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44)화 (45/116)

처형대에 오른 자는 로건뿐만이 아니었다.

“첼시 교수님…?”

사형 위기에 놓인 로건을 빼돌리기 위해 독단적으로 잠입한 첼시 아도라 역시 함께 잡혀 있었다. 마력 구속구를 단 채 처형대에 묶인 첼시는 로건과 같이 처형될 예정이었다.

침입한 첼시 아도라를 잡기 위해 많은 수의 제국군이 동원되었다. 제아무리 천재 마법사여도 물량 공세를 이기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하였으나, 생각보다 막강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황제의 마력을 물려받은 1황자의 힘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첼시 옆에서, 로건은 간신히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처럼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그 광경에 충격받은 제이디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짤그랑, 쇠사슬 소리에 눈을 뜬 로건이 고개를 들어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그 겨울 마지막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제이디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한마디 진심이었다.

“너는 그 언젠가 내게 은인이라고 했지만…”

“…….”

“내게는 네가 은인이었다. 돌아올 곳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1학년? 이렇게 면담 신청도 없이 무작정 찾아오면 곤란해. 애초에 신입생은 면담 대상도 아니다만.”

“교수님 연구실 뒤에서 이런 걸 주웠거든요.”

“…….”

“동부에서만 자라는 약초지요. 코라냐크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고 자라난 튼튼한 뿌리에 강력한 마취 성분이 있는… 제국 제일의 마취초.”

“…내려놓고 돌아가거라.”

“이곳 등불 사이에 ‘마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너… 정체가 뭐야.”

“날 가르치세요, 교수님. 우린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요.”

그 어이없던 첫 만남을 계기로 4년간 이어진 인연을 회상한 로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를 거슬러 오르는 붉은 불꽃에 은사 두 명이 무력하게 타들어 갔다.

【제국력 832년 겨울, 로건 리베르, 첼시 아도라 처형】

처형을 지휘한 1황자 렉시드의 눈에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망 중인 은발 머리 여인 하나가 보였다. 3일 후면 재판대에 오를 2황자 세력의 ‘마녀’였다.

‘제이디 헤이스터.’

혁명이 고조되며 기억에서 잊혔던 이름이 떠올랐다. 한때 4황녀가 황제의 ‘화원’ 칩임을 빌미로 잡으라 했던. 그간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다 서부 델로이에서 잡혀 왔다고 했다.

렉시드의 논리 회로는 단순했다. 제국이 금하는 연구를 한 이단. 그 끝은 죽음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등 뒤로 두 손이 묶인 채 무력하게 흙바닥에서 엎어져 울기만 하는 저 ‘마녀’에게서 렉시드는 그 어떤 예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렉시드의 단순한 논리 회로에, 제이디 헤이스터는 곧 갈래길 하나를 만들고 말았다.

3일 후. 재판대에 오른 제이디 헤이스터의 얼굴에서는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음을 잃은 제이디는 앞에 앉은 황제 자비에르와 1황자 렉시드를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재판 집행자가 심문을 시작했다.

“‘마녀’는 죄를 인정하라.”

“죄를 인정한다.”

격식 없는 말투에 좌중이 소란해졌다.

“…….”

자비에르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턱을 괴고 지루하게 죄수를 쳐다보던 렉시드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마녀’는 혐의를 열거하라.”

잠시 뜸을 들이던 제이디 헤이스터가 또박또박 낭창하게 응답했다.

“마녀 어머니 태생. 아카데미의 등불과 4년간 이단 연구. 딜레앙, 아니 2황자의 후원을 받아 현재까지 이단 연구를 이어 왔다.”

“그뿐만이 아닐 텐데.”

당황한 집행자를 물린 렉시드가 직접 나섰다. 제이디가 말을 이었다.

“록펠라 광장 시가전 후, 황실이 구원하지 못한 무고한 제국민을 위해 봉사함. 신성 마법을 쓰지 않고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을 이단 연구로 구원했지.”

“…….”

“록펠라 광장의 은발 천사님이라고 들어 봤나? 민중의 소원대로 ‘검은 머리 악마’의 목도 잘라야 했는데. 이것 참, 내 목이 잘리게 생겼네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타성적인 낯빛이던 렉시드가 자세를 바로 했다.

“당신들 그 잘난 신성 마법으로도 남부의 역병을 치료할 수 없다죠? 그게 당신들이 말하는 위대한 광휘의 신성 제국이 가진 위엄인가? 한심하네요.”

급기야 웃음을 터뜨린 제이디가 한껏 한심하다는 낯짝으로 붉은 눈의 부자를 깔아 보았다. 그러다 또 큭, 실소를 흘렸다.

“아니, 전염병 하나 치료하지 못하는 게 무슨 신성인가요. 이 제국을 굽어살피시는 하늘 위 신성신께 죄스럽지도 않습니까?”

호위하던 정규대 보병들과 친위대원들이 일제히 총구를 제이디에게로 겨누었다.

“신성신께서 대응법이 마땅치 않으신가 보죠. 정 곤란하시면 신성신이 아니라 ‘대지신’께 한번 여쭤보는 게 어때요? 아, 이단이라고 몰아낸 세력에 이제 와서 들러붙기는 좀 면구스러우신가요? 혹시 모르죠. 자비로운 대지신께서 한 번은 봐주실지.”

“…….”

정도를 넘은 불순함에 듣다 못한 황제가 인상을 쓰며 감정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대단히 불쾌한 얼굴이었다. 입을 다물게 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알아들은 렉시드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제이디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컥컥거렸다. 손도 쓰지 않고 목을 옥죄는 것은 필시 마법일진대, 이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해 제이디는 당황했다.

“기어이 미쳤군.”

저것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자카르 옆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세이먼 레이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했다.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하는 세이먼 옆에서, 자카르가 무감한 눈으로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사지가 아니라… 전신이 갈가리 찢기고 싶은 게로군.”

“내, 가….”

“감히 황권에 맞먹으려 해? 더 들어 줄 가치도 없다. 최고형에 처한다.”

시간이 아깝다는 듯 빠르게 판결을 내린 렉시드가 마법을 풀고 일어섰다. 콜록거리던 제이디가 숨을 들이켰다. 형형한 장밋빛 눈동자가 붉은 눈과 마주쳤다.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황제를 향해 말했다.

“내가 치료제를 만들면요.”

자비에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제이디를 향하고 있던 총구가 일제히 내려갔다. 자리를 뜨던 렉시드 또한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것참 흥미롭구나.”

마침내 침묵하던 자비에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스산하고 묵직한 저음은 크지 않았지만 좌중을 곧바로 침묵시키는 힘이 있었다.

“치료제라 했느냐.”

“네.”

“자신 있는 모양이군.”

“저는 훈련된 ‘마녀’입니다. 사람 몸에 일어나는 병의 유형과 기제를 알아요. 세상에 치료 못 할 병은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주어진다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요.”

황제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잔인한 독재자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여태 재판에 오른 ‘마녀’ 중 전염병 치료제 개발을 언급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4황녀가 일찌감치 생포하려 했다더니… 확실히 일반적인 이단과는 다른 면모가 보였다.

“네 제안을 내가 받아 주어야 하느냐?”

“어디까지나 황제 폐하의 선택이겠지요.”

“만약 실패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겠느냐.”

“변변한 가문 하나 없는 일개 뿌리 출신입니다. 가진 건 목숨뿐이에요.”

“그건 내가 너무 손해겠구나.”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절 죽이십시오. 어차피 황실은 밑지지 않습니다.”

“…….”

“다만 제가 치료제를 만들면, 2황자를 석방해 주십시오.”

좌중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 귀족이 참관석을 내리치며 항변했다. 당장 화형해야 한다거나, 방만한 세 치 혀로 황실을 농간하는 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도 있었다.

반면 자비에르는 더더욱 흥미롭다는 얼굴로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야 하지?”

“겁나십니까?”

장내가 한층 더 소란해졌다. 모독을 참지 못해 급기야 몸을 부르르 떠는 황족도 있었다.

“그게 제 유일한 거래 조건입니다. 타협은 없으니 원치 않으시면 즉결 처형해 주십시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던 자비에르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려 좌중을 진정시켰다.

캉!

그의 손짓 한 번에 처형대에 묶여 있던 제이디의 쇠사슬이 끊겼다. 털퍼덕, 예고 없이 장작 위를 굴러 흙바닥에 나동그라진 제이디가 바닥을 짚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잔뜩 위엄이 서린 황제의 시뻘건 눈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병은 빠른 속도로 북향하고 있다.”

“네.”

“장벽에 막혀 있다 해도 황성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너와 2황자의 재판은 100일 뒤로 미룬다.”

폐하!

곳곳에서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며 통탄했다.

“치료제 개발 실패 시, 최고형을 뛰어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실험에 쓸 생명체가 필요합니다.”

“있지 않느냐? 당장 죽어도 상관없는 대역죄인의 몸을 쓰거라.”

“……!”

대역죄인이란 2황자를 뜻할 터. 땅을 짚은 제이디의 두 팔이 가늘게 떨렸다.

뒤돌아 걸어가는 황제의 사위로 친위대가 따라붙었다. 친위대장 자카르의 호박색 눈이 엉망진창이 된 제이디의 몰골을 훑었다. 뜻밖의 결정을 한 황제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이 곧 제이디에게서 벗어났다.

눈이 그치고, 한낮의 겨울 햇빛이 자잘하게 쪼개져 처형장에 내려앉았다. 찬란하고 시린 해였다.

*  *  *

일주일 후, 베르딘 궁정 지하 감옥.

자연광이 차단된 시린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축 늘어져 있던 리안 베르딘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여럿의 발소리가 아닌 걸 보니 이번에도 저를 고문하러 온 1황자이거나… 몰래 찾아온 4황녀거나.

하지만 리안의 앞에 도착한 이는 뜻밖의 사람이었다. 리안의 눈동자가 찰나 흔들리며 희미한 인영을 바라보았다.

황실 마법부 연구원 복식을 한 여인이 쇠사슬에 매달린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맞네…. 그때 그 사람.”

처음 딜레앙 백작이 2황자의 위장 신분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믿기지 않았다.

더 이상 고목을 닮은 진갈색 머리는 아니었지만. 그때, 독이 묻은 칼에 찔린 채 더러운 술집 골목에 숨어 있던 때처럼, 똑같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니 제대로 확신할 수 있겠어.

엉망인 몰골 속에서도 변치 않고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가 눈앞의 여인을 올려다봤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북부 끝으로 가라고 했잖아요, 그러게.”

“…….”

“그렇게 잡혀 버리면 어쩝니까. 키운 보람도 없게.”

단정했던 중저음 목소리가 처참하게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그럼에도 특유의 어조가 변하진 않았다. 그의 실소에도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제이디가 조용히 반응했다.

“생각해 보니까.”

“…….”

“모든 건 다 그날에서 비롯했어요.”

“…….”

“그날 당신을… 살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한때의 첫 만남으로 만들어진 운명의 줄기가 이렇게 뻗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당신은 내 인생을 구원한 나의 태양이었어. 그랬던 그가 무력하게 묶인 채 갇혀 있는 걸 직접 확인하자 온몸의 기력과 함께 모든 희망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힘이 풀린 제이디가 축축하고 더러운 지하 감옥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치 않아도 나오는 눈물을 가리고자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린아이처럼 우는 제이디 앞에서 리안은 눈을 감았다. 마음마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흐으….”

제이디는 그저 서러움이 복받쳤다. 이기지 못할 게 없을 것 같던 사람도 결국 가족 때문에 모든 걸 잃고 말았다. 사실은 그도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제이디가 눈물을 닦아 내고 심호흡을 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번엔 진짜로 당신 살릴 거니까.”

“내가 당신 꼭 살릴 거니까.”

그 말에 꼭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리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맹랑했던 열일곱 제이디 헤이스터가 어느덧 스물둘,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는 전혀 달랐다.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봅니다.”

“…이제부터 내가 그쪽을 많이 아프게 할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제이디가 연구원 복식인 걸 봤을 때부터 짐작한 바였다.

“그 길만이 당신이 살길입니까?”

“나도, 당신도. 그리고 모두가 살길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바라는 바입니다. 따르겠습니다.”

“조금만 버티세요… 리안.”

“네. 도와주십시오, 제이디. 이 시간의 변수가 되어 주세요.”

“…….”

“그대가 내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러니 알아내세요. 이 역병을 해결할 방법을.

한때 내 인생의 구원자였던 태양이, 이제는 제게 살려 달라, 절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이 비로소 제이디의 정신을 일깨웠다. 말없이 일어선 제이디가 더는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뒤돌아섰다.

“가요, 자카르 경.”

100일간 대역죄인 제이디 헤이스터의 감시 역을 맡게 된 친위대장 자카르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앞장섰다. 그와 함께 지하 감옥을 벗어나며, 제이디는 리안 베르딘에게 받았던 모든 구원을 기억에서 지우고자 다짐했다.

헬렌도, 뮤리얼도, 로건과 첼시도… 제게 도움을 줬던 모두가 죽어 버렸다. 이제는 제 손으로 직접 인생의 구원자를 죽여 가야 한다. 예쁜 이름을 붙이고 애지중지 기르던 실험 쥐가 아니라, 진짜 사람의 몸을.

그 모순적인 운명을 받아들인 제이디는 완전히 웃음기를 잃었다.

【제국력 833년, 리안 베르딘 생체 실험 시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