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66)화 (67/116)

“내… …줄 알았…고!”

희미하게 밝아 오는 시야에 가장 먼저 잡힌 것은 여전히 허허벌판 모래사장이었다.

“아이, 씨! 몰라! 맘대로 해!”

“그럴 수 없다. …때까진 한 발짝도 널 떠날 수 없어.”

“제발 좀!”

그다음 인지되는 건 웬 남녀의 치정 싸움 비슷한 대화였다.

‘…….’

현실 감각을 되찾은 제이디는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을 기억했다.

“제이디! 얼른 일어나요!”

빠르게 다가오는 모래 폭풍에 압도되어 넋을 잃은 자신을 리안이 둘러메었고… 그다음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대로 폭풍에 삼켜져 휘말리고 기절한 게 틀림없었다.

“콜록…! 퉤!”

푸… 입에 가득 들어찬 모래를 게우듯 뱉어 낸 제이디가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멍했고, 폐까지 모래가 담긴 듯 목구멍과 배 속이 따갑고 거슬렸다.

‘어떻게 살았지….’

먼지를 얼마나 마셨는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바닥을 짚은 손을 내려다보다 문득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 제이디는 뻑뻑한 눈꺼풀을 어떻게든 더 들어 올리려 애썼다.

“아….”

그랬다. 소지자의 기력을 소진해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 후견인이었던 ‘모리스 딜레앙’이 선물한 손목시계를 제이디는 여전히 착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거… 다회용이었나?

아무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제이디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지러운 시야, 여전히 치정 싸움 비슷한 걸 하는 모르는 사람 두 명, 그리고 그 아래… 어째 풀어 헤쳐진 채 널브러진 리안이 있었다.

“리안!”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뭐야. 살아 있었네.”

“리안…! 안 돼… 안 돼!”

여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제이디가 허겁지겁 리안에게 다가갔다. 죽은 사람처럼 쓰러진 리안에게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황에 빠진 듯 공포가 밀려왔다.

“아… 흐….”

제이디는 리안의 얼굴에 묻은 모래 먼지를 떨리는 손으로 닦아 냈다. 흔들어도 보고 때려도 봤지만 그저 흔드는 대로 흔들리기만 할 뿐, 리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없이 울다가 그제야 생명 반응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디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리안의 가슴팍에 귀를 대 보았다.

다행히, 아주 미세하게나마 숨은 붙어 있었다.

“하….”

이번에는 안도가 되어서 눈물이 나왔다.

“진짜, 죽은 줄, 흐… 알았잖아….”

멀찍이서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인이 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남친이야?”

“……!”

그제야 아까부터 자신을 보고 있던 남녀의 존재를 인지한 제이디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짚었지만 총도, 칼도,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육탄전으로라도 버텨 보자고 결심한 제이디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리안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그저 멍하니 그 애처로운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제국 최고의 약사, 그리고 제국 최초의 개인 자동차를 만든 천재 발명가의 첫 만남이었다.

*  *  *

흐릿한 시선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은하수가 의식이 돌아온 리안을 가장 먼저 맞이했다.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딱딱한 어딘가에 뉘어진 채… 사막 위를 달리고 있었다.

‘결박?’

몸은 결박되지 않았고, 시야도 막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납치는 아닐 것이다.

‘혁명군이 날 찾았나.’

하지만 혁명군이라기에는 마차의 상태가 너무…

‘……?’

마차가 아니다. 탈탈탈탈… 털털털… 등을 댄 의자 아래로 들려오는 소리는 필시 기계의 소리다. 바퀴 달린 기계 탈것은 오직 황실 기공사만 만들 수 있다. 즉 황실과 황실 직속 산하기관만 가질 수 있다. 그렇다는 건…

‘황실에 잡혔군.’

아. 이럴 수가. 리안은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손등으로 눌렀다.

이렇게 실패하다니!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 돌아온 시간인데, 어떻게 잡은 마지막 기회인데…!

“제기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반응한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절망하는 리안을 발견한 그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야! 일어나 봐, 예쁜이! 네 남친 깼어! 살았다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어조가 묻어나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깬 제이디가 리안 쪽을 돌아보며 놀랐다.

곧이어 운전자가 차를 세우고, 제이디는 단숨에 뒷좌석으로 넘어가 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리안! 괜찮아요? 숨은 제대로 쉬어져요?”

“아….”

아픕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습니다….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어 리안은 그저 제이디의 품에 축 처졌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안도, 감사, 그리고 또 안도.

“살았군요…. 다행입니다.”

힘겹게 내뱉은 두 마디가 제이디의 어깨에 스미듯 퍼졌다.

“이봐! 당신 애인이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르지? 한나절 엄청나게 부려 먹혔다고. 어디 가서 뭘 따라느니 무슨 색 꽃이 달린 풀을 캐라느니, 염분 없는 물이 필요하다느니 말이야. 이 사막 한가운데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개고생도 그런 개고생이 없었다니까!”

“애인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예쁜이 없었으면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단 말씀!”

…아. 대강 사태 파악이 된 리안이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구나. 제이디 헤이스터가 또 한 번 제 목숨을 구해 준 모양이었다.

몸이 힘든지 제대로 말을 못 하는 리안의 안색을 살핀 제이디가 물주머니를 건넸다. 물을 마시자, 온몸에 쌓였던 버석한 모래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그 거대한 모래 폭풍에 먹히고도 이렇게 살아남다니. 기적 같았다.

흐드러진 은하수 아래, 달빛을 받은 모두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저승 문턱을 건너다 되돌아온 리안은 모든 것이 꿈결같이 보였다. 그 가운데 가장 꿈결 같은 제이디 헤이스터가 마침내 희미하게 미소 짓는 리안을 보고 마주 환하게 웃었다.

정체불명의 젊은 남녀에게 구출된 리안과 제이디는 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딴 나라 사람인 양 특이한 차림을 한 그들에게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다.

“이단 연구를 들켰군.”

“이단이 아니야! 내가 만든 자동차로 물자나 사람을 더 빠르게 옮길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더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거잖아!”

“…….”

리안은 눈앞에서 열을 내는 꼬질꼬질한 사상범을 바라보며 자못 놀랐다. 여전히 이렇게 순수한 발명가가 있었을 줄이야.

“바로 그걸 황실에선 ‘이단’이라고 불러.”

“단어랑 뜻이 연결이 안 되는데?”

“…출신지가?”

“아타르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이야. 티샤카라고.”

황실의 기술 압제 정책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할 만큼 작고 외진 동부의 공동체에서 자란 천재라면 충분히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의 표정이 축 처졌다.

“내가 아타르에서 다짜고짜 잡혀가는 바람에 마을이 난리가 났을 거야. 사실 언제든 떠날 생각이야 있었지만. 제대로 작별은 해야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잠깐 점검하는 듯하더니, 고철 덩어리 같던 ‘자동차’는 아주 안정적으로 조용히 달렸다. 리안은 여인이 ‘자동차’라고 부르는 것의 구조와 외관을 잠시 살피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안했다.

“너, 이름이 뭐라고?”

“유니스.”

“그래, 유니스. 하고 싶은 연구 실컷 하면서 돈도 벌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자리는 어때?”

유니스의 눈이 단박에 커다래졌다. 완전히 솔깃한 듯했다. 그러나, 그 옆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며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달랐다.

끼익, 차가 멈추더니, 철컥. 일반 제국민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피스톨이 리안의 이마 정중앙을 겨냥했다.

“수작질이 과하군.”

“…….”

“그렇게 이용당하다 희생된 티샤카인이 한둘인 줄 아나?”

“그 ‘티샤카’라는 곳에, 너희 같은 기술자가 더 있나?”

손가락으로 총구를 치우고 피스톨의 양각을 음미하듯 쓸어내리며 리안이 말했다. 곧 총의 연식과 대강의 해부도까지 머릿속으로 파헤쳐 본 리안은 티샤카인의 기술력을 단박에 파악했다.

황실의 탄압을 이기지 못해 수도를 떠난 자들은 비단 ‘마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제 총기 장인 ‘건스미스’도 탄압의 대상 중 하나였다. 동방 제국으로 넘어가거나 황실 기공사로 전향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소규모 마을을 만들어 몰래 기술을 이어 가는 자들도 있었다. 혁명군의 기술부에도 헤이미 롤랑을 비롯해 동부 출신이 많았다.

개인적인 연구로 바퀴 달린 탈것을 만들어 내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내연기관을 차체 안에 넣는 것은 황실 기공사들도 할 수 있었지만 이만큼 크고 빠른 자동차는 아직 어디서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 정도 품질의 총기 제작 실력이라니.

이 이상한 기술자들과의 협력은 혁명군의 기동력과 전력을 높일 절호의 기회였다.

“조악하지만 무게감도 있고 안정적인 것이, 한두 번 만들어 본 솜씨가 아니군. 다만 간과한 것은 총기에 해박한 자를 위협하는 방법일까.”

“…….”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으니까. 여기 실탄이 들지 않은 것쯤.”

유니스가 냉큼 듀크의 팔을 붙잡아 내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리안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어디 가면 그런 일자리가 있는데? 안전한 거 맞아?”

“유니스.”

듀크라는 사내가 유니스를 막아섰다. 아무래도 조심성이 강한 성격인 듯했다. 좋은 성향이었다. 특히나 동부처럼 척박한 곳에서는 더더욱.

“당신네가 가진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더는 듣지 않겠다. 우선 어떠한 경위로 모래 폭풍에 휘말렸는지부터 들어야겠군.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보이면 동승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리안이 물꼬를 틀었다. 제이디는 언제나 리안이 어떻게 혁명군의 주요 세력을 모아 왔는지 궁금했었다. 상대가 가진 욕망을 파악해 논리적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리안의 화법을 들으며 제이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리안이 이야기를 마쳤을 무렵, 유니스의 얼굴에는 이제까지 중 가장 강렬한 고양감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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