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64)화 (65/116)

전령 회의 후, 맥 칼리스토는 다시 황성으로 돌아갔다.

황성 소식을 알게 된 간부들 사이에는 다소 어두운 기운이 흘렀다.

제국군의 비둘기가 모두 당했다니. 그들 중 친분 있는 자가 있던 로제타는 당장이라도 아무나 붙잡고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걸 참는 듯했고. 헐리 또한 충격적인 소식에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리안과 함께 낙타에 짐을 꾸리던 제이디는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랑은 안면이 있어요.”

“친위대장 말입니까.”

어제 일을 겪고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은 그 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제이디는 리안에게만은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솔직해지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자카르와의 일화를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졸업반 진학 전, 1차 록펠라 광장 폭격이 있고 만난 적이 있어요.”

“광장에서?”

“네. 추모제에서요. 그날… 제가 그를 알아보고 먼저 다가갔었어요.”

“온갖 잔인한 일도 서슴지 않는 친위대의 수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긴 경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고, 나는 당신이 죄책감과 분노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도발적인 발언을 했더니 저한테 다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었어요.”

“…….”

리안은 제이디가 목숨이 여러 개인 것처럼 행동했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훗날 델로이의 찻집으로 절 체포하러 온 것도 그 사람이었어요.”

“찻집도 했었습니까? 뮤리얼 웨버와?”

“아….”

제이디는 문득 그리운 감정이 일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뮤리얼이 죽고 얼마 있지 않아서요.”

“…….”

“지병이 있으셨거든요. 이번에 동부에서 그 병을 치료할 방법도 알아낼 생각이에요.”

“그랬군요.”

“아무튼 자카르 경과는 리안이 체포되고 나서도 가까이 지냈어요. 그때까지도 그는 크게 이성을 잃거나 잔인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어요. 오히려…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보일 때도 있어서. 이상한 일이에요. 전 그에게서 계속 희망을 봤었는데.”

“사람은 아주 사소한 변수로도 쉽게 변하고는 하니.”

먼저 낙타에 올라탄 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등자에 발을 디딘 제이디가 리안의 부축을 받아 함께 낙타에 올랐다.

“나의 별거 아닌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배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작은 호의 하나가 미래를 바꿀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혹시 모르지요. 그사이 달라진 변수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지.”

뜨거운 태양 빛에 살갗이 타지 않도록 일행 모두가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리안이 제이디의 머리에 얇은 면포를 둘러 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막을 건널 준비가 끝났다.

아타르에서 고용한 전문 길잡이 테오스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코라냐크 사막은 모래가 무르고 깊어 바퀴가 구를 수 없고, 말은 더위를 견딜 수 없기에 일행 모두가 배정된 낙타에 올라탄 채였다.

“출발합니다.”

바로 뒤에 붙어 앉은 리안이 말을 할 때마다 몸이 웅웅 울렸다. 그와 함께 며칠 밤낮을 이렇게 지내야 한다니…. 낯설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안 그래도 뜨거운 날씨에 몸이 더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제이디와 리안의 낙타는 비대한 덩치에 비해 온순했으나, 헐리 무니의 낙타는 주인의 성격을 닮아 매우 까칠했다.

쿠르르… 캬아! 푸흐… 쉬익!

매우 위협적인 투레질 소리가 들릴 때마다 덩달아 역정을 내는 헐리 무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을 참기 힘들어서, 제이디는 결국 빵 터지고 말았다.

길잡이의 도움으로 헐리 무니의 낙타가 겨우 차분함을 되찾은 뒤, 마침내 코라냐크 사막 횡단이 시작됐다.

낙타에 타 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멀미가 나는 것을 빼면 여정은 순조로웠다. 제이디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동부의 건조한 대기에 오감을 곤두세웠다. 출발하기 전 길잡이의 권유에 따라 온몸에 향유를 발랐음에도 피부가 바싹 마르는 것 같아 괴로웠다.

몇 시간을 내리 움직여 마침내 쉼터에 도착했을 때, 제이디의 수통은 이미 텅 빈 채였다. 낙타를 매어 놓고 준비해 온 건조 음식을 나누어 먹은 일행은 저마다 몸을 풀고 향유를 바르며 피로를 다스렸다.

향유가 담긴 병을 열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성분을 분석해 보는 제이디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대뜸 가까이 와서 총을 내미는 상대방의 모습에 제이디가 놀란 눈을 치켜떴다.

“대장이 너, 제대로 훈련시키라고 해서.”

붉은 머리 로제타가 뻑뻑한 화과자를 우물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리안이요?”

“강해지고 싶다며.”

“어… 네. 맞아요.”

제이디는 내심 같은 여성으로서 동경했지만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로제타가 먼저 다가온 게 기뻐, 마력구를 켠 듯 눈빛을 반짝였다.

“재능이 있는지 보고 싶어.”

그 말에 제이디는 피로도 잊고 일어서서 로제타가 건넨 연습용 피스톨을 꼬옥 쥐었다. 어쩐지 돌발 시험이 있을 거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리를 벌린 로제타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제이디의 동태를 살폈다.

사아아, 늦오후의 사막 모래가 얕은 바람에 스산하게 날렸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때였다. 눈앞에 있던 붉은 곱슬머리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제이디가 미처 겨냥하거나 피할 틈도 없이, 몸을 낮추고 빠르게 접근한 로제타가 품에 있던 단검을 뽑아 휘둘렀다.

사락….

두르고 있던 면포가 무 썰리듯 동강 나며, 함께 잘린 제이디의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한 가닥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제이디는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눈만 끔뻑끔뻑했다. 로제타가 들고 있던 단검을 휘릭 던져 올렸다 붙잡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린 면포가 바닥으로 힘없이 풀려 떨어지자 제이디는 그제야 허둥지둥하며 바닥에서 면포 조각을 주워 올렸다.

붉은 머리 로제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더니, 정말이었다. 친위대의 암살단도 부럽지 않은 속도와 날렵함은 꼭 귀신같이 빨라서 그녀가 왜 인간 병기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혁명군 최고의 전투원에게 전담 교육을 받을 수 있다니! 들뜬 제이디와는 달리, 로제타는 앞길이 깜깜하다는 듯 한숨 쉬었다.

*  *  *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을 텐데 미안합니다. 여정이 고되어서.”

“아니에요. 이제 진짜 괜찮아요. 체력 하난 나름 자신 있어요.”

코라냐크 사막 여정 사흗날이었다.

정오를 지난 시각, 갈증과 모래 먼지에 조금 지치는 것을 빼면 무난한 여정이었다. 밤이 되면 하늘 위에 펼쳐지는 은하수가 장관이고, 아침이 밝아 올 무렵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도 좋았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라 제이디는 매일매일 새로운 발견을 하는 기분이었다.

“리안.”

“네.”

터벅, 터벅… 낙타는 지치지도 않고 동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 위에서 함께 흔들리며 제이디는 리안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의 관계가 부쩍 가까워진 듯했지만, 여전히 리안은 과거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언젠가 모든 의무가 다 끝나면… ‘약국’을 차리고 싶어요.”

“약국이라면 약을 파는 곳을 뜻합니까?”

“네. 찻집이라고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약국이었거든요. 제국 최초의 약국을 세워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서로 같은 곳을 향하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리안은 제이디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았다.

“아주 좋은 꿈입니다.”

“그러고 보면 황정이 끝난 세상은 어떨지 상상해 본 적이 없네요. 리안은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모든 것이 끝나고…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없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내일’이 되면요.”

뜻밖의 질문을 받은 리안은 조금 놀랐다.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내일. 그렇게 시간을 돌아왔어도 그런 ‘내일’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최초의 미래’ 상황이 되면 새로운 정보와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일분일초가 바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여유 없이 맹목적인 목적의식에만 매몰되어 살아왔는지, ‘희망’이라는 것을 소실한 채 살아왔는지, 리안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오랜 시간을 돌아왔으니 분명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겠죠?”

“…….”

음, 고민하는 리안에게서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 힘든 소원도 있죠. 속으로만 생각해도 괜찮아요.”

제이디가 뒤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가지는 분명하네요.”

“뭔데요?”

“제이디에게 제국 최초이자 최고의 약국을 차려 주는 것.”

“그래 주실래요?”

“내가 그 선물을 할 수 있다면 나 또한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도, 건조한 모래바람도 이길 만큼 부풀어 오른 ‘희망’ 같은 것이, 두 사람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 한때. 머지않은 미래에 고단한 길만 있을지라도 이런 소소한 희망만 있다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한때였다.

*  *  *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어요.”

해가 저무는 시각. 제이디의 목소리가 여정에 지친 모두를 둘러싼 고요한 정적을 깼다. 뒤에 앉아 있던 리안이 반응했다.

“무언가 달라졌습니까?”

“리안. 바람이 이상해요.”

제이디의 어조가 심상치 않아 리안이 행렬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죠?”

앞장서던 길잡이 테오스가 낙타에서 내려서 리안 쪽으로 다가왔다. 낙타에서 훌쩍 뛰어내린 채 모래에 두 무릎을 대고 앉아 무언가를 감지하는 제이디를 리안이 조용히 응시했다.

“어디 몸이 불편하신가요?”

쉿, 리안이 테오스를 향해 검지를 들어 보였다.

제이디는 눈을 감고 두 손바닥을 가만 바닥에 짚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 일어서서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국지풍이 부나요?”

“…뭔 풍이요?”

“특별히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 있나요? 인근의 대류가 심상치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코라냐크 사막 중심부는 사시사철 고요하기로 유명합니다. 아주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제외하면요.”

의아하게 바라보는 테오스를 뒤로하고, 제이디는 매우 단호한 얼굴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당장 여정을 멈춰야 해요.”

무겁게 가라앉은 제이디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분위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이 정도 수준의 대류 변화는 겪어 본 적 없어요. 대기의 밀도도 높아졌고요. 예상이 맞는다면, 필시 기상이 뒤틀릴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기상이 뒤틀려?”

로제타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지대가 변할 만큼, 거대한 폭풍이 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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