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화, 황실 번개 마법사만큼의 위력, 위력이야…!”
“어, 어둠 마법 교수님의 소환물이야. 그 소환이 푸, 풀릴 정도면… 말도 아, 아, 안 되게 강력했다는 거라구…!”
인문학부 만년 수석. 한때 저도 모르게 혁명의 상징이 되었던 그 아이.
수상하지만, 수석이라고 해 봤자 마력이 없으면 아무 짝에도 힘이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접근했었다. 하지만 그때 본 그 아이의 능력은 학부생에게서 나올 만한 게 아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위력을 그만큼 증폭하는 사례는 본 적 없었다. 궁정에서 본 고위 학자들도 그건 못 했다.
천재. 혹은 이단.
운 좋게 고위 귀족의 수혜자가 되어 재력까지 얻었으니, 그런 아이가 혁명군의 편에 선다면 가까운 미래에 꽤나 피곤해질지도 몰랐다.
“고마워, 리사. 넌 분명 위대한 전략가가 될 거야.”
하지만 반대로 내 편에 선다면? 긴밀한 전력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빌어먹을 자비에르를 죽일 수만 있다면 천재든 이단이든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황제의 ‘화원’과 가까운 곳에 추락했을 때 아멜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증거가 될 만한 기록용 마력구를 파괴하고, 목격자들의 기억을 교란했다. 명분을 만들었으니 당장에 제이디를 납치해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멍청한 오라버니가 일을 그르쳐서 최종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다. 납치를 하랬더니 제국군을 보내 일을 키우다니…. 렉시드가 영리하지 않은 건 알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파괴적인 방식을 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부전자전이었다.
제이디 헤이스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건 벌써 그 아이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고, 그건 그 아이의 후원 가문이 유력했다.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빠른 정보력이.’
혁명군은 도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을까. 몇 년 사이 혁명군의 세력과 기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비에르는 보수적 학살을 택했지만, 아멜리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육체를 죽이기만 한다고 이미 태동한 정신이 뒤바뀔까? 모름지기 대업을 이루고 황실의 명예까지 지키려면 손잡을 때도 알아야 하는 법.
아멜리아의 목적은 하나였다. 자신과 리안의 어머니인 1황비를 차별하고 보호해 주지 않았던 자비에르를 끌어내리고 꼭두각시 1황자를 앉히는 것. 그리하여 혁명군과 타협한 뒤 어머니가 꿈꾸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수장을 찾아야 한다.’
실무는 1황자가. 공은 나에게.
그것이 가장 빨리 목적 달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 * *
대륙 서부 델로이 지방.
팔라라 숲 깊은 어딘가, 백발의 마녀 뮤리얼 웨버의 집.
그곳에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소매를 잔뜩 걷어붙이고 커다란 바구니를 든 제이디 헤이스터가 낑낑거리며 냇가로 다가가 빨래를 시작했다.
“남의 옷 빠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보육원에서 지내던 시절 이후로 다른 사람의 옷을 빨아 본 적은 없었다. 빨래를 마치고 탈탈 털어 빨랫줄에 모두 널고 보니 아침 해가 쨍하니 떠올라 아름다운 숲속 집을 비추고 있었다.
손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제이디는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에 활짝 웃었다. 하지만 곧 들려온 호통에 활짝 웃는 얼굴은 그 상태 그대로 와장창 깨져 버렸다.
“해가 중천인데 식사 준비는 하지 않고!”
“예, 예. 갑니다아.”
“누굴 닮아 저리 느려 터졌는지, 원.”
느리다니! 해가 중천도 아니거니와. 새벽부터 나와서 빨래한 건 보이지도 않는 거냐고? 제이디는 속으로 이를 벅벅 갈았지만, 별수 없음을 알기에 그저 한숨만 폭 내쉬었다.
“한 달의 시간을 주마.”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좋아하기엔 일러. 그 한 달을 버티지 못하면 피도 눈물도 없다.”
처음 이 집에 도착한 날, 뮤리얼이 내쫓듯이 휘두르는 빗자루를 피하며 문전박대당한 제이디가 선택한 건 노상이었다. 아무리 냉혈한이어도 1개월이란 시간을 들여 산 넘고 물 건너 등반까지 해 도착한 사람을 하루 만에 내쫓을 순 없겠지.
…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짤막한 키, 까무잡잡한 피부와 한 올도 남김없이 새하얗게 센 부스스한 머리. 동방의 원단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두건과 치렁치렁한 옷가지. 거기에 자그마한 금테 안경을 걸치고 담뱃대를 뻐끔거리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이질적인 ‘마녀’ 뮤리얼 웨버.
그녀는 말 그대로 미친 마귀할멈이었다. 일주일간 밖에서 농성하듯 버티는 제이디를 보고도 물 한 잔 건네지 않은 채 철저히 무시를 했고. 결국 이러다 죽겠다 싶어 포기하려던 때, 그제야 밖으로 나와 거래를 제안했다.
한 달간 이 집을 살 만하게 가꾸고 온갖 집안일과 허드렛일을 해 주면 그때 네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고. 그 전에는 무엇도 들어 주지 않겠다고.
집 꾸미기야 오두막 재건 이력이 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재료 수급은 힘들었어도 기본적인 자재와 도구는 구비돼 있어 구색은 맞췄다. 인근 해안가까지 걸어가 생선도 잡았다. 도료가 있었다면 울타리와 벽에 그림이라도 그려 줬을 텐데 그건 못 했다. 집안일과 허드렛일도 눈에 띌 때마다 다 건드려서 해결했더니, 일주일 만에 뮤리얼의 집은 활기를 되찾았다.
혼자 살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포함해 기본적인 인적 사항조차 몰랐지만, 제이디는 뮤리얼 웨버가 이토록 꼬장꼬장하게 구는 데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도 ‘마녀’이기 때문에.
아무튼, 2주가 지나자 뮤리얼은 직접 요리를 하겠다면 따뜻한 식사도 하게끔 부엌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제이디는 그때부터 마른 빵과 열매만 먹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다음 날에는 기본적인 식료품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밀가루라든지 향신료라든지 이것저것 요리에 필요한 것들을 배달해 주고 갔다. 요리는 잘하지 못했지만 제이디는 살기 위해서라도 창의력을 발휘해 이것저것 만들기를 시도했다.
“…이건 무어냐?”
“묽은 밀가루 반죽에 허브와 향신료를 넣어 부친 것과 설탕을 녹여 쿠키 틀에 굳혀 만든 디저트예요.”
“도시에서는 참으로 요상한 것을 먹는구나.”
“도시 사람 중 이런 걸 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만든 게냐?”
“…창의력을 발휘해서?”
“요리도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 생활을 버티려 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쫓아내실 거잖아요…!”
제이디가 얼굴이 벌게져서 발끈하거나 말거나 뮤리얼은 괴상한 요리들을 먹기 시작했다. 모양은 어디서도 본 적 없었으나 맛이 이상하지는 않은지 뮤리얼은 저번처럼 인상을 쓰며 음식을 뱉어 내지는 않았다. 설탕 쿠키를 먹었을 때는 의외라는 듯 자그마한 탄성을 내기도 했는데, 제이디는 이를 놓치지 않고 ‘단것을 좋아함’이라 메모했다.
3주 차가 되자 뮤리얼 웨버는 슬슬 성질을 죽이고 제이디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꽤나 성실하고 착실했으나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성향은 ‘근성’이었다.
이 아이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로건이 보낸 녀석이니 아카데미 출신일 테고, 곱상하고 여린 것이 딱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여식인 듯했는데 아무리 험한 일을 시켜도 묵묵히 해냈다. 벽난로까지 정비하고 수리할 때는 세상에, 놀란 탄성을 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뭔가 점점 점수를 따고 있는 건가 싶을 때쯤, 마침내 약속했던 4주가 지났다.
이윽고 두 사람의 첫 면담이었다. 뮤리얼은 손가락 사이에 담뱃대를 끼우고 삐딱한 자세로 제이디를 흘겨보았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래…. 네놈은 대체 누구냐?”
첫 질문부터 벙찌고 말았다. 그러니까… 로건 교수님께 아무 언질도 받지 못하신 건가.
하긴 서신이 올 만한 곳이 전혀 아니긴 했다. 제이디는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로건 교수님과의 관계를 전달했다. 고아, 제국군, 아카데미, 후원 등이 핵심이었다.
한번 터진 이야기보따리는 멈출 줄 모르고 줄줄 새어 나왔다. 뮤리얼은 속세를 떠나 있던 때 황성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제이디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황실 놈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하기야.”
“그렇게 1차 시가전이 있고 나서 의료 봉사를 나가 팔이 감염된 환자를 발견했는데, 신성 마법사를 구할 돈을 마련하지 못한다길래 결국 절단술을 했어요.”
“…뭐라고 했느냐?”
“로건 교수님과 의료 봉사를 다녔… 헉.”
제이디는 순간 비유적 의미의 마귀할멈이 아닌, 진짜 마귀를 보는 줄 알았다. 삽시에 얼굴이 일그러진 그녀가 탁상을 탕 치며 화를 냈다. 낡은 탁상이 삐거덕거리며 힘겨워했다.
“로거언!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황실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수도에서 뭔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닌 게야! 심지어 마녀재판도 해 본 녀석이! 이때까지 체포되지 않았다니 대지의 신께 큰절을 바쳐야 할 판이다!”
“로건 교수님이 마녀재판을 받으셨다고요?!”
“내 이놈을 용서치 않겠어! 여기까지 피해가 올 가능성은 추호도 만들지 말라 했거늘!”
“지, 지, 진정하세요! 전 로, 로건 교수님이 아니라구요…!”
어째 발끈하는 뮤리얼 앞에만 있으면 말더듬이 클라리사 뉴트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로건 교수님의 히스테리와 염세주의는 이분으로부터 비롯된 게 틀림없었다.
조금 진정한 뮤리얼 앞에서 제이디는 딜레앙 백작과 헐리 무니 그리고 졸업 무도회 폭격 이야기까지 전했다.
“이상하구나. 좋은 환경을 내버리고 아무 확신도 없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당최 무어냐?”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얼 말이냐.”
“‘베르딘 약초 사전’이요.”
싸한 정적이 일었다. 잠시 말이 없던 뮤리얼이 담뱃대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직접 만들거라. 난 이제 위험해지는 건 딱 질색이거든.”
“…….”
도제 신청에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제이디는 크게 실망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쉽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한 번 거절당했다고 돌아갈 거였으면 한 달간 버티지도 않았다.
“실망했느냐?”
“아니요.”
제이디는 특유의 냉철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어딘가로 향했다. 구석에 놓여 있던 가방을 가져온 제이디는 그 안에서 낡고 붉은 책 한 권을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책의 표지를 확인한 뮤리얼의 눈이 커다래졌다.
“……!”
이 책은 제이디가 헬렌의 오두막에서 마지막으로 가지고 나온 책이었다. 가로로 누운 여인의 형상, 대지의 신 ‘할라’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책. 책의 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누군가의 이니셜이 금장으로 새겨져 있었다.
【베르딘 민간 의술 총서】
【M. W.】
금서로 지정되어 모두 불태워졌으나, 저자가 목숨 걸고 빼돌린 단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이 지금 그 저자의 눈앞에 놓였다. 먼 옛날 잃어버린 제자에게 전수했던 그 책이.
저자 뮤리얼 웨버. 그녀가 신뢰한 단 한 명의 제자, 헬렌. 그리고…
“너, 헬렌의 딸이구나.”
그녀의 딸, 제이디 헤이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