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49)화 (50/116)

Ⅲ. 대지의 항해사

비명을 마지막으로 제이디가 멀어져 갔다. 리안은 익숙한 되감기에 몸을 맡기며 최적의 시간대로 계산된 지점에서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여긴….’

생각했던 시간대가 아니었다.

리안이 되감은 시간은 5년. 그러나 그가 도착한 시간대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제국력 773년이었다.

리안 베르딘은 눈앞에 펼쳐진 60년 전 황성 모습에 넋을 잃었다.

광장 벤치에 놓인 신문의 날짜는 분명 773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착오였다. 여태 계산이 틀렸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기에 리안은 더욱 의아했다.

773년이라니. 773년은 저나 제이디는커녕 어머니와 자비에르가 태어나기도 전인 해였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외는 시간대뿐만이 아니었다. 제 모습이 유리창이나 물에 비치지 않았다. 리안은 자신이 현재 형체 없는 영혼 상태로 떠도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참 숙고해 보아도 이 회귀의 형태에 대해 알아낼 수 없었다.

60년 전 제국으로 불려온 리안 베르딘의 영혼은 다시 833년으로 돌아가지도, 그렇다고 소멸되지도 못한 채 과거를 떠돌았다. 하루, 보름, 한 달이 흘러도 변화는 없었고, 그때쯤 되니 집중하지 않으면 날짜를 세고 시간을 가늠하는 감각마저 희미해질 것 같았다.

이러다 꼼짝없이 과거에 갇히는 건 아닐지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함께 시간을 돌아온 제이디 헤이스터의 행방이 걱정이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반드시 이 우주에서 자신과 재회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육체를 되찾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태어난 해인 806년까지도 너무 멀었다.

‘계산이 틀린 이유를 알아내야 해.’

먹지도 자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부유하며 리안은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가 실마리를 잡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제이디 헤이스터를 회귀에 끌어들이기 위해 리안이 고안한 방법은 회중시계의 부품을 활용하는 것. 그는 그 오차의 단서를 찾자마자 기계식 시계를 본따 만든 그 마법 기구를 다시 분해해 보았다.

제이디 헤이스터에게 시침 톱니바퀴를 줬기에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부품 자체를 대신한다는 듯 희미한 빛이 잔상처럼 남아 빈자리를 밝히고 있었다.

‘…그랬던 거야.’

째깍째깍, 섬세하고 규칙적인 소리를 들으며 리안은 답을 얻었다.

1년의 기준은 시침 한 바퀴. 그가 되돌린 시간은 5년. 시침이 다섯 번 돌려면 분침이 60번을 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은 60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리안 베르딘은 시계의 법률을 어긴 대가로 제이디 헤이스터의 5년을 돌릴 분침이 되고 말았다. 가설이 맞는다면 시간대가 맞춰지기 전까지는 제이디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60년이라니. 까마득했다. 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돌다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너무도 아득한 나머지 리안은 오랜만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토록 시간을 당겨 볼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자비에르의 황정을 끝내려면 자비에르 본인을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때 소진된 리안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아도 되니 아예 먼 과거로 가서 끝장을 낼 셈이었다. 하지만 시계는 애초에 모순이 일어날 시간대로는 자신을 보내지 않았다.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즉 리안은 생년인 제국력 806년 이전으로는 돌아와 본 적 없었다. 누구에게도 시침 톱니바퀴를 준 적이 없었으므로.

이 공정한 회중시계는 규율을 어긴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줄 것이었다. 그 벌은 단순히 머나먼 과거에 그를 불러들인 것으로 끝이 아닐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회귀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는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더욱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어머니의 과거를 볼 기회다.’

828년까지 주어진 시간은 길었다. 그때까지 리안은 수수께끼였던 어머니의 과거를 비롯해 베르딘 황실에 대한 실마리를 최대한 찾아봐야겠다고 계획했다.

‘이단이 태생한 곳으로 가자.’

영혼이 된 그가 향한 곳은 동부 코라냐크 지방이었다.

어머니의 고향. 먼 역사, ‘대지신’을 숭상한다는 이유로 황실의 첫 희생양이 된 곳.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는 회중시계의 유력한 근원지인 그곳으로.

*  *  *

리안은 그저 움직였다. 막연히 동향했다.

이윽고 동부 지역에 맞닿은 어느 순간부터, 회중시계에서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나침반처럼 어느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하염없이 흘러 그 방향을 따라가자 사막 지대가 나왔다.

코라냐크의 황금빛 사막은 광활했다. 동부는 북부보다도 넓고, 개척되지 않은 곳이 많았으며, 황실의 폭격이 있은 후 황폐하게 메마른 지역이었다. 지식이 풍부한 리안에게도 어느 정도 낯선 곳이었다.

시간 감각도, 방향 감각도 없이 그저 회중시계의 빛만 따라 떠돌던 리안 베르딘은 점차 지쳐 갔다. 영혼을 의지대로 이끄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운명이니 목적이니, 그런 것은커녕 자아마저 희미해졌다. 육체가 없어 지친다는 감각도 없었다.

지도를 쥘 수도, 글을 써 기록을 할 수도, 누군가를 붙잡고 말을 걸 수도 없는 상황에서 리안은 그저 부유하고 부유했다.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감각이 점차 흐려져 이론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야 한다.’

‘무언가를 기억해야 한다.’

리안은 자신의 ‘존재함’과 사명을 잊지 않기 위해 무의미하게 되뇌며 움직였다.

사막을 건너는 상인 무리와, 정체 모를 어떤 식물들과, 밤이 되면 무수히 떠오르는 반짝이는 별. 그리고 다시 낮이 되면 누군가 찍어 놓은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모래바람이 불면 그런 일말의 흔적조차 모두 사라졌다.

이윽고 리안 베르딘이 ‘영혼’이 아닌 ‘사념체’로서만 기능할 위험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낮에는 어머니의 과거와 828년이라는 숫자만을 되뇌고. 밤에는 하늘에 뜬 별을 세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되새기며, 그렇게 움직일 때.

모래바람을 건너 사막의 가파른 절벽에 다다르자 거대하고 긴 협곡 지대가 나타났다. 까마득히 치솟은 협곡 사이 얕게 난 푸른 강물을 따라 리안은 다시 움직였다.

그때, 회중시계가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절벽을 맞닥뜨린 리안은 이것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지 올라가야 하는지 의아했다.

문득 태양 빛이 내리쬐는 방향으로 시야를 올렸다. 광활한 절벽 어딘가 매달린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시야에 맺혔다.

‘…….’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빛을 받아 백발로 보이는 회색 곱슬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인이, 맨몸으로 절벽 어드메 매달려 있었다.

리안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희미해지려던 영체를 붙잡고 바닥을 디딘 리안은 햇빛에 어른거리는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손차양을 한다고 해서 햇빛을 가릴 수 있을 리 없지만 불현듯 육체가 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레 손이 올라갔다.

높다란 절벽에 매달려 한창 무언가에 열중하던 여인이 삐끗, 발을 헛디뎠다.

‘아.’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여인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추락했다.

‘……!’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여인을 받칠 수 있는 물리적인 것은 없었다. 리안은 벙찐 표정으로 제 얼굴 바로 위로 떨어지는 여인을 응시했다.

탁!

후웅….

떨어지는 여인을 지탱한 밧줄이 반동에 조금 튀어 오른 뒤 후웅, 후웅, 흔들렸다. 리안과 겹쳐진 여인이 몸에 연결된 밧줄을 풀고 바닥을 디뎠다.

“젠자앙!”

거친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휙 든 여인과 겹쳐져 있던 리안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전통적인 문양이 새겨진 붉은 두건이 시야에 잡혔다.

이마에 두건을 두른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성질을 냈다.

“빌어먹을 할망구 노망나기 전에 빨리 따야 되는데!”

숨을 고르면서도 씩씩거리며 신경질을 멈추지 않던 여인이 털썩 주저앉더니, 허리에 매달고 있던 가죽 가방을 끌렀다.

가방에서 나오는 내용물을 확인한 리안은 다시금 느껴지는 기시감에 눈, 같은 것을 끔뻑거렸다. 어느새 스러져 가던 리안의 영혼이 점점 형체를 되찾고 있었다.

“이걸론 부족하다고 또 잔소리나 퍼부을 거란 말이지. 고약한 할망구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털퍼덕 주저앉은 여인의 곁, 흙이 묻은 채 서로 엉겨 푸릇한 존재감을 풍기는 식물 몇 종류.

‘약초….’

약초였다.

그제야 리안은 망각하고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제이디.’

봇물처럼 기억이 밀려들었다. 리안의 영혼이 완전히 형체를 되찾았다.

여인은 뭉친 약초 더미를 솎아 내더니 다시 밧줄을 허리에 매달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운 해가 절벽 뒤로 넘어가자 바위틈에 자라난 어떤 약초가 보였다. 아마도 이 여인이 목표하는 것이 저 약초인가 보다.

‘제이디 헤이스터를… 만나야 한다.’

828년 록펠라 광장에서 처음 만난 제이디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를 보며, 리안은 온전히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절벽을 타고 올라간 여인은 다행히 이번엔 성공적으로 약초를 채취한 모양이었다.

‘저 아이를 따라가야 해.’

그렇게 생각하던 리안은 여인이 향하는 방향이 제가 선 아래가 아니라 절벽 위임을 알았다. 조급해진 그는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절벽에 달라붙어 부유했다. 다행히 느리지만 절벽을 타고 여인을 따라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리안은 눈앞에 보이는 또 다른 여인의 모습에 자신이 비로소 바른 길을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있었어?”

“너는 하루 종일 개고생한 친구한테 할 말이 그거뿐이냐?”

“미안. 그래서 이렇게 데리러 왔잖아.”

“후…. 있었어. 할망구 치료할 약초.”

“다행이다!”

리안은 사무치게 밀려오는 어떤 감각에, 힘이 풀릴 육체가 없음에도 바닥을 디디고 있기가 힘들다고 느꼈다.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 없었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리안은 직감했다.

‘마리안….’

“어서 가자. 곧 해가 질 거야.”

“예, 예. 부디 제대로 몰아 주시죠. 네가 모는 말에만 타면 멀미가 난단 말이지.”

“조금만 더 상냥하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 마리안 님. 아가씨가 모는 말에 타는 것은 언제나 영광입죠.”

“됐어!”

“삐졌냐?”

“미워, 뮤리얼.”

“에휴. 누가 이 아가씨를 이크람을 이끌 황금 매라고 믿을까.”

“어르신께 이를 거니까.”

“흥. 할망구는 하나도 안 무섭다고.”

“얼른 잡아. 낙마해도 책임 못 져.”

마리안. 나의 조모. 아마도 회중시계의 또 다른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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