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39)화 (40/116)

“온실입니다!”

제이디가 영문도 모른 채 무릎 꿇린 채 결박되고 잠시 후, 뒤뜰 수색을 마친 군인들이 보고했다. 예상했던 게 들어맞았다. 딜레앙 백작가의 수혜자, ‘마녀’ 제이디 헤이스터.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는지 모르겠군.”

자카르가 색깔 없는 표정으로 반항하는 제이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학생이 생각하기에,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옳겠습니까.”

“죄책감. 그리고 분노. 나는 경께서 ‘우리’에게 공감하기를 바라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그렇다면 학생은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어선 안 되겠습니다.”

자카르는 그날, 훗날 그녀와 재회하게 된다면 더 이상은 단순히 광장 추모제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웃 관계일 수 없을 것이라 직감했었다.

군홧발이 마구잡이로 온실을 헤치고 화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무력하게 지켜보는 제이디의 눈에 시큰하고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 가게는 마치 그 옛날 어머니 헬렌이 체포되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짜고짜 남의 영업장에 쳐들어오다니.”

막연한 공포에 숨을 헐떡이며 당황하던 제이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카르는 미동도 없이 천천히 대답했다.

“죄질이 심각하더구나.”

“……!”

“네가 엮인 사건은 제국 차원의 중범죄다. 관계자도 생포되었고 마지막 남은 게 너였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군.”

‘관계자’라는 말에 제이디의 눈빛이 아연하게 질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서를 쓰고 이단 사업을 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게 아닌가?

“관계자라니…? 여, 여기 엮인 자는 아무도 없어요. 난, 졸업 이후로 황성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어!”

“그래. 그날 바로 널 잡았어야 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저 말고 또 누가 잡혔단 거예요. 황성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구요!”

“…….”

그는 곧 연행하란 명령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마차에 올랐다. 촘촘한 창살이 쳐진 마차에 던져지듯 실려 제이디는 황성으로 연행되기 시작했다.

손이 묶인 채였지만 이런 것쯤 머리만 굴리면 어떻게든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총을 지닌 수십 명의 제국군…. 섣불리 반항하고 탈출을 시도하는 건 무모했다.

‘생각해… 생각해….’

금서를 쓰고 있다는 정보는 죽은 뮤리얼 외에는 아무도 몰라. 뮤리얼은 죽는 그 순간까지 나와 어머니의 편이었고 내 사람이었어…. 지방 소도시에서 누군가 작은 찻집을 운영한다는 정보가 황성까지 보고될 리도 없고.

“이 서신을 확인하는 대로 북부로 가십시오.”

‘딜레앙이 잡힌 거야.’

현재 알고 있는 정황만으로는 그런 가설밖에 세울 수 없었다.

“최대한 멀리, 국경까지.”

그런데 어째서 북부일까? 북부 탈로스는 딜레앙 영지와 제1저택이 있는 지역인데. 딜레앙 백작이 날 무사히 도망치게 하려 했다면, 북부가 아니라 오히려 남부라거나 가까웠던 서부 국경 너머로 망명하라고 했을 텐데.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추측에 머리가 복잡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엄마처럼 마녀재판에 넘겨지는 건….

‘그것만은 안 돼.’

이제 베르딘 약초 사전의 초안이 겨우 완성되었는데, 벌써 처형될 순 없었다. 이런 식으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 뭔가를 남기고 가야 했다. 목숨 걸고 금서 한 권을 지킨 뮤리얼처럼. 어떻게든 나를 살려 놓고 잡혀간 엄마처럼….

공포감에 몸을 떨던 제이디는 모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에 닿은 마차 바닥이 거칠게 덜컹거렸다. 그날 홀로 남겨졌던 오두막집 바닥처럼 시리고 차가운 감촉이었다.

쉬지 않고 달리기를 한참. 조금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 바깥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휙, 시야를 가리던 장막이 걷히고 검은 제복을 입은 제국군 하나가 창살을 열었다.

평범한 제복이 아니었다. 조금 더 지위가 높은 자인 듯했다. 연이은 야영에 지친 듯 거칠하게 수염이 자란 그가 다소 타성적인 눈빛으로 제이디를 바라보더니 덜미를 낚아채 억지로 그녀를 일으켰다. 기분이 더러웠다. 제이디가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입 앞에 물주머니가 내밀어지길래 어쩌란 거냔 듯이 노려보니 사내가 콧김을 훅 내쉬었다. 찡긋, 올라가는 한쪽 눈썹은 짜증보다는 귀찮고 지루하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본인 손해일걸.”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저승길이 그리도 궁금하더냐? 어디로 통하든 죽으러 가는 길일 텐데.”

“황성인가요? 관계자라는 건 대체 누구고요!”

“듣던 대로 싹수가 노랗구만.”

“말씀대로 죽을 마당에 체면치레가 중요한가요?”

“먹지 않을 거면 몸이라도 제대로 가누거라.”

“당신들 명령은 듣지 않아. 당신들은… 너희 제국군이란 족속은… 치가 떨린다고.”

“뭐… 솔직해서 보기 좋구나.”

형형하게 빛나는 장밋빛 눈을 쳐다본 그가 눈을 돌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뒤로 다가온 누군가에게 경례하며 물러났다. 제이디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려 창살에 등을 기댔다. 세운 무릎께 옷단이 그사이 찢어져 있었다.

턱, 한 팔로 마차 지붕을 짚은 눈앞의 인영이 허리를 숙여 안을 바라보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제이디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늑대같이 집요한 금빛 눈이 끝까지 제이디의 시선을 좇았다. 친위대장 자카르 아르디오스였다.

“생포를 명받았다. 멀쩡한 상태로 넘겨야 되거든.”

“…황실에요?”

“그래.”

“…….”

역시 잡혔구나. 백작님이… 혁명군 세력인 걸 들킨 거야.

“황성으로 가는 게 맞았군요. 대기가 바뀐 걸 보니 곧 중부 접경지대겠고요.”

“억지로 집어넣기 전에 주는 대로 받아먹는 편이 좋을 거다. 자비는 베풀 때 챙기도록 해.”

폐허가 된 록펠라 광장에 찾아와 헌화까지 하던 자가, 여전히 무고한 제국민을 학살한 세력에 붙어 공무를 수행 중이시라니. 그때 당시 그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허위와 기만. 위선과… 분노.

“내 바람이 역시 경께는 어려웠나 봐요.”

“…….”

“여전히 황실의 개로 사는 기분은 어때요?”

철컥. 발언과 동시에 창살 너머 자카르를 둘러싼 군인들의 피스톨이 겨냥되었다. 귀찮은 얼굴로 물주머니를 내밀던 자 또한 표정을 바꿔 끼운 채 이번에는 총구를 내밀었다.

“솔직한 것과 경우를 모르는 건 다른 개념이란다.”

자카르의 부관, 세이먼 레이투스였다. 그 광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제이디가 허탈하게 웃었다. 자카르는 무겁게 표정을 가라앉히고 스륵, 올려두었던 팔을 내린 뒤 돌아섰다.

걸어가는 그의 검은 뒷모습이 달빛 아래에서도 너무 어두워, 제이디의 밝은 눈동자마저 침잠했다.

“자신이 망가뜨린 자들의 영혼을 이제 와 위로하시는 건, 어떤 감정의 작용인가요? 슬픔인가요? 아니면 동정? 의무감?”

“딱히. 무엇도 아닙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분명 봤었어요.

당신은 불과 몇 년 사이 내게 총구를 들이밀 미래를 예견했을까요? 거두어지는 피스톨 사이로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연행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 제국군의 행렬이 황성에 닿았다. 잘 닦인 도로에 들어서자 덜컹거리던 마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간 제이디 곁에 붙어서 물과 빵과 수프를 먹여 준 세이먼 레이투스가 꼬질해진 얼굴로 제이디를 쳐다보았다.

“…어째 네놈 몰골이 더 빤질하냐.”

“경이 잘 먹여 준 덕분에요?”

“사지에 들어와 놓고 잘도 농담이 나오는군.”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며칠 사이 생각 정리를 좀 했거든요.”

세이먼이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처럼 건방지고 웃긴 ‘마녀’는 처음이다. 다들 다가올 고문에 겁을 집어먹고 떨거나 끝까지 나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정신을 잃기를 반복하는데 말이야.”

“전 직접 인지해서 증명하지 않은 가설 앞에 무뎌서요.”

“…그런 어려운 말 좀 어떻게 못 하겠냐?”

“상상만으로 겁에 질리지는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것참 부러운 능력이구나.”

그 말대로였다. 지난 며칠 포로 생활을 하며 제이디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마녀’로서. 앞선 정보가 없는 현상 앞에 지레 겁부터 먹지 말자고. 공포에 질렸던 이유는 과거와 상황이 겹쳤던 것 때문일 뿐. 황성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어서 뒤죽박죽 얽힌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었다.

그때였다. 황성에 접어들 때부터 조금 이상하다 느꼈는데… 중앙으로 갈수록 점점 섬찟한 기운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듯 다가왔다.

“…잠깐만요, 경. 광장 꼴이 왜 이래요?”

세이먼 레이투스는 제국군, 그것도 가장 감정 없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황실 친위대의 부관답지 않게 인간미 있는 사내였다. 그새 ‘마녀’와 정이라도 든 건지, 아니면 불편하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포로가 그저 귀찮았는지, 어느 순간 투덜거리며 장막을 걷고 결박을 느슨히 묶어 줘서, 제이디는 창살을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채 지금 자신이 지나치고 있는 황성 거리의 광경을 넋을 놓고 쳐다볼 수 있었다.

곁에서 말을 몰던 세이먼이 그런 제이디를 보며 설명했다.

“뭐,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상관없겠지. 네가 짱박혀 있던 사이 세상이 좀 많이 바뀌었단다.”

“알아듣게 설명해 줘요.”

“2차 반란기가 끝났고, 혁명군은 패배했다.”

“……!”

파괴된 후 재건되지 못한 건물의 잔해에서부터 흩날리는 먼지. 절망이 내려앉은 듯 공기마저 침침하고 텁텁했다. 절기상 겨울임에도 봄철 동부 사막의 모래먼지라도 밀려온 것처럼 눅눅하고 누리끼리했다.

참담한 시장 거리에 상인들이, 노파들이 허망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무기력과 탈력감이 누런 얼굴들에 묻어났다. 그들은 검은 연행 행렬을 익숙하다는 듯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몇몇은 새까만 친위대 제복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골목가에 숨었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보호자의 품에 안겼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황성 경계를 넘기 전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잖아요.”

“너, 이상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피신해 있던 게 아니더냐?”

“이건… 아냐, 난… 서부에서도 남부에서도 이런 소식은…. 난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물음엔 답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제이디의 모습을 보며 세이먼이 미간을 좁혔다.

계엄령 선포와 검열, 단속이 상식선 이상으로 강화되었다는 건 백작님의 편지로 알았지만. 이 정도로 황성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리라고는…. 거기다 이런 정보가 도저히 외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건, 혁명군 선전부까지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비둘기’들이 사냥당하고, 비밀 인쇄소가 들킨 게 틀림없어.

자신이 연구에 몰두하느라 세상과의 접촉을 끊었던 1년.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때, 찢기고 해진 채 바닥을 나뒹구는 방문 하나가 보였다.

기존에 혁명군이 만들어 뿌리던 선전물과는 도식이나 조판이 완전히 달랐다. 이건… 궁정에서 찍혀 나온 문서였다.

나뒹구는 방문 속 초상화를 본 제이디는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조차 낼 수 없었다.

“…….”

사색이 된 제이디가 가리키는 방문을 돌아본 세이먼이 이번에는 진심으로 의아함을 느끼고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수신호에 행렬이 멈춰 서고, 세이먼이 방문을 들어 올려 제이디의 손에 쥐여 주었다.

“…미, 친.”

미친. 말 그대로 미친 상황이었다.

【혁명군 수장 체포

제2황자 리안 베르딘

가담 인력 색출에 총력 …】

혹시 꿈이 아닐까. 제이디는 몇 번이고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마법으로 정교하게 구현된 초상화 속 인물은 어느 모로 보나 모리스 딜레앙… 그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진갈색 머리가 금발로 변해 있는 것뿐이었다.

어째서 모리스 딜레앙의 얼굴을 한 자가 ‘제2황자’란 격조 높은 거대한 칭호를 달고 있는 것이며. 진짜 ‘모리스 딜레앙’은 누구란 말인가?

“베르딘 제국군은 혁명군, 아니, 2황자 세력 척결을 명받았다. 그런데 넌 마치 처음 본다는 얼굴이군.”

“얼굴은… 아는데요.”

“뭐, 이제 와서 수작 부린들 소용없다. 네가 2황자와 결탁한 ‘마녀’라는 증거는 차고 넘치니.”

“그럼 ‘관계자’란 건….”

“네 스승이 처형 대기 상태지. 그 홍당무 머리 교수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얗게 탈색되듯 제이디의 머리가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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