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펠리디오스 후작가의 누군가로부터 비밀 서신을 전달받았다. 요약하면 후작가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 어떻게든 도주로를 만들 테니 탈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발신자는 특정돼 있지 않았지만 분명 휘노일 것이다. 다시는 못 보게 되는 한이 있어도, 자기는 죽음을 앞둔 친우를 그렇게라도 도와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으니.
제이디는 편지를 곱씹지도 않고 곧바로 벽난로에 넣어 없앴다.
스스로 황실의 볼모가 되어 황제와 100일간의 거래를 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죽음의 문턱에 있다 한들 또 다른 관계자를 만들 순 없었다.
사지가 잘린 채 화형된 로건, 그를 구하려다 같이 처형된 첼시.
두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봤으니까. 이제 더 이상은 누구와도 관계돼선 안 됐다.
황제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막강해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그것을 꺾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이디가 자신의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변수는 오직 하나.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역병은 자신이 남부에 출장을 다녀온 시기 이후에 터졌기에 제이디는 역병 환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간 쌓인 정보와 시신을 살피며 기초적인 설계를 하는 것에 우선 시간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황실에 아무리 요청해도 그동안 모인 정보는 무척이나 한정적이었다.
때문에 앞이 깜깜하던 때, 제이디를 찾아온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향해 자카르 경이 경례하는 순간. 제이디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들고 있던 문서를 놓칠 정도로 당황했다.
“제국의 4황녀를 뵙습니다.”
“…클라리사 뉴트?”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제이디에게 다가간 4황녀 아멜리아가 정겨운 이름을 듣고 주춤하는가 싶더니 표정을 굳혔다.
“이젠 아냐.”
“예를 갖추거라.”
자카르의 부재로 친위대 관리를 맡은 세이먼을 대신해 부관직을 맡게 된 다리우스가 제이디에게 말을 삼갈 것을 충고했다.
제이디는 며칠간 시종들이 속닥거리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황제가 4황녀를 미끼로 2황자를 잡아낸 날 이후, 4황녀가 맨정신을 잃고 편집증을 앓고 있다고.
소문으로만 듣던 4황녀의 정체가 그 옛날 존재감 없던 말더듬이 클라리사 뉴트였다니? 도무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리사, 네가 어떻게….”
“너 때문이야.”
난데없는 책망에 제이디가 인상을 찌푸리며 클라리사를 쳐다보았다. 아는 얼굴을 만나 반갑던 마음이 의아함에 감춰졌다.
“결국 내 몫의 공이 없어졌잖아. 너 때문에!”
4황녀는 클라리사 뉴트와는 달리 의기소침해하지도,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을 희번덕 뜬 채 제이디를 깔아 보며 갑자기 윽박질렀다. 당황한 제이디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자, 쨍그랑! 4황녀는 집히는 아무 플라스크를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제이디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네가 그날 잡히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쩌면, 어쩌면!”
급기야 제이디의 면전까지 다가와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쥔 아멜리아가 따졌다. 기다란 손톱이 어깨를 파고들자 제이디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내가 먼저 딜레앙의 정체를 눈치챌 수도 있었는데! 혼인이니 약혼이니… 아버지 앞에서 멍청한 꼴만 보이고 근신돼서 아무것도 못 했어!”
“이거… 놔!”
제이디가 가까스로 아멜리아를 떼어 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돌연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며… 흐으… 거짓말쟁이….”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어떻게 네가 여기 있냐고!”
짝─
아멜리아의 매서운 손바닥이 제이디의 뺨을 쳐올렸다.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진 제이디는 차마 눈동자를 들어 올릴 수도 없어 공허하게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감정 변화였다. 정상적이지 않았다.
“‘화원’에 떨어진 널 가장 먼저 찾은 건 나였어.”
“…‘화원’?”
“다 네 탓이야.”
제이디가 금방이고 홧홧해진 뺨을 부여잡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며 울던 아멜리아가 거칠게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더니 드레스 자락을 쥐고 성급한 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뒤따라온 시종들까지 모두 나가자, 연구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가만히 서서 방금 뭐가 지나간 것인지 곱씹던 제이디가 탈력한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은 건 나라고.”
4황녀가 ‘화원’을 언급한 순간부터 밀려온 두통을 꾹 참으며 관망만 하던 자카르 아르디오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4황녀께서는 가장 먼저 널 생포하려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화원’이란 건 뭐고요.”
“졸업 무도회가 있던 날, 널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지. 어떻게 알았는지 혁명군이 방해했다. 그날 일을 계기로 4황녀께서는 귀족가의 조력이 더 필요하다 판단하셨고.”
그래서 딜레앙 백작가에 접근했던 거구나. 그게 리안 베르딘의 정체를 탄로 나게 한 사건의 원흉일까?
모든 게 인과성을 가지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었어.
하지만 애초 제이디는 화원은커녕 그 비슷한 무엇에도 허락 없이 침입한 적 없었다. 도무지 리사, 아니 4황녀가 제게 앙심을 품은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했다. 자카르가 말을 돌렸다.
“반대를 무릅쓰고 아카데미에서 수학할 만큼 본디 총명하고 이지적이셨다. 지금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시니 네가 이해하거라.”
“졸업 무도회라는 말은 또 뭔가요. 그날 아카데미 홀이 습격당한 게 저 때문이었다고요? 나도 모르는 혐의 때문에 날 생포하려고…?”
“…….”
자카르의 침묵에서 긍정을 읽은 제이디가 다른 차원의 충격을 느꼈다. 잠시 말없이 어질러진 연구실을 치우며 머리를 식힌 제이디가 생각했다.
‘황실에 비밀이 있다.’
고작 갓 성인 된 학생 한 명 잡자고 그 정도의 전력을 동원한다? 상식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4황녀가 말한 ‘화원’이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이단 연구를 비유하는 말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위성이 부족했다.
내가 얽힌, 4황녀가 목격한, 중차대한 일.
‘알아내야 해.’
* * *
예상외로 황실이 협조하는 덕분에 역병 연구는 순조로웠다. 제국민의 인명이 걸린 일이니 황실 입장에선 당연히 협조적인 척이라도 해야겠지만, 어째선지 찝찝했다. 하지만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황실 마법부 연구원들은 제이디의 지식에 놀랄 따름이었다. 전 제국을 통틀어 내로라하는 인재만 모인 이곳에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수식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대학에도 진학하지 않은 평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대학원생 수준의, 아니, 어쩌면 당장 교수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박학다식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연산 능력과 화학식 계산은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여서 고위 연구원 중에서는 이런 인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몰래 아쉬워하는 이마저 더러 생겼다.
제이디라는 ‘마녀’에게는 여러 강점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것은 비위였다.
“7번 시액 유효성은 검증되었나요?”
“그게 아직… 우욱…!”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토할 거면 나가세요. 오염된다고요.”
역병에 막 걸린 환자도 황성으로 오는 동안 거의 죽어 제이디가 얻을 수 있는 표본은 어쨌거나 시체였다. 딱딱하게 굳은 시체의 피부나 점막 혹은 말라붙은 혈액 따위에서 채취한 세포를 그녀가 만든 여러 시약으로 실험했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시체가 그득하여 당연히 악취가 진동했고, 전염병 연구법은 신성 제국에서 여태 필요가 없었던 관계로 정립되지 못하였으니 연구 환경은 열악 그 자체였다.
이곳 연구원은 대다수가 한평생 마법 융합자로만 살아왔던 자들이기에 이런 ‘역겨운’ 실험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제이디 헤이스터는 시체를 가르거나 피를 만지거나 냄새를 맡는 그 어떤 과정에서도 무서우리만치 침착했다.
갈수록 연구 공간이 부족해 제국군의 야외 훈련장으로 옮겨 왔다. 도합 100구 이상의 시체를 거쳐 제이디는 역병의 발현 기제와 전파 원인 등을 알아냈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더러워진 면장갑을 벗고 머리를 고쳐 묶으며 일어섰다. 그 앞으로 늘어진 시체가 오와 열을 이루어 훈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제이디는 곧 훈련장을 나와 코와 입을 막고 있던 면포를 벗으며 모든 시체를 치우라고 말했다. 사체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
“지독한 녀석이네요.”
자카르 옆에서 제이디를 감시하던 임시 부관 다리우스가 혀를 내둘렀다. 가녀린 체구의 여인에게서 전쟁터에 내놓아도 동요하지 않을 강인함이 엿보였다.
시체라지만 혹시나 전염병이 옮을까 면포를 쓰고 호흡을 조심했던 터라 훈련장을 벗어나자마자 현기증이 일었다. 제이디 스스로는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까무룩 정신이 나갔다 돌아오는 사이 어느새 자카르 아르디오스의 품에 기대 있었다.
“아, 미안해요. 잠깐 어지러워서.”
“…….”
자카르는 옆으로 쓰러지려 했던 제이디를 받쳐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제이디의 안색을 살폈다.
너무 무리하는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간 밤낮없이 시체 주변을 맴돌며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 체력 좋은 장성한 사내들도 멀찍이 서서 하루 종일 코와 입을 막고 있으려니 답답한데, 최전선에 있는 자가 멀쩡할 리 없었다. 심지어 속이 불편하다며 안 그래도 형편없는 식사조차 자주 걸렀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다.
“…재판일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알아요.”
자카르의 품을 벗어나며 제이디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손에 제국민의 운명이 달린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르게 둘 순 없어.”
“또 보모라도 붙이실 건가 보죠. 싫어라.”
“…….”
“그 새로운 부관 말이에요. 까칠해서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세이먼 경이 그립네요.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놀려 먹는 맛이 있었는데.”
“세이먼은 네가 하대할 수준의 군인이 아니야. 남의 성품을 조롱하지 마.”
“아무튼 지금 부관은 싫어요.”
“그리 싫으면 알아서 똑바로 처신하도록.”
“알겠어요. 오늘은 한숨 돌릴 테니 제대로 식사할게요. 대낮에 혼절하는 걸 보니 나도 한계인가 봐요.”
“…….”
“거짓말 아니에요.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실 거예요?”
자카르는 제이디를 볼 때마다 언짢았다. 잃을 게 없다는 듯, 조아리는 법 없이 당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불쾌감이 단전부터 치밀어 그녀와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반역이 어째서 그녀에게는 이리 쉬운지. 같은 뿌리 출신으로서, 이해할 수 없었다. 죽는 날을, 그것도 최고형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될 날을 손꼽으며 하루하루 절박하게 떨어도 모자랄 판에. 무서운 표정 좀 죽이라며 농담이나 치는 꼴이라니.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한 자카르가 대답 없이 앞장섰다. 정신을 잃고 제 몸에 기대 있던 제이디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품에 다 차지도 않을 정도로 야위었으면서.
“10분.”
“네?”
“‘잠깐’이 아니었다. 네가 혼절했던 시간.”
하마터면 신성 마법사를 부를 뻔했다. 자카르가 뒤돌아 며칠 새 눈에 띄게 핼쑥해진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햇볕 아래에서 다시금 타오르듯 빛났다. 그것도 잠시, 곧 눈꺼풀을 내려 눈동자를 감춘 그가 도로 뒤돌아갔다.
“…….”
제이디는 늘 보던 그의 검은 뒷모습이 오늘따라 낯설다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