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리얼’이라 불린 소녀를 태우고 말고삐를 튼 저 여인은 분명 어머니를 낳은 친모일 것이다. 길게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카락과 건강미 있는 탄탄한 육체. 어머니가 항상 묘사했던 모습과 같았다.
그런 기억이 없었더래도 리안은 마리안을 알아봤을 것이라 직감했다. 육체가 없음에도 회중시계를 중심으로 맥동하는 감각이 느껴졌으므로.
리안이 투덕거리는 두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동행한 행렬에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린 마리안이 말을 몰다 말고 돌연 멈춰 섰다.
“왜 그래, 아가씨?”
궁금함에 돌아보는 뮤리얼의 시선을 피한 마리안이 고개를 돌려 리안이 서 있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
한참 그쪽을 응시하던 마리안이 곧 다시 말을 움직였다.
이크람의 호위대로 보이는 행렬이 멀어지며 두 여인의 실랑이도 희미해졌다.
리안은 한참이고 마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역사를 알아내야 한다.’
어떻게 제국 최변방의 소수 민족에서 황비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 회중시계의 기원, 그리고 ‘리안 베르딘’의 진짜 뿌리가 어디인지까지.
다시 정신을 잃고 사념체가 되지 않기 위해, 리안은 시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처음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과정에서 제이디의 영혼은 현상을 부정했다. 워낙 실재만을 믿는 성향 탓이었다. 시간을 돌리는 것은 신의 영역이므로, 신앙이 없는 자에게는 고통이 곱절이었다.
결국 그녀의 영혼은 길을 잃고 잠시 시공간의 틈새를 맴돌게 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제이디의 무의식은 생존 본능을 발휘했다.
“일어나!”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이나 이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겠다. 육체도 오감도 없는 상태에서 이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제이디는 없는 목청을 쥐어짜서라도 외쳤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나한테 뭘 한 거야!”
원망의 화살이 향하는 대상은 당연하게도 리안 베르딘이었다.
“잠시 후에 보자더니 그 잠시 후가 언제냔 말이야! 아아악!”
단말마의 비명 끝에 제이디의 영혼은 최단 시간에 ‘사념체’가 되었다.
리안은 제이디의 영혼이 사념체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물론 고려했으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어도 함께 돌아가는 자신이 인도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안은 제이디와 다른 시간 선으로 떨어져 버렸고, 지금 제이디를 인도할 영혼은 없었다.
죽음. 마지막 직감은 그것이었다.
그때였다. 흩어지며 흐려지는 제이디의 영혼을 무엇인가 붙든 것은. 시공간의 틈새, 누군가가 제이디의 영혼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점점 영혼의 형태가 되살아났다. 형체를 되찾고 눈을 감은 채 늘어진 제이디의 영혼을 한 여인이 감싸 안았다.
“…….”
반짝이는 빛이 제이디의 영혼을 둘러싸며 빛났다.
“아가, 일어나렴. 잠에서 깰 시간이란다. 일어나.”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과 동시에, 제이디의 영혼이 시공간의 틈을 벗어나 어딘가로 빨려가기 시작했다. 그 찰나, 제이디의 영혼은 빠르게 소멸하듯 멀어지는 우주 안에서 어렴풋하게 떠 있는 그 여인을 인지했다. 하지만 다시 기억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육체로 돌아온 제이디는 드디어 눈을 떴다.
바삭한 마른 풀잎이 뺨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느껴지고. 차가운 밤의 산 공기가 코끝을 얼렸다.
‘여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 제이디는 다소 멍한 상태였다. 회귀가 처음인지라, 현실 감각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방금까지 굉장한 경험을 한 것도 같은데 자세히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
탕─
연잇던 열두 번의 총성과,
‘리안─!’
총에 맞은 리안을 끌어안고 울었던 일.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그의 뜨거운 피. 그다음엔…
머리가 아팠다.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와 몸이 맞닿자 온몸이 맥동하며 영혼이 흘러나왔고, 그 후 시간을 되감듯이 돌아왔다는 것밖에는….
거기까지 기억해 낸 제이디는 문득 화들짝 놀라며 왼 손목부터 확인했다. 시계는 그대로 손목에 있었다. 다행스러운 마음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잠깐만. 왜 교복 차림이야?’
와인색 재킷을 확인한 제이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스름 푸른빛이 내려앉기 직전의 숲. 바위가 뭉쳐 있는 절벽 아래, 신발 한 짝이 날아간 채로 자신이 주저앉아 있었다.
제이디는 단박에 이곳이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펠라스 산지야. 졸업 시험, 절벽에서 떨어진 날이잖아.’
혼란한 마음에 온몸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내가 어떻게 지금 여기 있을까. 꿈일까?
‘과거로 돌아왔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술이나 마법 같은 건 없었다. 그건 신성 마법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안 베르딘이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제이디는 생각에 빠졌다.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어떻게든 분석해 보기 위해 애썼다.
‘리안 베르딘.’
그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동안 묘하게 여유로운 그를 보며 의아해했던 기억도 났다.
처음부터 자신을 끌고 과거로 돌아올 작정이었을까? 그가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들 믿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 언질도 없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냔 말이야.
“제이디… 만약에 말입니다. 이 모든 시간을 지워 버리고 다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가장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뜬금없던 그 대화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자신은 그 질문에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대답하지 않았었다.
‘다시 돌아갈 기회.’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 상황은 ‘기회’였다. 확실히 그 또한 이 시점으로 돌아왔다면 2차 반란기에서 겪었던 피해와 역병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역병이었다. 혁명군 수장의 입장에서, 그것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자신을 휘말리게 한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난?
모든 연구 자료와 3년간 죽도록 고생해서 만들어 둔 내 ‘베르딘 약초 사전’은?
다… 다 없어진 거야?
하. 허탈한 마음에 실소가 나왔다.
‘빌어먹을 2황자…. 잡히면 뺨 한 대로는 어림도 없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심호흡한 제이디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 상황에서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아.
“당신이 가장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도 맞지만,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면 내가 했던 실수를 만회하고 잃었던 사람들을 지킬 기회였다.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혼란하고, 몸이 떨렸다. 하지만 제이디는 불가해한 현상에 휘둘리는 대신 우선 주어진 상황을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선 분명, 졸업 시험에서 최면술에 걸린 학생들이 절벽 위에서 마법을 써서 자신을 떨어뜨렸었다. 덕분에 졸업 시험은 완전히 망해 버렸고, 증거물이 없어서 학장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했었지.
‘마력구를 찾아야 해.’
4년이나 되는 시간을 돌아왔지만 이후 벌어질 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억울함이었기 때문에.
졸업 시험을 망치고 난 뒤 제이디는 우울한 시간을 보내며 수차례 상상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똑같이 무력하게 당하진 않을 거라고….
저 멀리 떨어진 신발을 다시 주워 신고, 쥐고 있다 놓친 깃발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마력구를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때,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력구였다. 사건 장소에서 산산이 부서져 증거물이 되지 못했던 기록용 마력구가 고스란히 목에 걸려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분명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깨졌었는데. 그렇다는 건 이렇게 멀쩡하게 목에 걸려 있던 마력구를 누가 일부러 훼손했었다는 뜻인가?
소지품을 다 챙긴 제이디는 즉시 몸을 숨길 만한 수풀을 찾았다. 기억하기로 자신은 아침이 되기 직전 구조됐었다. 그 전까지 마력구를 훼손하러 내려오는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한 뒤, 절벽을 다시 올라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뭔가 빠뜨린 게 있는 것 같아.’
찝찝한 느낌에 수풀 속에 몸을 파묻은 제이디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초조함에 이마를 짚고 생각하던 제이디는 자신이 뭘 놓치고 있는지 떠올렸다.
‘클라리사 뉴트.’
멍청한 말더듬이 시늉을 하며 존재감을 숨기고, 졸업반까지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 4황녀. 그녀가 가까이 있다. 제이디는 손에 쥔 깃발을 더 꼬옥 쥐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날과 같은 상황에 놓이자 떠오른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처음 본 약초가 있었다. 이 절벽 아래, 청보랏빛의 꽃이 자글자글 달리고 꼬불꼬불하고 가느다란 이파리가 풍성하게 난, 난생처음 보는 약초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때 그 약초를 채취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은 다시 기력을 잃고 기절했었다.
참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다시 그 약초를 떠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졸업 무도회 전까지도, 잊어서는 안 될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결국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었다.
또한 온 지방을 떠돌며 약초란 약초는 다 찾아 연구하던 그 시기에도 떠올리지 못했었고. 그래서 뮤리얼에게 혹시 그런 이상하게 생긴 약초를 아느냐고 묻지도 못했었다.
몸을 숨긴 수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날 봤던 그 약초가 그대로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제이디는 천천히 움직여 알 수 없는 기묘함을 품은 그것을 따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 금방 시들겠지만 그림으로 그려 둘 시간은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수풀로 돌아오려는 때였다.
바삭…. 아주 고요한 새벽의 마른 숲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선득해진 제이디는 경계하며 절벽 위를 쳐다봤다가, 아무도 없자 사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 수상했어. 너, 이곳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알았지?”
단박에 목소리를 알아들은 제이디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저 멀리, 소리도 없이 절벽을 내려온 작은 체구의 학생 한 명. 클라리사 뉴트였다.
“이단이 확실해. 뒷배를 불어. 딜레앙이 엮여 있나?”
그녀의 뒤에는 검은 형태의 몇몇 호위마저 보였다.
“…그러는 나도 묻고 싶네. 뭐 때문에 말더듬이 행세를 하고 아카데미에 계신지 말이에요, 4황녀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