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54)화 (55/116)

리안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그가 뒤에서 일을 더 확실하게 만든 모양인지, 두 번째 춤곡이 끝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카데미 폭격은 없지만 록펠라 광장 2차 폭격은 조만간 발생할 겁니다. 미리 전단으로 선제공격을 했으니 당장 오늘은 아닐 테지만 안전을 위해 황성을 떠나야 합니다. 그때처럼 후원에서 기다릴 테니 작별 인사를 나누고 오세요.”

펑, 펑, 아름답게 터지는 불꽃놀이 후. 리안은 그런 경고를 하며 제이디에게 짧은 시간을 주었다.

예쁜 마력구로 알록달록 밝혀진 아카데미 홀 정원에 서서 제이디는 친구들, 그리고 교수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휘노 펠리디오스, 제 룸메이트뿐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

“나?”

“응.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휘노는 묘하게 위화감이 풍기는 제이디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이제 정말 졸업이구나 싶어서.”

제이디는 이제 열여덟 성인이 된 휘노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평화를 담은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제이디는 결심한 듯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나, 황성을 떠날 거야.”

“떠나? 어디로?”

“그건 아직. 휘노, 넌… 떠날 수 없는 거지?”

“…응.”

휘노는 펠리디오스 후작의 입김으로 이미 황립 대학 진학이 결정된 터였다. 휘노가 조만간 엉망진창이 될 황성을 떠나도록 할 방법은 없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다, 제이디는 오히려 후작 옆에 있는 것이 휘노에게는 가장 안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더 공고히 황제의 세력이 될 펠리디오스 후작가. 그 후작가의 직계인 휘노. 어쩌면 다시 만난 날에는 적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불현듯 눈물이 핑 돌았다. 제이디는 애써 불길한 가정을 멈췄다.

“정착할 곳이 생기면 편지해.”

“당연하지.”

“편지하겠다고 해 놓고 안 하는 게 제이디 헤이스터 특기 아니야?”

당한 게 있으니. 몇 차례 더 제이디를 들들 볶던 휘노는 울상을 지으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나랑 같이 황립 대학에 다니면 안 돼? 나 봤어. 네 앞으로 온 입학 제안 편지들. 네가 마음만 먹으면 황립 대학에도 올 수 있을 거야.”

휘노는 잔뜩 서운한 얼굴로 제이디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 말 안에는 역시 ‘위험한 실험은 이제 그만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이디는 설핏 웃을 뿐, 대답을 하진 않았다.

몇 차례 더 설득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휘노. 난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 그리고… 어떻게든 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네가 져 줘.”

실은 내가 시간을 돌아왔노라. 2년 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끔찍한 병마로부터 나는 너와 우리, 이 제국을 지켜야 하노라.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진실 밖으로는 어중간한 변명만 나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휘노는 역시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응. 네 뜻이 그렇다면 그만 말려야지.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어.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말하고.”

멀찍이 선 후작가의 마차에서 휘노의 수행인 피오레가 다가왔다.

“아가씨.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응. 제이디, 늘 몸조심하고. 편지하지 않으면 또 가신들 들들 볶아서 어떻게든 알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휘노.”

작별을 앞두고 제이디가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너의 삶을 살길 바랄게.”

뜻밖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휘노가 곧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응. 다음에 봐.”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해했던 한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우리의 ‘다음’은 내가 만들면 돼. 제이디가 기쁘게 친우를 보냈다.

예쁘게 치장하고, 높은 구두를 신고, 파인 드레스를 입어도 아직은 여전히 앳된 친우가 멀어져 갔다. 홀을 벗어나는 후작가의 호화스러운 마차를 끝까지 눈으로 배웅하던 제이디의 시선이 떨어졌다.

“…반드시 지킬게.”

쌀쌀해진 공기처럼, 차가운 혼잣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다시 만난 날에도 나의 친우이기를. 부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  *  *

“가시죠.”

약속 시간이 되자 맥 칼리스토 경이 칼같이 찾아와 후원으로 안내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 붙이기 어려운 면모는 여전한 사람이었다. 맥 씨는 리안과 어떤 사이일까?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딜레앙가 마차에 타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

“헐리 씨?!”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이, 제이디는 쏜살같이 손을 움직여 마차 창문의 커튼을 치고 바깥을 살폈다. 이 사람, 제정신이야? ‘마녀’로 신분 숨겨 살고 있는 사람이 귀족 파티 한가운데 맨몸으로….

“황궁이 아니잖아.”

“그래도요! 마녀재판도 받았던 사람이 겁도 없이….”

헐리는 ‘마녀재판’이란 단어에 인상을 쓰며 의아해했다.

“말한 적이 있던가.”

당사자에게 들은 적은 없지. 뮤리얼과 생활할 때 알게 된 이야기이니.

“딱 봐도 그렇게 생겼잖아요.”

“이봐, 내 관상이 어디가 어때서?”

“아무튼요. 조심 좀 하세요.”

“그리운 얼굴이 많더군. 너, 아카데미에 로건 말고도 다른 마녀들이 있는 거 알아?”

“그건… 처음 듣는 얘기네요.”

놀라 빙그레 뜨인 제이디의 눈을 보며 헐리 무니가 피식 웃더니 시선을 돌렸다. 나, 참. 사람 호기심 생기게.

“그나저나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여긴 어쩐 일이세요? 백작님께서 데려오셨나요?”

“한 번에 한 가지 질문만 했으면 좋겠구나.”

헐리와도 안 본 지가 꽤 된 건 매한가지니. 제이디는 밀려오는 그리움에 저도 모르게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 리안을 도와 역병 조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것도 생각나니 더욱 아련해졌다. 영문 모르게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은 헐리가 질색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리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제이디의 옆자리에 앉은 리안은 그제야 모자를 벗고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갑자기 드러난 그의 윤기 나는 진갈색 머리카락과 수려한 얼굴에 시선이 팔리지 않도록 제이디는 일부러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몸을 다쳤을 때도, 그리고 처형장에서도 특유의 분위기는 죽지 않았었지만… 때 빼고 광낸 지금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맞아. 리안은 말도 안 되게 멋있는 사람이었지. 저 사람은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만큼.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세 사람이 모이자 제이디는 묻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저, 헐리 씨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실까요?”

“제이디가 날 ‘리안’이라 불러도 될 만큼은 압니다.”

헐리의 미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제이디를 쳐다보더니 못마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풋내기 마녀한테 너무 많은 정보를 줬군요. 경솔하지 않습니까. 답지 않아요.”

그 말을 통해 제이디는 헐리가 리안의 아주 가까운 측근이지만 모든 비밀까지 알지는 못한다는 걸 알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은 측근에게도 비밀인 모양이었다.

“죽을 뻔한 것도 잊으셨어요?”

헐리의 말에 리안은 예전 일이 기억났는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때 제이디한테 억지로 수술받은 날 살려 준 게 헐리거든요.”

“아아. 그게 헐리 씨였구나. 어쩐지.”

“이봐. 해독초는 독초와 갈래가 같아. 열 실험을 끝내지 않고 사람 몸에 처방하면 안 돼. 여러 가설을 세우고 오랜 기간 연구하지 않으면 자칫,”

“…자칫?”

“‘아아’? 살인할 뻔한 사람치고 굉장히 태연하다, 너.”

“그때 리안을 살려 줘서 정말 고마워요, 스승님.”

“관상 드럽달 땐 언제고 불리할 때만 스승이냐?”

“드럽다곤 안 했어요. 무슨 그런 심한 말을.”

“관상이라. 음침하긴 하지.”

이상하게 겉도는 대화 속에서 유일하게 유쾌하지 못한 사람은 헐리뿐이었다.

“이 ‘풋내기 마녀’가 가진 능력을 알면 너도 놀랄 거야.”

“암요.”

“장난은 그만해요. 제게 이 상황, 제대로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탈로스 저택으로 간다고요?”

“그래. 네가 우릴 좀 도와줘야겠다.”

“그러고 보니 약을 미리 제조할 거라면 헐리 씨가 있어야 수월하겠어요.”

“…….”

헐리는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에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뜬금없이 끼게 된 풋내기 마녀가 나랑 리안을 어쩌다 우연히 조금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리안과 풋내기 마녀를 도와준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설명은 도착해서 천천히 하도록 하고. 다들 피곤할 테니 눈 좀 붙여요. 자정이 훨씬 넘었습니다.”

“휴. 구두 때문에 발이 너무 아팠어요.”

“…….”

“아! 탈로스 저택이면 헤르만 경을 뵐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요. 헤르만도 참 도움이 되는 조력자입니다.”

“그렇구나.”

“…….”

헤르만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며.

“늦었지만 졸업 축하해요.”

“리안 덕분에 이번엔 평화로운 작별을 했어요. 고마워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수록 헐리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혔다.

마침내 제이디가 먼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리안이 다정하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곤히 잠든 후에도, 헐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오랜 시간 달려 도착한 북부 탈로스 딜레앙 제1저택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기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헤르만 경도 그랬다.

세 사람은 각자 목욕과 휴식, 식사를 마치고 비밀 집무실에 모였다. 리안이 두 팔로 탁상을 짚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헐리 무니. 넌 혁명군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지.”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병마입니다. 제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남부 제국민들이 끊임없이 북향하고 있어요. 북부로 가십시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의 불꽃에게, H.】

“음…. 그렇다고 해야 할까요.”

지난 미래,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까맣게 모를 헐리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진지한 분위기에 적당히 수긍했다.

“대장께서 한쪽 다리가 잘린 채 숨어 있던 절 포섭해 준 날 이후로… 한 번도 그 은혜를 잊은 적 없으니까요.”

“그래. 머리도 좋고 말이야.”

“갑자기요?”

“그러니까 이 문서, 이틀 안에 외울 수 있겠지?”

“…이게 뭡니까?”

그가 탁상에 풀어놓은 문서를 헐리와 함께 확인한 제이디의 눈동자가 커졌다. 리안은 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 빛바랜 문서 옆에 함께 올려놓았다.

“리안…!”

“시계의 규칙은 비밀이 아니요, 다만 규율일 뿐이니. 회중시계의 주인이 된 자는 신이 허락한 규율 아래 자유롭습니다.”

“…….”

“내가 여태 타인에게 비밀을 알리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금기였기 때문은 아니에요.”

“이건….”

“어때, 헐리 무니. 외울 수 있겠어?”

그가 탁상 위에 넓게 펼쳐 푼 두루마리 안에는, 현재까지 되돌린 역사에 대한 정보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잠시 문서를 훑어본 헐리 무니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뭔지 더욱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물론이죠.”

외우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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