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37)화 (38/116)

어째서 몰라보았을까. 로건 리베르가 괜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매몰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보다는 헬렌의 딸이 ‘마녀’가 되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헬렌은 마녀재판에서 죽었고, 헬렌의 딸은 제국군의 손에 넘겨져 평범한 가정에 입양되었다고 알려졌다. 당연히 의심스러운 마음에 몇 년간 찾아다니다 결국 들켜 버려 추적을 피해 도망친 곳이 이곳이거늘.

제이디는 뮤리얼의 반응을 보며 제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딜레앙 저택에서 로건 교수님의 서신을 받았을 때, 처음엔 그저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뮤리얼 웨버】

어머니의 집에 남아 있던 금서의 저자 ‘M. W.’에 대한 실마리. 금서에 대해서는 엮이는 순간 목이 달아날 수 있어 일부러 로건 교수님과는 공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를 직접 만나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딜레앙 저택에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한 달. 와서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까지 버틴 것이 한 달. 두 달간 생으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선생님. 황성은 내전으로 황폐화되고 있고, 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제게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예요. 그리고 혁명군의 편에 서서 이 싸움에 목숨을 바칠 생각입니다.”

“당최… 무엇을 위해서.”

이 길을 걷지 말려무나. 험난한 길은 잊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여느 집 여식처럼 평온한 일상을 누리란 말이야, 아가.

“나의 어머니, 헬렌을 위해서.”

“…….”

“그리고 당신이 믿는 대지의 신을 위해서. 이름 없는 신성신이 박탈하고 착취한 할라의 권위를 되찾겠어요.”

그 이단적인 발언은 위험했다. 하지만 신성신이 대지신을 몰아냈다는 주장에 동참했던 사람, 뮤리얼 앞에서는 위험하지 않았다.

그제야 뮤리얼의 눈에 제이디의 장밋빛 눈동자가 생생히 박혔다. 어머니를 닮은 눈빛으로 제이디가 다시 입을 열자, 뮤리얼은 그 옛날 젊은 헬렌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러니 제게 가르침을 주세요.”

“절 가르쳐 주세요, 뮤리얼 님.”

“저와 함께 세상을 바꿔요.”

“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뮤리얼은 주저했다. 속세와 연을 끊고 칩거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단다.”

“상관없어요. 저, 머리가 되게 좋거든요. 가르쳐 주시는 건 뭐든 빠르게 흡수할 수 있어요!”

“그리 쉽게 말할 수준이 아니란다.”

뮤리얼은 이미 몇 년 전, 난치병에 결려 수명이 다하고 있었다. 신성 마법을 쓰면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간 의술에 평생을 바친 몸이었다. 그리고 황실은 언급을 엄금하나 신성 마법으로 자연한 수명을 늘릴 경우 영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여기서 뮤리얼이 제이디를 받아 준다면. 제이디는 도제 수련은커녕 늙은이 병간호만 하다 청춘을 낭비할지도 몰랐다.

“…….”

제이디는 말없이 담뱃대만 만지작거리는 뮤리얼의 눈빛만으로도 사연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뮤리얼은 좀 더 고민을 이어 가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네.”

“그럼에도 여기까지 찾아온 헬렌의 딸을 내 손으로 내칠 수야 없겠지. 3년.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 정도뿐이야. 그러니 50년간의 연구를 3년 안에 체득해야 한다.”

“…네!”

“할 수 있겠느냐?”

“이미 민간 의술 총서는 두 번이나 읽어서 거의 외워 놨어요. 저, 여기, 제가 여태까지 연구했던 보고서랑, 헐리 무니 씨의 보고서를 필사한 것도 있어요. 어디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뭐든지 가르쳐만 주세요!”

“…….”

감상에 빠지던 것도 잠시, 뮤리얼은 넘치는 그 의욕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끄럽고 오만한 것이 꼭 제 엄마와 똑같구나.”

“모쪼록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뮤리얼 님.”

“그래, 알겠다. 네 능력을 믿어 보마.”

그렇게 시한부 ‘마녀’ 뮤리얼 웨버의 제자가 된 제이디는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도 도제 수련에 돌입했다.

두 여인의 치고받고 지지고 볶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뮤리얼은 실제 수술법을 포함해 약초 갈래별 실험법, 약제 기술 등 실무 지식 먼저 제이디에게 전수했다. 제이디의 학습 능력은 비상해서, 그녀는 1년 안에 뮤리얼이 전수한 대부분의 기초 지식을 습득했다.

서부 지방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베르딘 약초 사전’을 위한 약초 채집과 실험은 순조로웠다. 어린 시절처럼 밖으로 돌며 뛰고, 흙을 파고, 절벽을 타면서 제이디는 하루하루 체력을 기르고 강인한 청년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제이디는 현재 대륙 남쪽 약초 식생 연구를 위해 해안선을 따라 남부 일리아노스 지방으로 떠나 있었다. 서부 델로이에서 가장 먼 남부로 먼저 향한 이유는 뮤리얼의 건강 때문에 앞으로는 집을 떠나 멀리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오늘은 제이디가 출장을 마치고 복귀하는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격식이란 것을 찜 쪄 먹은 제이디는 도착하자마자 벌컥 나무 문을 열고 시끄럽게 조잘거리며 뮤리얼을 찾았다. 그런 모습조차 제 어미 헬렌과 똑 닮아 있었다.

“뮤리얼! 저 왔어요!”

“왔느냐. 그새 얼굴이 까매졌구나.”

“남부 일조량이 워낙 강해야 말이죠.”

“그렇지.”

“잘 지내셨죠? 저 없다고 쓸쓸해하셨던 거 알아요. 얼른 앉으세요. 재밌는 이야기가 많아요.”

그사이 조금 그을리고 팔뚝엔 근육까지 생긴 제이디는 마치 옆 동네의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한다더라, 하는 가십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볍게 입을 열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뚝딱뚝딱 잽싸게 수프를 안쳐 놓고 그간 엉망이 된 집을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뮤리얼은 남몰래 흐뭇하게 웃으며 그런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활력 없던 집이 어느새 그녀의 열정에 점점 달구어지는 듯했다.

“남부 식생은 정말 이름처럼 풍요롭더라구요. 탐험을 해도 해도 계속 처음 보는 진귀한 약초들이 등장해서 손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아, 몸은 너무 피곤한데 재밌더라구요.”

“내 그렇다 하지 않았어.”

“듣던 것보다 더요! 사람들도 친절하고요. 세상 사람들이 다 황성민들처럼 정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이건 신세졌던 여관에서 받아 온 선물인데… 아, 이건 뮤리얼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온 두건이에요. 가만있자… 여기 있다! 이거 좀 보세요. 남부에는 예술가들이 참 많더라구요.”

제이디가 일리아노스 상단 거리에서 공수했다는 비취 장신구라든지 코끼리 조각상 같은 걸 끝도 없이 꺼내 건네며 해맑게 웃었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 밑으로 보이는 목덜미에 못 보던 그림이 있어 물으니, 일리아노스의 수도에서 만난 예술가가 새겨 줬다고 또 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피로한 몸을 의자에 앉히고 그걸 다 받아 주던 뮤리얼은 남부 향신료를 넣어 끓인 제이디표 감자 수프를 비우고, 남부 특산물이라는 무슨 꽃차까지 마셔야 했다.

수다를 마친 제이디가 목욕을 하러 들어가자 그제야 뮤리얼은 한숨 돌리며 쉴 수 있었다. 어휴, 도대체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쿨럭!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걸걸한 기침을 하던 뮤리얼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옆 탁상에 놓아둔 편지 하나를 들고 막 목욕실에서 나온 제이디를 불러 세웠다.

“아가, 편지가 도착했더구나. 그 아가씨 같던데.”

녹색 인장을 확인한 제이디가 편지를 받아 들고 황급히 뜯어 보았다.

【마침내 반란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어.】

2년간 휘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제이디는 황성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다. 혹시나 딜레앙 가문의 소식이라든지, 아카데미에 남은 사람들의 소식이 있을까 싶어 제이디는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께서 황실과 작당을 하고 계신 듯한데 나는 알 수가 없어. 그저 대학에만 충실하라고... 나 이대로면 꼼짝없이 황실 마법대행이야. 정말 끔찍해 죽겠어. 바이올린을 잡지 못한 지도 1년이 넘은 것 같아.

제이디, 무사히 지내고 있지? 여전히 황성으로 돌아오란 말은 할 수가 없어. 이제야 내전이 조금 진정되었지만, 혁명군은 사라지긴커녕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있거든.

참, 알아봐 달라고 한 거 말이야. 별다른 소식은 없어. 그런데 듣자 하니 황실이 재정 문제로 딜레앙에 혼약서를 보낸 것 같더라. 말이 혼약서지 사실상 소환서나 다름없어. 그간 중립이었던 딜레앙의 자본이 모조리 황실로 들어가면 판세가 뒤집힐지도 몰라.】

“뭐라고?”

혼약서 대목을 읽은 제이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딜레앙 백작가는 여전히 혁명군 세력이다. 그간 황실이 폭정을 펼치며 온갖 귀족 가문을 색출할 때도 귀신같이 들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혼약서라니.

정략혼으로 엮어서 재정을 끌어들일 셈이라면 굳이 딜레앙이 아니어도 재력 넘치는 가문은 차고 넘쳤다. 그러니 황실이 무언가 눈치채고 접근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리노의 부티크는 이 와중에도 완전히 잘나가고 있고, 릭시는 황립 대학에서도 학생회장 후보에 올랐어. 선발되지 않더라도 조만간 궁정으로 차출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야. 모쪼록 우리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잘 지내고 있어. 제이디 너도 늘 안전하기를 소망할게. 편할 때 회신 줘.

친애하는 친우에게, 휘노 펠리디오스】

백작님이 걱정되어 그 뒤 이어지는 내용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간 제이디도 여러모로 바빠서 편지 공책을 펼쳐 보지 않은 지 오래였다. 출장 때는 혹시 잃어버릴까 봐 여장에 챙기지도 않았고.

왜인지 마음이 급해진 제이디는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낡은 나무 계단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작은 다락에 허둥지둥 도착해 탁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는 편지 공책을 펼쳐 보았다.

【일리아노스로 향할 예정이에요. 공책은 혹시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으면 안 되니까 두고 갈 거예요. 남부에는 소매치기가 많다고 들어서요.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건강하시길 바라요.】

【일리아노스의 바다를 보면서 마시는 칵테일 한 잔이 그리워지는군요. 그대의 안녕을 빕니다. 모리스 딜레앙.】

마지막 대화 이후로 이어진 편지는 없었다.

1년쯤 전.

【살아 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도 쭉 살아 계셔 주세요. 그저 점 하나라도 좋으니까... 백작님의 무사를 알고 싶어요.】

제이디가 뮤리얼과의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그 말을 끝으로 끊겼던 편지에 뒤늦은 답장이 왔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탈로스의 저택을 떠났다 들었습니다.】

【백작님?】

그렇게 뜬금없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편지는 다시 이어졌다. 백작은 자신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제이디의 소재와 안녕만을 궁금해했다. 제이디는 ‘정보의 불균형’을 이유로 소재를 알려 주지 않았지만, 이미 헤르만에게 보냈던 안부 서신이 있어 백작이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후로 이어진 대화는 그저 소소하고 재미없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제이디는 어째서 자신이 ‘정보의 불균형’이라는 발칙한 말까지 하며 백작에게 가시를 세우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항상 본인의 안전이나 근황은 절대 말해 주지 않는 그가 얄미웠고, 무사를 알려 달라는 자신의 간절한 편지를 매정하게 1년간이나 무시한 것도 미웠다.

‘왜?’

왜, 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그런 모호한 감정이었다.

그의 실체는 갑작스레 맞닥뜨렸다가 제가 겨우 목숨을 구해 준 남자도, 또 갑작스레 무도회에 들이닥친 신사도 아니었다. 그저 ‘무엇도 묻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걸고 억만금의 후원을 해 준 후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의 친우도 아니요, 정인은 더더욱이 아니었다. 그가 제게 사생활을 알려 줄 이유나 의무는 전혀 없었다.

이 관계의 유일한 문제는 제이디 본인이 그의 존재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제이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이디의 손은 이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황실과 혼약을 맺으시나요?】

그냥. 그냥, 궁금했을 뿐이라고. 그저 그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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