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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48)화 (49/116)

부우─

반역자의 처형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잘그락… 잘그락… 처형장 입구에서 양손이 등 뒤로 결박된 리안이 포위된 채 끌려왔다.

털썩.

내팽개치듯 무릎 꿇린 리안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한때 모두의 호감을 사던 귀티 나는 아름다운 용안은 피딱지와 흙먼지로 엉망이었으며, 하얀 튜닉은 해지고 찢어져 의복의 기능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머리는 영양이 공급되지 못하여 푸석하고 잔뜩 흐트러진 채 눈을 가렸다.

터벅터벅, 깔끔한 정복을 차려입은 사형 집행인이 등장하자, 탕─ 공중에 총소리가 울렸다. 반역자의 처형을 알리는 열두 번의 총성이 울리면, 그 즉시 사형이 집행된다.

리안이 선고받은 건 총형이었다. 그것은 황족을 향한 최소한의 예우라기보다는 제이디 헤이스터가 역병 연구에 성공한 덕분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황실은 역병 치료제에 대한 그 어떤 정보든 일언반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할 속셈이었으나 4황녀가 혁명군을 끌어들여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명목상으로라도 리안의 처형 강도를 낮춰야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적통이 아닌 리안은 참형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안은 총성이 시작되자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핏기 없고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유일하게 생기를 잃지 않은 데가 있었다.

눈. 마주치는 사람이면 누구든 홀리듯 빠져드는 진녹색 눈동자, 그 깊은 숲을 닮은 총명한 눈빛 하나만큼은 마치 그의 영혼을 대변하듯 끝끝내 꺼지지 않았다.

탕─

허공에 높이 솟아올라 번지는 총소리에 처형장을 몇 겹으로 둘러싼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진작 잡혔어야 한다며 침을 퉤 내뱉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몇몇 아이는 저마다 보호자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고, 몇몇 노파는 희망을 잃은 눈동자로 멀거니 땅바닥만을 응시했다.

“리안─!”

한 여인이 두꺼운 인파를 뚫고 처형장 한편에 나타났다. 제이디였다. 그녀는 리안을 향해 달려가다 처형장 경계를 지키던 치안대 병사들의 손에 붙잡혔다.

“이거 놔! 왜 약속을 안 지켜! 왜!”

소란이 일자 처형장 단상 가운데 앉은 1황자 렉시드 베르딘이 손을 들어 올리며 중재했다.

그는 따분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턱을 괸 채 처형장에 꿇린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정돈되지 않은 흑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흩날렸다. 그 중단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는 생기라곤 없었다.

렉시드의 중재에 치안대 병사들이 처형장에 뛰어든 제이디를 놓았다. 제이디가 리안 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더 가까워지기 전에 친위대장 자카르의 머스킷에 다시금 막히고 말았지만.

제이디는 기다란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렉시드를 올려다보았다.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분명 제가 실험에 성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자비 아닙니까!”

어째서 그 약속을 한 황제는 이 자리에 오지도 않은 건데!

제이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단상 위를 노려보았다.

“약속대로 풀어 주시란 말입니다!”

존안 앞에서 악을 쓰며 항의했지만 렉시드는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손짓 한 번으로 소란을 잠재웠다. 어느 면에서는 리안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차갑고 비열한 얼굴이 제이디는 여전히 무서웠다.

‘제정신이 아니야, 오늘도….’

거기에 더해 눈이 풀린 채 세상 만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1황자의 아딜론 중독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였다. 그는 약 기운 없이는 한시도 버티지 못할 만큼 아딜론에 중독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은 당신의 형제라고!’

탕─

어느새 아홉 번째 총성이 울렸다. 제이디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마른 흙바닥을 적셨다. 리안이 눈썹을 내려뜨리며 그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간의 정도 있고….”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죽음을 앞둔 와중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 모습에서 제이디는 아이러니하게도 모종의 숭고함마저 느꼈다.

“작별의 포옹이라도 하고 싶은데. 손을 쓸 수가 없군.”

그가 등 뒤로 결박된 손목을 움찔거렸다.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무게 추처럼 내려앉으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절망이 밀려왔다.

“이리 와서 한 번만 안아 주겠습니까.”

정말 죽는 걸까. 정말, 리안이 죽는 걸까.

“그저 사람의 온기만이 그리운 날….”

리안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날이라서.”

탕─

열 번째 총성이 울렸다. 절망에 빠진 제이디는 거대한 총성 앞에서 그 어떤 힘도 행사하지 못했다.

“제발 비켜 주세요…! 마지막이잖아요, 경, 제발요! 이렇게 빌게요, 네? 제발…!”

제이디는 총대로 제 앞을 가로막은 자카르의 다리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마음이 급했다.

탕─

열한 번째 총성이 울리자, 급기야 제이디는 발작하듯 더 절박하게 빌었다.

“자카르 경! 제발!”

“제정신이 아니군. 여기가 어디라고….”

자카르의 임시 부관 다리우스가 인상을 쓰며 제이디를 막아섰다. 다리를 붙들린 채 차갑게 내려다보던 자카르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리쉬었다.

미동하지 않던 총이 거두어졌다.

“중령님!”

“두어라.”

다리우스가 당황했지만 자카르는 그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숙연해졌다.

어쩌면 그 또한 찰나 정도는 2황자의 정의를 옹호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왜 너를 친위대장으로 선출했는지 아느냐? 알고 싶어서야. 아버지 본인의 대의를 알지 못하는 미련한 중생들의 심리. 네놈을 총애해 보며, 나름대로 노력 중이라는 말이야.”

이제는 충성을 맹세한 제국이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겠다. 황실의 개로 사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데, 제국민이라고 알까.

황자라는 지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이 처형장, 초라하다 못해 모욕적인 이 작고 더러운 공간을 둘러싼 인파만 봐도… 이것이 민심이요, 제국을 향한 반기가 아니겠는가.

리안 베르딘이 죽어도, 이 항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터였다.

“리안….”

으… 흐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울어 대며 제이디는 기듯이 리안에게 다가갔다. 리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환시인가.”

제이디의 떨리는 손끝이 리안의 뺨에 닿았다. 곧 그 까칠한 얼굴을 감싸 쥔 제이디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울기만 했다.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날 듯했다.

“당신이 날 위해 이토록 울어 줄 리가.”

분홍 토파즈를 그대로 심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의 녹색 눈을 마주했다.

“어지간히 고약하게 굴었어야지.”

“리안… 리안, 내가 미안해요. 그동안 아프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요….”

눈물을 쏟으며 저를 향하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리안은 사뭇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에 진심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보살피고 구원한 이 관계에도 역시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심이었다.

“리안. 적절한 영혼을 선택해야 한다. 시대의 전복에 일조할 유용한 도구가 될 영혼을.”

“제이디.”

탕─

마지막 총성이 처형장을 메웠다.

“……!”

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제이디의 귀에 이명이 일었다. 곧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리안의 유언 같은 한마디만이 귓가에 새겨졌다.

“고맙습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죽음이군요.”

이제는 미래를 구원할 나의 영혼이 되세요.

철컥, 옆에 서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탕─

방아쇠가 당겨지고, 리안의 몸이 휘청였다. 발포된 총이 관자놀이를 꿰뚫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시곗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즉사의 순간, 제이디는 눈도 감지 못한 리안이 흙바닥에 처참히 엎어지기 전에 먼저 손을 뻗었다. 그가 제 품에 안겨 눈감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소 지은 채 허물어지는 그의 얼굴이 천천히 눈앞을 스쳤다.

마침내 제이디가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야위었음에도 한 품에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큼직한 골격을 가진 남자가 여인의 품에 축 늘어졌다. 선홍색 피가 흘러내려 제이디의 목덜미를 적셨다.

그때였다. 리안의 가슴이 몸에 포개지자, 두근, 전신이 일렁일 정도로 강렬한 맥동이 전해졌다.

무언가가 두 사람의 심장 사이에서 진동하듯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리안이 가슴에 품고 있던 회중시계였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마음속에 스며들듯 울렸다.

“잠시 후에 만나요.”

제이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안?”

“아직 당신한테 볼일이 남았거든.”

“지금 뭐라고….”

그때 눈을 멀게 할 듯 하얀빛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그러게 날 살리지 말았어야지요.”

제이디는 번개를 맞은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찟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현실감이 증발했다. 마치 중력 없는 허공에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공포심이 밀려왔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가.

“…리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내가 가는 길에 당신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나… 난 싫어. 전 이런 거 싫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며 제이디가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끝내주는 연기였지. 이번 생엔 신파극을 써 볼까.”

“……!”

시야가 새하얀 와중에도 제이디는 리안의 목소리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제이디의 품에 안겨 있던 그가 서서히 멀어졌다.

어디선가 태엽이 감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고,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제이디는 충격받은 와중에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속았다. 단단히 속은 거다. 빌어먹을 리안 베르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 죽는 이 순간까지도.

“아.”

몸이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그가 달콤하게 속닥거렸다.

“조금 멀미가 날 수 있어요.”

“아아아악!”

…이건 확실히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제국민을 구원할 ‘마녀’가 되기를 꿈꾸던 제이디 헤이스터. 반역자 리안 베르딘의 스물두 번째 우주에 동행하다.】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2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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