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42)화 (43/116)

남부로 파견된 헐리 무니에게서 연락책이 돌아온 건 자그마치 6주 후였다.

걸어 잠긴 장벽을 도저히 넘을 수 없던 연락책이 결국 해안선까지 뻗친 제국군 안에 섞여 위장 잠복하며, 우여곡절 끝에 지켜 낸 헐리 무니의 편지였다. 마침내 무사히 도착한 그 편지가 혁명군 수뇌부의 손에 들어왔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병마입니다. 제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남부 제국민들이 끊임없이 북향하고 있어요. 북부로 가십시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의 불꽃에게, Η.】

매우 짧은 편지였지만,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헐리의 희생을 알게 된 리안이 편지에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했다. 도저히 그의 마지막 편지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헐리 무니의 전언은 ‘비둘기’들이 물어 온 정보와 함께 선전물이 되어 온 황성에 흩뿌려졌다.

【신성 마법으로도 회복되지 않으며, 걸리는 즉시 3일 안에 사망】

【친황실 가문, 계엄령을 피해 밤마다 북부로 피난】

【중앙 장벽 폐쇄… 베르딘 황실은 제국민을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혁명군의 비밀 인쇄소가 모조리 발각되었다. 역병 소식을 접하고 겁에 질린 몇몇이 결국 혁명군을 배신하고 황실 편에 선 것이다.

물론 황실은 이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만 솎아 낸 뒤 비밀리 처형했다.

흩뿌려진 선전물은 황성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으나 그마저도 얼마 못 가 철저히 수색되어 불태워졌다. 대다수 제국민에게 뻗친 정보는 그저 ‘남부에 전염병이 돈다’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황성민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부 귀족만 예외적으로 계엄령을 피해 북부로 피난하는 것에 원통해했으며, 남부 혁명군과 더불어 역병을 피해 북향하던 제국민들이 중앙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소식이 드디어 퍼지며 혁명은 바야흐로 본격화되었다.

전 제국 차원의 반란기가 태동했다. 황실은 이를 ‘2차 반란기’로 명명했다.

리안은 ‘최초의 미래’를 소상히 기억하기 위해 전염병의 경로를 기록하고 예상해 전술을 바꾸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병마’라는 헐리 무니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병이 파도처럼 확산되는데도 황실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리안은 어쩔 수 없이 중앙 혁명 세력만을 이끌고 공방전을 주도했다. 그래도 그동안의 성과가 있었는지 혁명군은 베르딘 제국군을 상대로 어느 정도 버텼지만, 남부 세력이 여전히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터라 수세에 몰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불안해 미쳐 버린 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광장에서 다시 한번 시가전이 벌어졌다.

리안은 또 한 번 제이디에게 경고했다.

【제이디, 부디 읽으세요. 이 서신을 확인하는 대로 북부로 가십시오. 최대한 멀리, 국경까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편지였다.

“중앙 장벽을 부순다면 역병이 침범해 국경을 넘어서까지 몰살당할 겁니다.”

“그렇다고 남부를 버릴 순 없어요.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황제와 같은 선택을 내린다면 이 혁명의 의미가 뭡니까?”

얼마 가지 않아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혁명군은 장벽을 부숴야 한다는 급진파와 역병 치료법을 알아낼 때까지 남아 있는 제국민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뉘었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혁명군 수장의 정체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 수장의 능력과 통솔력을 의심하는 세력도 생겨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황성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동이 일어나고 있고, 혁명군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있다. 이대로면 자비에르가 손대지 않아도 혁명 세력은 알아서 분열될 터였다.

모든 전술과 계획이 완벽했었다. 정체불명의 역병이 터진 것만 빼면.

하지만 해결할 수 있다. 리안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  *  *

도박의 날이었다.

중앙 장벽을 걸어 잠근다고 해서 과연 역병 확산이 늦춰질지는 의문이나, 그럼에도 황실은 마냥 손 놓고만 있었다. 그들만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 위화감이 느껴졌다. 신성 마법이 통하지 않는 역병이라면 자신들의 안위 또한 분명 위험할 텐데. 어째서인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전인 와중에도 황실을 위시한 4황녀는 착실히 약혼식 일정에 맞춰 연락을 보냈다. 약속대로 약혼한 뒤 혼인하게 된다면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 함께였다.

마침내 훈풍이 부는 어느 봄날, 황실과 딜레앙가의 약혼 연회가 올랐다. 폐허가 되고 있는 황성과는 다르게 황궁은 여전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자태를 드러내며 개방되었다.

역대 황제와 황후를 기린다는 뜻에서 황궁의 본성에서만 피운다는 푸른 꽃 ‘코넬리아’가 약혼식이 치러지는 정원을 가득 둘러싸고 있었다. 그다지 명예로운 약혼식이 아님에도 온 황성에서 몰려든 황족 및 귀족 인사로 식장은 북적였다. 황실에 눈도장을 찍으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딜레앙 백작’의 정체가 궁금해 참석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얼굴 없는 대부호.

둥근 원형의 넓은 정원 가운데 입장 길이 길게 나 있었다. 그 하얀 길 양옆으로도 푸른 꽃 코넬리아가 가득 장식돼 있었다. 따스한 봄과 어울리는 시원한 꽃향기가 내내 맴돌며 정원을 물들였다.

“얼마나 절세 미남이시면 황녀님께서 먼저 혼약서를 보내셨을까요.”

“한낱 백작 가문이, 그것도 북부 변방의 별 볼 일 없던 가문이 콧대 높은 황족 일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베르딘 황가의 국고가 내전으로 텅 비었다는 소문이 역시 사실인가 봐요.”

연회곡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4황녀 아멜리아가 먼저 자리에 나서 인사했다. 단아한 물빛 드레스가 그녀의 청보랏빛 머리뿐 아니라 코넬리아와도 잘 어우러졌다. 청초하면서도 젊디젊은 4황녀가 낭창한 목소리로 연회의 시작을 알리자,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황가와 연을 맺게 된 제 약혼자를 소개합니다.”

마침내 4황녀가 팔을 들어 가리킨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옮겨졌다. 곧이어 연회장은 싸해지다 못해 해일이라도 맞은 듯 혼란해졌다.

처음, 사람들은 휠체어에 탄 노인이 아닌 그 노인의 휠체어를 끄는 자가 약혼자일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복식이라든지, 태도라든지. 모로 봐도 딜레앙 가문의 가주이자 4황녀의 약혼자로 보이는 사람은 바로 휠체어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질겁한 귀족들이 저마다 쑥덕거렸다. 황녀가 미쳤다느니, 나이 차가 적게 봐줘도 50은 되어 보인다느니, 속닥이며 헐뜯는 소리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4황녀 아멜리아 베르딘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곧 자신의 자금줄이 될 늙은 딜레앙 백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인이 광택이 도는 아멜리아의 장갑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추자, 급기야 몇몇 귀족은 아무리 정략혼이라지만 못 볼 걸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시선을 돌렸다.

“나의 청혼을 받아 주어 정말 감사해요, 백작.”

기왕이면 식을 올리고 최대한 빨리 죽어 준다면. 그것 또한 굉장히 감사한 일일 터.

그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늙은’ 딜레앙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4황녀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그의 깊은 눈빛에서 기시감이 들었지만, 긴장한 탓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마침내 4황녀의 안내에 따라 딜레앙 백작이 연회장 중앙으로 다가갔다. 야트막한 계단이 있어 딜레앙 백작의 휠체어가 툭툭, 삐걱거리자 누군가가 풋, 하며 비웃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4황녀는 인내심 있게 늙은 약혼자를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단상에 오른 딜레앙 백작이 앉은 채로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짙은 녹색 눈에, 저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의 작태가 맺혔다.

저 궁정의 경계 너머 벌어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일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우아하고 품격 있는, 명예를 잃지 않는 베르딘 제국의 격조 높은 귀족들이 샴페인 잔을 쥐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천박하고 상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 귀족 계층의 명예를 더럽히는 간사한 늙은것을 본다는 듯.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에 밀려왔다. ‘늙은’ 모리스 딜레앙이 천천히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굽어 있던 허리를 펴고, 움츠러들었던 어깨도 펴고, 숙인 고개를 들어 턱을 치키고 그들을 훑듯이 깔아 보았다.

천박한 노인이 순식간에 노련한 귀족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

다시 정적이 흘렀다. 뭐지? 거동을 못 하는 게 아니었어? 잠시 술렁이던 소리도 다시금 그의 눈빛이 좌중을 훑자 자연히 사그라졌다.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께서 생명을 깎아 지키려던 것이 고작 이딴 것들이었습니까?

이런 자들만을 위한 나라는, 그냥 없는 게 낫습니다.

마음 깊이 조소한 모리스 딜레앙, 아니 리안 베르딘의 눈빛에 진정 어린 경멸이 담겼다.

그 순간, 화아악─ 온 정원에 피어 있던 새파란 코넬리아가 불꽃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놀라 돌아간 눈동자들이 다시 단상으로 돌아온 순간, ‘늙은’ 모리스 딜레앙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장성한 청년이 아까처럼 서서 당황하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르딘 제국 제2황자의 상징이었던,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한 청년이.

“2, 2황자…?”

연회장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느새 코넬리아의 꽃잎은 푸른색이 아닌, 새빨간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연회장에는 향긋한 꽃향기 대신 쌉싸래한 화약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탕─

꺄아악!

총소리가 울리자 멀찍이 꽃나무 위에서 휴식하던 하얀 새들이 일제히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참석자 무리에 섞여 있던 붉은 머리 로제타가 공중으로 쏘아진 피스톨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후, 불고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긴장해, 이제 실탄이거든.”

“혁명군이다!”

“포위해!”

집중된 시선을 만끽한 그녀가 곧 거추장스러운 분홍색 드레스를 찢어 헤치고 날쌔게 움직이며 호위대를 해치워 나갔다. 그렇게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귀족들이 도망치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거나 혼절하는 상황이 연이었다.

떨리는 다리를 가누지 못해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은 아멜리아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위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시리다고 느낀 적 없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이 컸네, 우리 막내.”

“오라버니…?”

“어렸을 때. 이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네가 그랬었지. 꼭 오라버니 같은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어… 어떻게 여기….”

눈빛에서 느낀 기묘한 기시감. 조금 그와 닮았다, 라고 스치듯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 허술한 노인네가 둘째 오라버니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패착이었다…. 명백한 판단 실수였다.

“그 소원 이루지 못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우리 막내를 속인 것도. 네 연회를 망친 것도….”

“리안… 나… 난, 그저….”

울먹이는 4황녀를 향해 몸을 숙인 그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마주한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쾌청한 가을 하늘을 닮은 푸른 눈. 어머니의 눈동자였다.

“렉시드를, 이기고 싶었을 뿐인데… 흐으….”

“알아.”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이기러 가자.”

“…….”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서럽게 우는 누이를 일으켜 세운 리안이 가만 그녀를 안았다 놓아주었다. 우선은 어서 가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떠밀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재회한 2황자인데. 상황이 이렇고 그가 혁명군이었고. 그런 것 따위 지금만큼은, 아주 잠시만이라도 다 잊고 싶었다.

“그리웠어….”

“…응.”

그와 함께 이 황궁에 사생아로 들어오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지금까지. 머리는 아니라 해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다. 어머니가 요절하고 그마저 저를 버리고 사라진 뒤에는 이 궁정에 진짜 제 편이란 없었다. 어머니가 다르다고 해도 저를 사랑해 주던 3황녀 자넷도 정략혼으로 속국 발테온의 왕자와 결혼해 떠나면서, 정말 아무도 남지 않았었다.

10초만. 아니, 5초, 3초만. 모든 걸 다 잊고 리안과 1초만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곧 친위대가 들이닥칠 거야.”

황실을 배반한 황족이라는 영원한 오명을 뒤집어쓸 나의 오라버니. 그는 저보다도 치밀하고 영리한 자였기에, 퇴로 없이 무작정 이곳에 들어오진 않았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서 친위대가 진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시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호위대를 처리한 로제타가 다가오더니, 리안과 아멜리아가 풍기는 애잔한 분위기를 보고 진저리를 쳤다.

“으, 또 감상적인 눈빛. 안 어울려.”

“먼저 가.”

“잡혀도 책임 못 져요.”

로제타가 지휘하자 측근들이 일제히 퇴로로 향했다. 곧이어 리안도 씁쓸한 미소만을 남기고 화약 연기 사이로 멀어져 갔다. 쑥대밭이 된 연회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멜리아가 손날로 눈물을 닦아 내고 다시 표정을 바꿔 끼웠다.

문득 돌아본 시야에 붉게 변해 버린 코넬리아 꽃들이 보였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탐스러운 꽃잎들이 꼭 명백한 반란의 상징 ‘붉은 기’처럼 보였다. 그 순간 아멜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의 2황자 리안 베르딘이, 바로 혁명군의 수장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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