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의 호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황족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의 재판은 잠정적으로 미뤄졌다. 제이디는 황제에게 생체 실험 보고서를 올린 뒤 정식으로 그를 알현했다.
“몇 번의 생체 실험을 더 거쳐, 약물의 부작용 몇 가지를 검증해야 합니다. 저를 중앙 장벽으로 보내 주십시오.”
확실한 효험을 보이는 약물을 혼합해 농축했으니, 안전성을 검증한 뒤 대량 생산만 가능하다면 당장에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남부 제국민을 구원할 수 있었다.
보고서를 확인한 황제는 잠시 말이 없더니 마법부 대신에게 그 물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약이 올라가고, 제이디는 부디 하루빨리 결정을 내려 달라며 황제를 재촉했다.
하지만 황제가 보인 반응은 뜻밖이었다.
자그마한 유리병에 담긴 금빛 액체를 한참이고 음미하듯 관찰하던 자비에르는 곧 손가락에 힘을 줘 병을 깨트리더니 헛웃음을 쳤다.
“…….”
티 나게 인상을 찌푸린 제이디가 그를 올려다보며 언짢은 기색을 내보였다.
“참으로 맹랑한 녀석이군.”
“…저를, 중부 장벽으로 보내 주십시오.”
제이디가 고개를 조아리며 재차 요청했다.
“그건 허락할 수 없다.”
“어째서요?”
여전히 예를 모르는 말투에 궁정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내게 내민 조건은 단 하나 아니었느냐?”
“제가 치료제를 만들면, 2황자를 석방해 주십시오. 그게 제 유일한 거래 조건입니다.”
“네가 치료제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더 검증하고 생산할 필요가 내게는 없지 않느냐.”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황제의 말은 꼭… 남부 제국민을 구제할 생각이 없단 뜻으로 들렸다.
“지금… 역병이 장벽을 넘어 북향하고 있습니다.”
“그래.”
“폐하께서는, 역병으로 죽어 가는 제국민을 도울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내가 할 의무가 없구나.”
“그렇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 이유가….”
당황한 제이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반응이 없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황족을 비롯한 궁정 대신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저마다 황제 앞에서 묵례한 채 조아리고만 있을 뿐, 그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하거나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황실은 무슨 생각인 거지?
“네가 치료제를 만들어 낼 만큼 유능한 ‘마녀’인지 알아볼 셈이었다.”
“…….”
“그것이 입증되었으니. 네가 살아서 이 궁정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이디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내 죽음은 두렵지 않아. 어차피 각오한 바였다. 그러나… 유효한 치료제가 만들어졌음에도 이를 제국민 구제에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구는 황제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제이디가 할 말을 고르는 사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정 회의실을 떠나는 황제를 친위대와 대신들이 뒤따랐다.
제이디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인 제이디가 스산한 목소리로 재차 황제를 불렀다.
“폐하.”
자비에르가 걸음을 멈췄다.
“더 볼일이 남았느냐.”
“…‘화원’이란 건 당최 무엇인가요?”
찰나의 순간, 정적이 일었다. 제이디는 미묘한 기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 또한 너에게 답변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
황제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궁정 회의실을 벗어났다.
‘당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100일간의 노력으로 얻어 낸 결실로는 제국민을 구제할 수 없을 듯했다. 충격에 빠진 채 가만히 서 있는 제이디를 자카르 아르디오스가 호송했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제이디는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됐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학살을 일삼는 황제라지만… 중앙 장벽을 걸어 잠그고 여전히 남부인들을 가두고 있는 황제라지만. 역병이란 재앙에 건성으로 대응하는 태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 * *
헐리 무니를 대신할 ‘마녀’를 찾았다.
즉, 해결할 수 없었던 역병을 해결할 열쇠가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리안 베르딘은 여전히 갇힌 채였지만 새 미래를 향한 희망에 들떴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필요하다.’
그것은 명백한 정답이었다. 이 혁명의 끝에 제 손을 잡고 있을 사람은 제이디 헤이스터가 될 것이었다.
스물한 번째 우주는 이만하면 된 것 같았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아무리 자신의 석방을 조건으로 치료제를 개발했다고 해도 자비에르는 결코 그 약속을 지킬 자가 아니었으므로, 처형당하기 전 돌아갈 과거 지점을 정확히 계산해야 했다.
리안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확히 사흘 후 그의 재판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집행을 담당하는 자는 1황자 렉시드 베르딘이었다.
베일에 가려 있던 혁명군 수장의 처형 소식에 황성 사람들이 처형장 근처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 와 처형장에는 답지 않게 훈기가 감돌았고, 대기에는 꽃향기가 은은히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엉망이 된 광장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가득 먼지를 몰고 와 부드러운 분위기를 뒤덮어 버렸다.
처형장으로 옮겨지기 전, 렉시드가 리안 앞에 나타났다.
“4황녀가 남아 있는 혁명군 조무래기들을 끌고 네 탈옥을 지시했더구나. 시도하기도 전에 실패했지만.”
“……!”
뜻밖의 소식에 리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멜리아는….”
미쳤다.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리지 않았나. 그런 정신으로 계책을 짰을 리 없다.
그 생각을 안다는 듯 렉시드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 아이가 이 궁정에 온 지도 15년쯤 되었지.”
“…….”
“15년간 감쪽같이 이 오라비를 속인 녀석에게, 그깟 미치광이 연기쯤이야.”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관계없었어.”
“아. 두둔할 필요는 없다. 크게 해칠 생각은 없으니. 어차피 너에겐 다 소용없는 일이지 않느냐?”
“그 앤 내 동생이야.”
그때, 렉시드가 리안의 목을 낚아채 벽에 처박아 버렸다. 뒤늦게 밀려오는 둔통에 리안이 작게 인상을 썼다. 렉시드는 리안이 더 말을 이을 수 없도록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스운 일이군. 그리 누이를 생각하는 녀석이 이런 역모를 꾸몄다는 게.”
죽일 듯이 목을 죄며 붉은 눈을 번뜩이는 렉시드의 모습을 리안이 한심하단 얼굴로 쳐다보았다.
“넌, 결코 변하지 않는 인물 중… 하나였지.”
수차례 시간을 돌아오며 리안이 되산 세월만 해도 한 세기를 넘겼다.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었어도 리안은 많은 변수를 보았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신념이나 입장을 자주 바꾸곤 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결단코 변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렉시드는 그중 하나였다.
“단세포가 아닐까, 싶을 만큼….”
“명백한 정답 앞에서는 다른 이상을 꿈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욕에 반응할 가치도 없다는 듯, 렉시드가 리안을 놓아주었다.
명백한 정답이라. 렉시드가 신성 제국을 향해 그런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아마도 다른 무형의 가치일 터였다. 이를 테면 힘, 권력 따위의 것들.
“렉시드.”
“…….”
“너무 강한 힘은 독이 된다.”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는 건가? 감히 네까짓 게?”
“네가 단순한 쾌락주의자가 된 것도 삶이 허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해. 사람은 넘어설 산이 있어야만 힘을 낸다. 태생부터 정상이었던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
“…….”
“어쩌면 불안했겠지. 넌 늘 네가 가진 힘을 증명하려 했었다. 주변 사람을 혹사해서라도.”
“유언치고는 듣기 싫게 주제넘는군.”
“그 어떤 말도 너에겐 가닿지 않겠지만. 렉시드, 나는 그래도 널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었어.”
“당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너를 안고 가기 위해 했던 노력이… 참 많았는데.”
불통은 베르딘 황가의 보편적 특징이어서. 리안은 실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한번 말해 보았다.
절대 권력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그 무엇보다 리안을 가장 무력하게 하는 건 막연한 미래도 버거운 과업도 아니었다. 결코 나란히 서지 못할 대립이 실감될 때였다.
“허튼 수작 부려도 소용없다. 끝내 옳았던 건 나니까. 잘 가거라, 리안.”
그리 말한 렉시드는 한때나마 제 아우였던 그를 피가 섞인 것조차 인정하기 싫다는 듯 혐오스럽게 쳐다보며 처형장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얀 연기가 서서히 감싸고 있었다. 또 쾌락 속에 잠식되려는 모양이다.
1황자는 예부터 그래 왔다. 사사건건 저와 갈등을 빚었고, 어떤 방면에서도 형제들에게 뒤처지는 면이 없도록 애썼다. 이미 황제 다음의 힘을 가졌음에도.
홀로 남겨진 리안은 그저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어느덧 처형 시간이 되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분명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리라는 것을 리안은 믿고 있었다. 그래서 생체 실험을 빌미로 제이디와 함께했던 동안, 그녀의 손목시계에 회중시계의 부품 하나를 넣어 두었다.
“리안, 균형이야말로 이 우주의 근원이란다. 시계는 소우주와 같아. 모든 톱니바퀴는 맞물리는 법이며, 아무리 작은 부품일지라도 빠지면 근본적인 오류가 생기고 말지.”
균형은 시간의 근원, 모든 톱니바퀴는 맞물린다.
그러니 제 가설이 맞는다면 제이디 헤이스터의 시간과 제 시간은 동일 선상에 놓일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제이디 헤이스터의 진심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