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딘 황궁, 제국군 마법대 훈련소.
저마다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맞춘 소대가 지시를 기다렸다. 수석 마법사가 손을 들어 올리자, 마법대원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리기 시작했다.
대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게 바뀌며, 마침내 훈련소 일대만 국지적으로 어두워진 무렵. 콰릉! 굵은 번개 한 줄기가 세찬 기세로 표적에 떨어졌다. 신입 마법사들의 훈련이었다.
멀찍이서 마법대원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마법대장 율린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작년 신입들에 비해 묘하게 위력이 약하다.
“느립니다.”
그래…. 여전히 느리기도 하고.
“공대지 전술치고는 벌써 온몸에 구멍이 나고도 남을 시간이군요.”
율린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에게 모두가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율린은 딱딱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폐하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자카르가 신입 훈련대 쪽을 응시하며 나지막한 어조로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자 율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무책임한 태도라기보다는 자신 또한 그에 무척이나 동의한다는 수긍의 표현이었다.
“내 심기 또한 만만치 않게 불편하다네.”
자카르는 갓 취학한 아이처럼 자그맣지만 곧 관짝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 세월을 담은 얼굴을 한 베르딘 마법대장 율린을 내려다보았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눈에 띄게 줄었어. ‘그들’의 불순한 정신이 마법계에도 뿌리를 뻗고 있다네. 나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정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였다. 훈련장 한 곳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친위대 군사들이 은발 머리 신입 마법대원 하나를 포박한 채 무릎을 꿇리고 있었다. 율린이 무슨 짓이냐며 자카르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포위된 마법대원의 옷소매가 친위대의 칼날에 주욱 찢어졌다. 그 사이로 드러난 표식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분명, 입단 전 신체검사를 할 텐데.”
“한둘이 아니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대답에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율린이 화들짝 놀라며 나무라듯 대답했다.
“이보게. 이곳엔 순수한 마법사들이 더 많다네. 매도할 생각은 말게.”
“폐하의 뜻입니다.”
“자카르!”
“색출해.”
냉담한 한 마디로 전 대원 조사를 명한 자카르가 변화 없는 무표정으로 땅딸막한 마법대장 율린을 깔아 보았다.
“반란 정신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다고 하지요. 그러니 이런 대응도 마땅한 해결책이 아닐 수 있습니다.”
“…….”
“조금 더 사람 보는 안목을 기르셔야겠습니다. 마법사란 작자들은 온종일 책에만 파묻혀 있으니, 도리어 고지식해 세상 보는 눈이 좁더군요. 개입하지 않으면 방종을 보이니, 이제 자유는 내려놓으셔야겠습니다.”
“이…! 어느 안전이라고!”
흥분하는 율린 대장의 앞을 자카르의 부관 세이먼 레이투스가 막아섰다. 명백한 하대에 율린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자카르의 말도 틀리지 않았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논리로 이길 자신이 없는 율린은 차라리 냉소하며 비꼬는 쪽을 택했다.
“신출내기 친위대장이 언제까지 이곳 황궁에서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권력도 신성신의 힘 앞에서는 무엇도 아닌 것을….”
“…….”
“중령, 그 자리의 무게를 잘 기억하게. 그런 말도 있지 않소. 늑대는 약한 어미를 따르지 않는다고…. 본디 친위대란 그런 곳이었으니. 언젠가 자네가 힘을 증명하지 못할 때, 저들은 자네에게서 등을 보일걸세.”
“너무 나가는군. 이만 가겠습니다.”
“명심하게.”
뒤돌아 걸어가는 자카르의 등으로 늙은 마법사의 마지막 조언이 날아들었다.
“내가 걸어온 세월로써 주는 예언이라는 걸 말이네.”
색출은 일주일간 이어졌다. 제국군 중 총 스물네 명의 혁명군 세력 확인. 개중 수석 마법사가 2인, 신체검사 관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카르 아르디오스는 공로를 인정받았으나 그를 향한 황실 내 지지 세력은 오히려 약해졌다. 60년이란 세월을 황실에 몸담은, 살아 있는 역사 율린의 세력이 모두 그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에.
자카르가 마법대 첩자의 끄나풀을 잡은 것은 록펠라 광장 추모제에서 우연히 제이디 헤이스터를 만난 이후였다.
“경께서는 이곳에 어떤 마음으로 오셨나요? 자신이 망가뜨린 자들의 영혼을 이제 와 위로하시는 건, 어떤 감정의 작용인가요?”
그 물음은 계속해서 자카르를 심연에 빠뜨리길 반복했다. 때문에 그는 괴로웠고, 그날, 다시는 눈에 띄지 말라고 소녀에게 경고했음에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슬픔인가요? 아니면 동정? 의무감?”
탕─
그녀와의 대화가 떠올라 마음이 뒤죽박죽 엉망이 될 때면 자카르는 여지없이 훈련장에서 몸을 움직였다.
“딱히. 무엇도 아닙니다.”
탕─
독한 화약 연기를 일부러 마셔 머릿속을 흔드는 혼란을 뒤덮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경멸하듯 저를 보던 눈동자. 하지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모종의 안쓰러움. 일말의 동정. 그런 것들이 자꾸만 정신을 괴롭혔다.
다시 소녀를 만난다면,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하고 싶었다. 너는 어째서 나와는 다른 ‘우리’의 편에 선 것이냐고. 널 그렇게 만든 건 어떤 감정이냐고.
알 수 없는 이끌림은 자카르를 매일같이 록펠라 광장으로 나오게 했다. 파헤쳐지고 쑥대밭이 된 추모제 현장과 한창 재건되고 있지만 여전히 폐허 같은 그곳에 덩그러니 서서 소녀를 기다렸다. 스스로도 안 될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하지만 자카르는 그날의 은발 머리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졸업 무도회 준비로 아카데미 학생들이 광장에 자주 나올 때도 그 애는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카르의 눈에 띈 은발 머리는 따로 있었다. 통금 시간, 남몰래 광장에 나와 다시 추모제 자리를 만들고 길거리의 노숙자들을 치료하는 한 마법사를 보았다. 신입 마법대원 임명식에서 가장 앞줄에 서 있었던 여인이었다.
“여하간 여긴 경과 어울리는 장소는 아닌 듯해요.”
역시 이곳은 내가 아니라, 남몰래 반란을 저지르는 불순한 자만이 어울리는 곳.
그것을 실감하고 만 자카르는 생각을 반대로 고쳤다. 이곳까지 나를 이끈 건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을 잡기 위해서다. 그 아이처럼.
다시 그녀를 만나면 질문 대신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당신이 내가 선 곳을 똑똑히 정의해 준 덕분에, 나는 내 의무를 다할 수 있었노라고.
“형, 우리도 언젠간 따뜻한 빵을 먹어 볼 수 있을까?”
내가 지켜야 할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제 아무 의심도 망설임도 없노라고.
친위대의 마법대 색출 사건 이후 자비에르 황제의 심기가 눈에 띄게 예민해졌음은 자명했다. 젊은 친위대장이 공을 세운 후, 자비에르는 록펠라 광장 2차 폭격을 지시했다. 명을 행하는 자카르 아르디오스의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후작님.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은색 열주에 넝쿨 장식을 더해 고즈넉하면서도 웅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
그 앞에 도착한 호화로운 마차에서 경쾌하게 내려서는 여인이 있었다. 싱그러운 풀 향기가 가득 감도는 이곳은 황립 대학에서 멀지 않은 황성 펠리디오스 제2저택이었다.
“막내야, 왔느냐!”
“아버지!”
“그래그래, 얼른 오너라.”
체통도 잊고 버선발로 여인을 마중 나온 이는 황제의 최측근 중 하나인 펠리디오스 후작이었다.
후작은 늙어 보이는 것에 몹시 민감했다. 황성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머리를 넘기고, 뉴폴레도 제도 출신 화제의 사업가가 개발한 염색약으로 어떻게든 희끗희끗 센 머리를 몰래 감췄지만, 늙수그레한 인상과 주름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찌감치 후작가의 입김으로 두 아들을 황궁 관리로 보내고, 뒤이어 쟁쟁한 가문으로 세 딸을 출가시킨 후작을 즐겁게 하는 것은 갓 아카데미를 졸업한 막내딸, 휘노 펠리디오스뿐이었다.
늙은 후작이 품은 마지막 소망이라면 사랑둥이 막내딸까지 쟁쟁한 가문에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특히나 늦둥이로서 애지중지 키운 막내이니만큼, 이 아이의 혼처는 최소 왕족 이상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 휘노 펠리디오스는 사교계의 어느 영애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학식과 교양을 겸비해야 했다. 이미 제 어미를 쏙 빼닮아 하늘 위의 천사같이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니. 황립 대학 졸업장만 무사히 딴다면, 후작의 숙원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내 우리 막내를 위해 제2저택으로 거처까지 옮겼으니. 막내의 대학 생활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이 애비 손에 무사치 못하리라!
“황립 악단에 입단 신청서를 넣었어요.”
주륵…. 후작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찻물이 그만 잔 받침에 흘렀다.
“콜록, 츱…!”
“아버지, 체통을 지켜 주세요.”
“무어라 했느냐. 악단…?”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사랑스러운 막내딸을 쳐다보았다.
“딴따라 짓은 아카데미에서 놀이 삼아 끝낸 게 아니더냐?”
“아니에요.”
“아니라고…?”
우아하게 찻잔을 든 휘노 펠리디오스가 단호하고 간결하게 한 번 더 말했다.
“네. 아니에요.”
“아가, 악단은 황립 대학에도 있지 않느냐.”
“대학 악단이라고 해 봐야 아카데미에서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전 제국 최고의 악단에 들어가고 싶어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무어냐, 막내야. 분명 황립 대학에 가기로 이 아비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급기야 후작이 절박하게 물었다. 휘노는 호록,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난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 그리고… 어떻게든 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네가 져 줘.”
“휘노. 너의 삶을 살길 바랄게.”
휘노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제이디였다. 언제나 자기만의 꿈이 확고한 친우와 4년을 붙어 있었으니,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나도…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야.’
졸업 무도회 날, 제이디와 작별 인사를 한 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휘노는 창밖에 스치는 각양각색의 황성민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어떤 꿈을 가질지에 대해.
‘제이디는 목숨 걸고 자기만의 연구를 하고 리노도 자기만의 예술을 펼쳐서 돈을 벌고 있잖아. 그런데 나는…. 나도 내 음악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어. 그래야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런 다짐 뒤로 제이디의 보기 드문 환한 미소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듯.
막내의 굳건한 의지에 후작이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했다.
악단이라니, 악단이라니, 악단이라니! 고작 딴따라로는 왕족과의 혼인은커녕 충분한 학식도 얻을 수 없다. 대를 잇는 것이야 제 형제들이 한다지마는… 아니, 지금은 후작가의 미래나 명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딴따라 모임에는 딴따라들만 모이는 법…!
후작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와 아카데미 시절 붙어 다니던 리노 슈펜하이어를 떠올렸다.
슈펜하이어는 정통적인 귀족성이 강한 보수파 펠리디오스 가문과 아주 상극인 놈팡이 가문이었기에 휘노의 수행인 피오레를 통해 정기적으로 그에 관한 보고를 받았었다. 혹시나 슈펜하이어의 핏줄을 받은 녀석이 아리따운 막내에게 추파라도 던질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어도 제이디 헤이스터인지 뭔지 하는 뿌리 출신 고아랑 함께 다닌다는 말에 아카데미 4년 내내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했거늘… 슈펜하이어 같은 놈팡이 가문이랑 붙어 다닐 바엔 차라리 동성의 고아가 낫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악단이라면 슈펜하이어 같은 녀석이라든지 뿌리 출신이 가득한 곳일 텐데. 아낌없이 퍼 주어도 모자란 우리 막내를 그런 소굴로 보낼 순 없었다. 절대, 절대, 절대로!
“전 성인이고, 제 앞길은 제가 정할 권리가 있어요.”
제이디도, 리노도 한 일을 나라고 못 할 게 뭐냐고!
“아니…! 악단만은 절대로 안 된다, 아가! 이 아비가 허락할 수 없다!”
“싫어요! 악단에 갈 거예요! 갈 거라고요!”
논쟁이 길어졌다. 이윽고 차가 다 식었을 무렵에는 두 사람 모두 언성이 높아져 사용인들이 잔뜩 눈치를 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제 아버지의 인형 놀이에서는 기꺼이 빠지겠어요!”
“막내야! 어디 가느냐, 막내야!”
빽 고함을 내지르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막내를 늙은 후작이 목청 높여 불렀다. 애처로운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용인이 고개를 숙였다.
며칠 뒤, 펠리디오스 부녀의 불화에 대한 소문이 온 사교계에 퍼지고. 휘노 펠리디오스의 뒤를 이어 부모에게 반항하는 귀족 자제들이 하나둘 더 등장하기 시작했다.
광장의 부티크에서 귀부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리노 슈펜하이어는 우유부단하던 친우가 마침내 한 건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하게 웃었다.
“악단 수련생한테 어울리는 옷을 한 벌 지어 줘야겠네.”
귀족가 자제들의 자유 의지가 무르익어 가는 찬란한 반란기의 한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