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58)화 (59/116)

제이디의 ‘붉은 기’ 의식 후, 일행은 동부 코라냐크로 떠날 채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리안이 제이디의 곁에 머물며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것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제이디는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격하게 따지고 논쟁하고 싶다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만히 이 기분을 정리해 볼 시간을 갖고 싶어도 도통 혼자 있을 시간이 나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런 거대한 세력에, 그것도 제국의 2황자가 수장으로 앉아 있는 집단에 과보호를 받게 되리라고는 꿈조차도 꿔 보지 않았다.

여정 시작 당일.

탈로스 딜레앙 제1저택 정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서자마자 제이디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자못 놀랐다.

분명 저와 리안, 그리고 헐리 씨만 동행하는 줄 알았는데. 마차 뒤로 늘어선 짐과 인원을 보면 꼭 거대 상단이라도 움직이는 듯한 행렬이었다.

“떠나기 전 더 할 일이 있을까요?”

함께 나온 리안이 제이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황실 세력에 밀려난 원주민들이 모여 숨어 살고 있다는 비밀의 땅, 코라냐크. 그곳에 간다는 계획을 듣고 제이디는 ‘역병의 기원을 알아낸다’는 대의적인 목표 외 개인적인 목표 몇 가지를 세웠다.

첫째는 뮤리얼의 병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 둘째는 4황녀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약초에 관한 정보를 찾는 것.

그 전에 뮤리얼과 동행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과거 그 ‘마녀’의 집을 찾아가 문을 열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던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뮤리얼, 기다려요. 내가 꼭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재차 다짐하며, 제이디는 리안에게 빨리 출발하자고 대답했다.

리안은 남은 측근들에게 황성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뒤 마차에 올라탔다. 제이디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고급 옷감으로 지어진 활동복, 아카데미 학생들이 신는 로퍼가 아닌 견고한 가죽으로 짜인 부츠, 그리고… 혁명군의 상징인 ‘붉은 기’가 새겨진 팔.

스스로의 모습을 살피던 제이디는 문득 록펠라 광장 시가전에 휘말렸을 때 보았던 혁명군의 복식을 떠올렸다. 아카데미에서만 생활하던 제게 격식보단 실용성과 활동성을 강조한 그 복식들이 처음에는 어색했었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자신도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입니다.”

“이렇게 마차에 타고 창밖을 보다 보면… 꼭 지난 일들이 떠올라요.”

“지난 일?”

“이전 과거에 있었던 일이요.”

맞은편에 앉은 리안은 코트를 벗어 가만 내려놓았다. 며칠 새 묘하게 수척해져 피로해 보였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아까운 시기라지만, 야윈 얼굴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마차가 속도를 내고, 커튼으로 창을 가린 리안이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과거에만 집중하느라 제이디의 과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재회하기 전 이야기 말인가요?”

“네. 함부로 답장을 하지 않더니 다시 만났을 땐 놀라울 만큼 성장해 있더군요. 그사이 공백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내가 아직 제이디에게 ‘모리스 딜레앙’이던 그 시절 말입니다.”

확실히 그랬었지. 그와 황실의 혼담 이야기를 듣고,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그와의 편지로부터 도피를 했었다.

회상하자 그때의 감정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조악하고, 어딘가에 말하기도 창피한 어떠한 열등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먼저 함부로 답장을 하지 않았던 쪽은 백작님이셨는걸요.”

안 그래도 피로한 상대 앞인데도 어쩐지 고운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일 때문에 바빴다고 하면. 너무 식상한가?”

“일개 수혜자를 신경 쓸 정신이 없으셨던 거겠죠.”

뾰로통한 제이디 앞에서 리안은 불쾌해하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로워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이디는 내게 ‘일개 수혜자’가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땐 함부로 답장을 하지 않더니. 이번엔 함부로 서, 성인 여성과 생활을 같이하겠다고 막무가내로 그러셨잖아요.”

“…….”

“제가 뿌리 출신이 아닌 황족이나 귀족이었더래도 그렇게 대하셨을까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하나, 그런 고심에 빠진 리안을 보며 제이디는 수치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제이디가 의식을 잃었을 때 내 상태가 어땠는지 안다면 날 이해할 겁니다.”

“어땠는데요?”

“…….”

대답 대신 리안은 가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제일 중요한 건 가르쳐 주지 않고. 제이디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리안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리안 베르딘에게 제이디 헤이스터는 성공을 위해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될 카드니까요.”

리안이 다시 눈동자를 돌렸다. 미적지근하던 리안의 눈빛이 그 말 한마디에 급변했다. 어쩐지 가라앉은 얼굴로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무거워 제이디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곧 리안이 짧은 정적을 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본인은 단순히 리안 베르딘의 패 중 하나다?”

“제 말이 틀렸나요?”

“당신이 황족이든 귀족이든 내 언행은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제이디는 늘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상황을 판단하는 줄 알았는데요. 내가 그대에게 베푼 호의가 그대 스스로를 격하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라고 언제나 객관적이지만은 않아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관두죠.”

“왜 리안이 화가 난 거예요?”

“당신은 고작 잃어버려선 안 될 카드 따위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

괜한 투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리안의 모습에 제이디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고작’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못내 편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리안의 ‘고작’이 아니기 때문에 오는 특별함이 일으키는 감정을 아직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스승님과 함께 있었어요.”

“로건 리베르 말입니까.”

“아니에요. 로건 교수님과는 졸업 이후 접점이 없었고. 델로이 지방의 외곽에서 어머니의 스승님과 생활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리안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분께서 돌아가시기까지 3년간, 제게 모든 지식을 전수해 주셨죠.”

“그랬군요. 아주 실력이 뛰어난 ‘마녀’였나 봅니다.”

“아니요.”

제이디는 단호하면서도 미소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저 뛰어난 게 아니었어요. 스승님은 아마 제국 최고의 ‘마녀’셨을 거예요.”

“그분의 이름이 뭔가요?”

뮤리얼의 이름을 말해도 괜찮을까. 시한부 마녀라고 해도… 뮤리얼은 자신의 신변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었다. 제국군의 혹시 모를 습격이 두려웠기 때문에.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결코 뮤리얼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오히려 뮤리얼을 도와 달라고 청하면 망설임 없이 도와줄지도 몰랐다. 제이디는 결심한 듯 또박또박 말했다.

“뮤리얼 웨버.”

덜컹, 마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로가 바뀐 것을 보니 영지의 외곽에 당도한 듯했다. 호기심에 창밖을 구경하는 제이디의 맞은편에서, 리안은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뮤리얼. 과거에서 본 조모 마리안의 측근이자, 한때 이크람을 거쳐 간 떠돌이 마녀. 리안은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희귀한 약초를 꺾기 위해 절벽 위에 매달려 있다 떨어진 그 소녀…. 보자마자 제이디 헤이스터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했던 그 활기찬 소녀.

“…그분이 이때까지 살아 있었단 말입니까.”

제이디는 뮤리얼을 안다는 듯 대답하는 리안을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빛바랜 갈대만이 가득한 험준한 북부를 달리는 마차가 또 한 번 덜컹, 떨렸다.

“뮤리얼을 아세요?”

“보았습니다. 과거에서.”

“어머, 굉장한 우연이에요…!”

리안이 뮤리얼을 알고 있다면, 뮤리얼을 살리는 것을 도와 달라고 청하기도 조금 더 쉬워질 것 같았다. 제이디는 미소를 함빡 머금은 기쁜 얼굴로 리안을 보았고, 리안은 그 얼굴에서 마리안을 대하던 소녀 시절 뮤리얼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델로이에서요? 뮤리얼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델로이를 떠난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보단 이름을 절대 알려 주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아셨어요?”

들떠 이것저것 질문하는 제이디 앞에서, 리안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감당해야 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정말 신이 내게 보내 준 영혼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공고하게 얽혀 있을 리 없다.

대답은 없이 그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리안을 보며 제이디는 금세 머쓱해졌다.

“별로… 알려 주고 싶지 않으시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뮤리얼 웨버는 내 외조모의 측근이었습니다.”

“리안의 할머니요?”

“네. 지금 향하는 곳이 바로 그녀의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것을 보고 왔거든요.”

“그렇군요.”

말을 들으면서도 제이디는 시간대가 안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리안이 아주아주 어릴 적이라고 하면 뮤리얼이 여행을 하고 있을 시기와 얼추 맞을지도 모르고.

“할머니께서는 살아 계신가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리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제이디 자신이 생각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리안이 훨씬 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 제이디는 리안이 많이 피곤한가 보다 추측하며 말을 멈췄다.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곤했던 것은 리안뿐만이 아니었기에 제이디는 저도 모르는 사이 스륵 잠들었다. 눈을 감았을 때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채였는데, 일어나니 누군가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

익숙한 푸른 향이 코끝을 맴돌 때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제이디는 제 머리를 받쳐 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리안 베르딘이 팔짱을 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생각해 보면 잠든 모습을 그에게 보인 적은 있어도 그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은 없는 듯해, 제이디는 생소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튼 사이로 붉은 노을빛이 새어들어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노크하자, 리안이 기민하게 눈을 떴다. 마치 처음부터 잠든 적 없다는 듯이.

“분기점입니다.”

맥 칼리스토 경이었다. 리안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맥 씨가 건네는 지도를 받아 들었다. 그가 다시 맞은편으로 가고, 제이디는 그제야 제 몸에 담요가 덮여 있었음을 알았다.

“황성 인근의 도로 대신 상단이 이용하는 무역로를 탈 겁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눈치챘는지, 리안이 설명을 해 주었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대외적으로 딜레앙 상단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아…. 네.”

그런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제이디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곳을 지나는 상단들이 머무는 평지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예정보다 빠르게.”

“그럼 야영을 하나요?”

“네. 보다시피 이 인근에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여장을 든든히 꾸린 것도 그 때문입니다.”

리안과 함께 마차에서 내려선 제이디가 행장을 풀고 야영을 준비하는 행렬을 보았다.

그러더니 곧 눈을 감고, 검지를 허공에 뻗어 대기의 흐름을 읽었다. 무릎을 굽혀 토지의 질과 상태를 감별하고는 인근 수풀에 핀 식물들의 향을 맡았다.

그 일련의 행동을 리안이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북동부의 건조하고 서늘한 지대네요. 구름이 없고 대기가 맑으니 야영하기 딱 좋은 날씨예요.”

흡,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쉰 제이디가 미소 지으며 리안을 돌아보았다.

“인근에 작은 숲이 있나 봐요. 나무 냄새가 짙은 걸 보니.”

“…….”

“꼭 리안을 닮은 향이에요.”

그리 말하며 다시 주변을 탐색하는 제이디를 보며 감탄한 것은 비단 리안뿐만이 아니었다.

“바다에 항해사가 있다면 땅에는 저 친구가 있는 건가요?”

슬쩍 다가온 맥 칼리스토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줄기가 억세 보이는 한 식물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제이디를 보며, 리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대지의 항해사라. 적절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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