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34)화 (35/116)

【1차 록펠라 광장 시가전 이후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있었어. 혁명군이 아닌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말이야. 황성에 거주하는 귀족들과 평민들은 무자비한 황제를 타도하자며 분노했고, 혁명군이 포로 해방 작전을 펼치고 있어. 총성이 마를 날 없는 나날이야.】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단순히 혁명군을 표적하는 사건이 아니었다니. 황실이 잔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더 악독하게 변모할 줄이야.

【다행스럽게도 무도회 당일 벌어진 총격전에서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어. 사람들이 대피한 뒤 수세에 몰린 제국군이 금방 철수했거든. 네가 걱정한 모든 사람이 무사하고, 대다수가 황성을 떠나 피해 있을 계획인 것 같아. 아카데미 운영도 당분간 멈출 것 같고, 황립 대학도 입학시험 일정을 미뤘어.

제이디, 소강상태가 되기 전에는 절대 황성에 돌아와선 안 돼. 이곳은 이미 전쟁터야. 나 역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한쪽 편에 서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하겠지만. 제이디, 난 정말 모르겠어. 모든 게 이상해. 언젠가 네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 같아.

한동안 남향하지 말고 안전하게 그곳에 머물길 바라. 너한테 든든한 후견인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야. 언젠가 아늑한 네 다락방에서 다시 재회할 날이 오기를.

사랑하는 친우에게, 휘노 펠리디오스.】

제이디는 휘노의 서신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로건 교수님의 회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걱정하던 모든 이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한시름 놓았다. 다만 편지를 읽으며 지금 상황에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이틀 후, 로건 교수님의 회신도 도착했다. 대체로 휘노의 편지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조금 더 히스테릭한 필체로 나열돼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흐린 눈으로 일부 욕설과 비관, 그리고 욕설과 비관을 읽어 내려가던 제이디는 뒷장으로 넘어갔다.

【아카데미가 운영을 멈추었으니 내가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들었던 대로 네가 돌아올 곳을 지키고 있으마. 그러고 보면 네 녀석과의 첫 만남이 생각나는군. 다짜고짜 ‘날 가르치세요.’라니. 기억하니? 어디서 또 그런 당돌한 녀석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말이야.

아, 모쪼록 연구를 이어 가고 싶거든 동봉한 곳으로 찾아가 보렴. 한때나마 내가 신세졌던 스승이 있어. 마티스와도 그 노인네를 통해 만난 거니, ‘마녀’로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아닌 그 노인네가 더 도움을 줄 거다. 웬 졸부 가문의 수혜자가 되었다니 한시름 놓고 있으마.

당분간 황성에는 얼씬도 하지 마. 하지만 언제든 연구실로 찾아오면 내가 있을 거야. 졸업을 축하한다.

미래를 비출 찬란한 등불에게, 로건 리베르.】

뭐랄까. 벌써부터 그리움이 밀려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로 제이디는 한동안 편지지를 꼭 안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로건 교수님께는 감사한 일뿐이다.

그나저나 동봉한 곳이라니? 편지 봉투를 벌려 털자 어느 주소지가 적힌 자그마한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머릿속에 대강 지도를 그려 보니 북서부 헤이스트를 지나 팔라라 숲을 끼고 조금 더 깊은 서쪽의 해안가로 들어가야만 했다.

혼자 찾아가기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불친절한 약도로만 이루어져 있던 헐리 무니 씨의 주소가 훨씬 친절해 보였다.

주소 밑에는 그곳의 거주자로 보이는 이름 하나가 쓰여 있었다.

【뮤리얼 웨버】

“뮤리얼… 웨버?”

제이디의 얼굴에 심상하지 않은 빛이 어렸다.

‘뮤리얼 웨버’라는 분은 단언컨대 ‘마녀’일 게 분명하니 헤르만 경이라든가 맥 칼리스토 경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좀 그랬다. 이미 다들 자신이 ‘마녀’인 것을 아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마녀의 거취를 공개하는 건 그 마녀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혼자 짐을 이고 가야 하나….’

며칠 정도 더 고민하던 제이디는 곧 결론을 내렸다. 언제까지 딜레앙 저택에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황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두 극구 반대하였으니. 지금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약초 연구를 이어 가는 것뿐인데, 그 실마리가 이 ‘뮤리얼 웨버’라는 사람이었다.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

거기다 로건 교수님뿐 아니라 우리 두 사람에게 약초를 공급해 주던 마티스 씨까지 신세를 졌던 ‘마녀’라니… 스승의 스승인 셈이었다. 혹여 들키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는 일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공간에서, 스승의 스승께 학문을 전수받을 기회였다.

어쩌면 이것이 곧 로건 교수님의 졸업 선물인 듯해, 제이디는 결심할 수 있었다.

“서부 델로이로 떠날까 해요.”

“자택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뇨. 저를 가르쳐 줄 스승님을 찾으러요.”

“…….”

오후 티타임, 제이디는 차를 한 잔씩 사이에 두고 헤르만 경에게 일렀다.

“안전한 길이 맞습니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황성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해요.”

“그렇군요. 여정에는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까요?”

“그것도 확실히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실은…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로건 교수님의 편지를 받고 며칠간 고민하며 세운 계획이 있었다. 나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으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떠오른 계획이었다.

“만들고 싶으신 거라면.”

“사전이요.”

“어떤…?”

“베르딘 제국에 남아 있는 모든 약초를 집대성한, ‘베르딘 약초 사전’.”

“…….”

헤르만의 눈이 미세하게 크게 뜨였다. 말이 없는 상대방의 모습에 조금 겸연쩍어진 제이디가 설명을 덧붙였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고 했던 제 말을 기억하실까요?”

“그랬던 적이 있으셨지요.”

“제게도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있지 않냐고 하셨잖아요.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저는… 제 연구로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싶어요. 신성 마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게 제가 바라는 이상인 것 같아요.”

차를 한 모금 마신 제이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딜레앙의 수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내고 싶어요.”

“…결정이 확고한 듯하니 가타부타 말을 얹지는 않겠습니다.”

“허락해 주시는 걸까요?”

“처음부터 제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헤르만이 오리발을 빼듯 눈을 돌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완고하고 보수적이지만 그새 정이 들었나, 계속 보다 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는 관리인이었다. 제이디의 맑은 웃음소리가 차향과 어우러져 티 테이블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리하여 며칠간 여장을 꾸린 제이디는 마침내 여행길에 올랐다. 딜레앙 제1저택의 정문 앞으로 사용인이 줄을 지어 제이디를 배웅했다. 가까이 다가온 헤르만이 빠진 물건은 없는지 꼼꼼하게 챙기며 잔소리를 늘어놓자 제이디가 질린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뜬 헤르만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흠, 한숨을 내쉬었다.

“여장이 너무 빈약합니다.”

“산을 타고 강을 넘고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여장이 화려하면 어떡해요.”

“그래도 부실합니다.”

“아이, 참. 정말 됐다니까요.”

“…….”

연갈색 눈썹을 축 늘어뜨린 헤르만이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그 모습에 제이디는 또 까르르,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맥 씨, 헤르만 경을 잘 부탁해요.”

“제가 말입니까?”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제 말이 맞다니까요.”

아하하, 웃음소리를 여운처럼 남기며 제이디가 마침내 마차에 탑승했다. 급기야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낼 기세인 헤르만이 흠흠, 헛기침하며 체통을 되찾고 차분하게 묵례했다.

마차가 저택을 떠나 점처럼 보일 즈음, 맥 칼리스토가 위로하듯 헤르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정말 강한 아가씨로군요.”

“예. 미래가 기대됩니다.”

“크흠. 이만 들어가시지요.”

“아닙니다. 조금만 더… 지켜보겠습니다.”

“…그럼 저도.”

아무래도 제이디와 정이 든 사람은 헤르만뿐만이 아닌 듯했다.

*  *  *

【저는 제가 나고 자란 땅을 너머 서부 델로이의 깊은 숲으로 떠나는 여정에 올랐어요. 백작님, 그날 이후 무사하신지 궁금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을게요. 백작님과 혁명군의 관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제가 적대해야 할 집단이 어느 쪽인지, 그리고 제가 잊지 말아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 오직 그것뿐이랍니다.

살아 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도 쭉 살아 계셔 주세요. 그저 점 하나라도 좋으니까... 백작님의 무사를 알고 싶어요.】

팔라라 숲은 코카루니아 숲을 지나서도 서쪽으로 조금 더 가야만 발을 들일 수 있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사실상 로건 교수님의 쪽지가 아니었다면 존재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깊은 지역에 위치했다.

제이디는 길을 물어 물어 찾은 작은 마을의 여관에서 허기진 배를 수프 한 접시로 채우고 한동안 펼치지 않았던 편지 공책에 안부를 남겼다. 공책은 무도회 날 이후로 갱신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휘노와 로건 교수님이 입을 모아 황성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한 만큼, 지금쯤 백작님도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고위 귀족이고, 그만큼 황실과 가까웠을 것이기에 베르딘 황실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를 보다 가까이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가진 재력과 권력으로 혁명군의 편에 서게 된 것이라 해도 이해 못 할 게 아니었다.

그날, 1차 시가전 당시 해독초를 잘못 처방해 죽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살아 있었고, 혁명군의 주요 세력이며, 심지어 저를 후원한 딜레앙 백작이었다는 것은 제이디에게 형용 못 할 고무감을 주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운명처럼 제이디가 딜레앙 백작에게 더욱 의지하도록 했다.

어쩌면 해독초가 사실은 정말 그를 살렸고, 그가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겨 저를 후원하기 시작했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랬기에 저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고 생명을 살리는 마법이 깃든 손목시계도 선물해 준 것이다.

편지 공책을 덮은 제이디는 로건의 편지를 다시 한번 펼쳐 보았다. 이곳 팔라라 숲까지 오는 데만도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북부 탈로스에서 북서부 헤이스트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 걷기도 많이 걸었고 작고 불편한 마차도 많이 탔다.

자그마치 한 달이라는 시간과 적지 않은 경비를 들여 제이디는 마침내 스승의 스승이라는 ‘뮤리얼 웨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제이디가 기대한 멋진 ‘마녀’의 따스한 환대가 아니었다.

방문객의 노크에 벌컥 나무 문을 열어젖히고 제이디의 꼬질꼬질한 행색을 확인한 뮤리얼은 한숨을 폭 쉬고는 다그치듯 말했다.

“로건 그 녀석이 귀찮은 짓을 저질렀구나.”

“…네?”

“그 비쩍 곯은 몸으로 용케도 찾아왔군. 안타깝지만 받아 줄 순 없어. 돌아가거라.”

“자, 잠깐만요! 뮤리얼 웨버 님 아니세요? 전 제이디 헤,”

“어디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게냐? 썩 꺼져! 훠이!”

“으앗!”

제이디 헤이스터, ‘백발의 마녀’ 뮤리얼 웨버를 만나다.

그 시작은 생각과는 180도 달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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