙바닥을 지나다니는 주민들의 복식은 가볍고도 전통적인 복식미가 잘 살아 있었다. 그 광경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제이디는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았다.

“대책은 없지만, 일단 멋진 곳이에요.”

그때, 처음 두 사람을 끌고 온 여인이 등 뒤에 줄줄이 호위를 달고 원로 회의 건물을 빠져나왔다. 환한 햇볕 아래에서 보니 그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제이디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이크람의 열네 번째 황금 매 디디야.”

“…….”

“여명의 땅에 무단으로 침입한 그대들을 추방한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