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을 번뜩이며 절 노려보는 자는 분명 4황녀 아멜리아였다.
“정말 도와주러 와 줬구나.”
“착각하지 마. 오직 리안을 위해서니까.”
리안이 아멜리아 쪽을 바라보며 기쁘게 웃었다. 아멜리아 포섭에는 문제없다는 듯 호언장담을 하더니. 리안의 자신감에는 언제나 근거가 있다. 그 점이 리안을 더욱 믿음직하게 만든다고 제이디는 생각했다.
가족 상봉의 시간은 잠시 뒤로 미루고, 긴급 간부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가 진행되며 제이디는 이곳에 모인 모두가 리안의 역사와 비밀을 알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헐리 무니는 마지막 순서였던 것이다. 제이디 자신이 돌아온 과거에 적응하는 동안 리안은 제 편에게 진실을 알리는 데 시간을 쓴 모양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이 나라의 2황자가 그런 과업을 업고 있었을 줄은.”
혁명군 제1간부 아놀드 막시무스가 위장을 위해 썼던 모자를 내려놓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하늘에서 불덩이를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한 세상 아닙니까. 제 신뢰 여부는 중요치 않은 것 같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목숨 닿는 데까지 협조하지요. 처음 당신과 손을 잡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니.”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응접실 안이 숙연해졌다. 록산느 보육원의 정보꾼 다이앤 록산느 원장은 급기야 몰래 눈물까지 훔쳤다. 비록 지난 과거라지만, 록산느 보육원 폭격 사건을 읽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신뢰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께서 우리를 속일 이유도 없거니와, 모든 사건의 연표와 인과가 빈틈없이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심보다는 진보하고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다이앤의 말에 모두가 수긍했다.
리안이 믿는 혁명군 간부들, 그리고 아멜리아까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자신만 모른다는 생각에 제이디는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이 리안을 만난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우주에서뿐이고, 그마저도 몇 해 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나.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기에 제이디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돈되자 리안이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했다.
“역병이 태동하기까지 2년이란 시간이 남았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약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마녀’가 필요하겠죠. 물론 역병의 시발점과 기제를 더욱 자세히 알아낼 필요도 있고요. 나와 헐리, 그리고 제이디는 변방에 흩어진 ‘마녀’들의 협조를 위해 동부 코라냐크로 떠납니다.”
“계획이 있으십니까?”
“단서가 있으니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사이 여러분은 담당 지부의 혁명군을 미리 결집하고 전투 훈련을 하는 겁니다. 헤이미 롤랑의 신무기가 가진 약점을 분석한 설계도가 있으니 곧 개량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합니다. 생산 자본을 확보하려면 광산과 무역 관리도 더욱 철저히 해야겠죠.”
막힘없이 흘러가는 간부 회의를 보며 제이디는 정말 혁명군 세력 한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실감했다.
적지 않은 수의 간부 중에는 황실 산하 경무청의 핵심 인사, 베르딘 황성의 주요한 소식과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는 정보꾼, 실력 있는 ‘마녀’, 제국군 첩자, 상인으로 위장한 전투원들, 자금 관리에 해박한 자까지,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물한 번이나 삶을 되감으며 여기까지 왔을 리안의 이야기가 제이디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는 자신에게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늘 이상적인 모습 그대로이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지만 제이디의 생각은 달랐다. 제이디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리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의 모든 역사… 그리고 모든 감정을.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입니다. 충분한 물량의 약이 확보되면 매우 공격적인 선전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그럴수록 베르딘 황실은 아마 지금보다 더 광폭해지겠죠. 난 결의를 잃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선두에 설 테니 그대들 또한 각자의 임무를 잊지 말길 바랍니다.”
리안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모든 것을 건 싸움까지 3년. 대략적인 계획은 수립됐다.
“여기까집니다. 당장은 록펠라 광장 폭격에 대비해 아낌없이 ‘비둘기’들을 풀지요.”
“네.”
남은 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
* * *
그날 밤, 리안의 개인 집무실.
제이디는 리안이 제안했던 대로 아멜리아에게 ‘화원’에서 채집한 약초 그림을 보여 주었다.
“실물은 금방 시들었지만 똑같이 그렸으니… 알아보겠어?”
“글쎄. 나도 처음 보는 거야.”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 ‘화원’이란 곳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그토록 그곳을 지키고자 했다는 게….
제이디의 표정을 읽은 아멜리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정보는 황제의 ‘화원’이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허가된 자 외엔 누구도 발을 들여선 안 된다는 것. 그 허가된 자들은 황실 수석 연구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고. 정확한 건 고위 황족도 모르는 일이야.”
“그런…. 이해할 수 없어.”
“네가 그랬었지. 황제의 ‘화원’을 지키기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냐고. 대상이 달라. 난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어. 황궁에서와는 달리 감시망이 얇아서. 널 잡으려 했던 건 오직 내 공을 세우고 널 황실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서였어. 그러니 난 ‘화원’의 정보랑은 거리가 멀어. 믿기지 않겠지만 1황자마저도 그곳엔 접근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당장으로선 정보가 부족해.”
제이디는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곧 재빨리 표정을 감추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알아봐 줄 순 없을까?”
“…….”
아멜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몇 차례 눈을 끔뻑거렸다. 이내 의사를 묻는 듯 리안을 바라보자,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이디의 직감이 무언가를 감지한 모양이라. 나 또한 정보를 알았으면 한다, 멜리.”
리안까지 부탁하자 곧 아멜리아는 체념한 듯 작게 한숨 쉬었다.
“언제고 자비에르에게 들킬지 몰라. 나 또한 목숨 걸고 여기 동참했다는 걸 알아줘.”
“그럼….”
아멜리아는 리안의 목표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안 순간, 안도하는 동시에 행복했다. 황후의 세력에 매일같이 견제당하고 암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저와 리안을 위해 버텼던 어머니…. 그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목숨 걸고 리안과 손잡을 수 있었다.
“그래. 힘닿는 데까진 알아볼게. 오라버니와 내가 승자가 될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제이디는 처음으로 아멜리아의 눈빛이 리안의 것과 아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늦은 밤에도 딜레앙 제1저택의 비밀스러운 등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어 나가는 빛을 차단한 암막 커튼 안, 은은한 마력구 조명 속에서는 저마다 밤새도록 2차 반란기 준비로 분주했다.
제이디는 아멜리아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약초 그림을 다른 종이에 모작하기 위해 리안의 집무실을 나섰다. 또, 가족인 두 사람이 회포를 풀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조용히 약초 그림 모작을 마쳤을 때, 누군가 제이디의 방문을 두드렸다.
“중요한 의식을 치르지 않았더라.”
“리젤 경관님.”
아니타 리젤이 토끼처럼 동그란 두 눈을 빛내며 제이디의 팔을 잡더니 어딘가로 이끌었다.
“중요한 의식이요?”
“진정한 혁명군으로 거듭나는 의식이지.”
관련해 아는 바가 없는 제이디는 의아한 얼굴로 리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곧 도착한 방에 들어서자 무시무시한 푸른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밤을 닮은 남색 머리카락과 리안을 능가하는 두툼한 체구. 눈빛만으로 냉기가 돋게 하는 자였다.
“고생이 많았군. 아카데미의 썩은 등불들 때문에.”
베르딘 경무청장, 혁명군 제1간부 아놀드 막시무스였다.
훗날 제이디는 이 사내를 따스한 주광빛 조명 속에서도 혼자서만 시리던 푸른 사내로 기억했다.
“절 도와주신 분인가요?”
“…리안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던 걸까.”
질문에는 대답 없이, 시가에 불을 붙이며 아놀드가 말했다. 제이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리젤이 안내한 탁자로 다가가 앉았다.
“옷을 걷어 봐.”
뜻밖의 제안에 제이디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리젤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오른쪽 팔뚝을 가리켰다.
“‘붉은 기’라고, 들어 봤어?”
“아….”
붉은 기. 혁명군의 편에 선 사람이라는 상징. 그걸… 지금 내 몸에 새기는 건가?
“붉은 기를 새길 땐 증인 두 사람이 필요해. 여기 계신 청장님이랑 내가 증인이 되어 줄게.”
“…….”
제이디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노을 아래 휘날리던 어머니 헬렌의 붉은 머리를 닮은 상징을 몸에 새긴다. 처음 딜레앙과 엮였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날, 제국군의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살아 있기만 했다면. 어머니는 분명 혁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붉은 기 의식을 앞둔 지금, 어머니의 영혼이 바로 제 옆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야.”
“여부가 있을까요?”
제이디는 망설임 없이 코튼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한 팔목을 지나 말끔한 어깨가 드러났다.
혁명군의 선전물에 늘 새겨져 있으니 상징의 모양은 잘 알았으나 어떻게 새기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 아픈 걸까 생각하는데, 리젤이 들고 온 가죽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포션처럼 생긴 투명한 병의 뚜껑을 열고 기울이자 언뜻 걸쭉한 제형의 붉은 액체가 리젤의 손끝을 적셨다.
병에서 나온 그 액체를 마주하는 순간, 제이디는 어쩐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손끝을 적시기만 할 뿐 땅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그것은 마치 처음 마주쳤던 리안의 녹색 눈동자처럼 신비로우면서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죽은 동료들의 영혼 흔적이 담겨 있어.”
“어떻게요?”
리젤은 바로 방법을 묻는 제이디를 보며 짧게 웃었다.
“보통은 오싹해하던데.”
“기이한 기분이 들긴 하네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걸 보는 감각이랄까.”
“너는 신성 마법을 적대한다고 들었는데, 맞니?”
“리안의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그저 우리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야.”
“마법을 적대하진 않아요. 사람을 해치는 마법사를 싫어할 뿐.”
“그렇구나.”
리젤은 붉은 액체를 묻힌 손가락을 제이디의 어깨에 대고 천천히 가로로 그었다. 깃발 모양의 표식이 그려졌다.
“모든 마법사가 황실의 행보에 동의하는 건 아니야. 공생하는 법만 안다면…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될 텐데.”
리젤이 손바닥을 펴 붉은 기가 그려진 제이디의 어깨를 부드럽게 덮었다. 강한 태양빛을 쬐는 듯한 감각이 어깨와 팔을 거쳐 서서히 온몸에 퍼졌다. 마침내 몸이 뜨거워질 때까지.
“이렇게 혁명군의 정신을 나누어 가지는 것도 신성 마법의 영역이거든.”
마법의 힘으로 새겨진 붉은 기의 정신이 피부뿐만 아니라 영혼 깊숙이까지 스며드는 듯해 제이디는 잠깐 꿈결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정신 속에서 제이디는 무언가를 느끼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가장 먼저 느껴지니?”
일그러진 제이디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분노예요. 아니… 증오….”
제이디는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벌벌 떨었다. 그 얼굴 위로 흐른 눈물을 리젤이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지금 네게 닿은 영혼이 죽음의 순간 느낀 감정이야.”
“흐윽….”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순간의 공포에 제이디가 제 어깨를 감쌌다. 몸을 웅크리는 제이디를 리젤이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조금 떨어진 창가에 앉아 있던 아놀드가 태우던 시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넌 누구보다 이성적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구나. 영혼들도 그것을 알아 너에게 향하는 거야.”
“…….”
“이렇게 힘들어하던 이가 또 한 명 있었지.”
리젤이 빙긋 웃으며 아놀드를 바라보았다. 아놀드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제이디의 붉은 기 의식은 깊은 새벽이 되도록 멈추지 않았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붉은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