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31)화 (32/116)

황성 북부, 혁명군 포로수용소.

철그럭, 끼익….

철창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제3수용소 안, 쪽방 같은 감옥에 웅크려 있던 데보라 라빈스키가 더러워진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윽….”

“똑바로 안 걸어?”

간수가 뭉그적거리는 데보라의 등을 매몰차게 떠밀었다. 아직 다친 몸이 낫질 않아서 걷는 게 힘들었다. 지금 향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더욱이 후들거리는 몸이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철창이 열리고, 사람이 끌려가면, 그 뒤에는 반드시 고통에 찬 비명이 뒤따르곤 했다. 마침내 제 차례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데보라에게 물리적 고통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찢어질 듯 아픈 마음에 비하면야. 쑥대밭이 된 광장 한복판에 두고 온 아들, 투산의 모습이 눈앞에 계속 어른거렸지만, 이들에게 아들의 신변을 알려 달라 요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고문실에 당도해 무릎 꿇린 데보라는 찌익, 해진 옷감이 뜯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간수는 데보라의 몸에 ‘붉은 기’ 표식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눈앞에 앉은 사내에게 묵례했다. 그늘진 어둠이 내려앉아 있어 혼미한 데보라의 눈에는 희미한 형태만 감돌았다.

곧 어둠속에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바닥만 한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 아래로 다가왔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데보라가 마주한 건, 핏빛을 머금은 붉은 눈동자였다.

약 1시간 뒤, 고문실을 나와 다시 감옥에 갇힌 데보라는 혼이 빠진 얼굴로 끝도 없이 떨었다. 방금 자신을 협박하고 고문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악마인지….

“투산….”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석조 건물 철창 안에선 독한 화약 냄새와 비명이 마르지 않았다.

혁명군이 아닌 것을 확인한 뒤에도 이유 없는 고문은 몇 차례 더 이어졌고, 데보라는 아들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 숨이 끊어지게 된다면 죽기 전에 투산에게 반드시 전할 말이 있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날 거라고.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엄마가 영영 사라지더라도 부디 조금만 슬퍼하기로 약속하라고.

이곳은 존재해서는 안 될 장소였으며 이곳에서 행해지는 행위는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신성신이 인도하는 위대한 광휘의 베르딘 제국? 지금 현재, 우린 모두 악마가 그리는 지옥도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데보라는 결심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것을 세상에 전해야 했다. 세상이 설령 믿지 않아도, 우호적이지 않다 해도.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었다.

*  *  *

“비둘기가 마지막 먹이를 물어 왔군요.”

최후의 비밀 수용소 위치를 확인한 혁명군의 작전 지도가 완성되었다.

혁명군 제1간부 아놀드 막시무스가 경고했던 대로, 황실은 대대적인 혁명군 색출 작업에 들어갔다. 한 명의 혁명군을 색출하기 위해 아홉 명의 무고한 제국민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하루빨리 포로수용소를 습격해 죄 없는 제국민과 동료들을 해방해야 했다. 리안이 지휘하는 혁명군 행정부는 군사 전략을 짜고 무기를 확보한 뒤 황성 각 지부에 집결 명령서를 전달했다.

“제2수용소 쪽에서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수용소 인근에서의 게릴라전을 앞둔 날, 안타까운 소식 하나가 리안에게 전해졌다. 안치실에서 빼돌린 희생자들의 신변을 확인하고 부검하던 이가 보내온 보고서였다.

“희생된 포로 한 명의 신체에….”

“…….”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을 전달하고자 했던 포로 한 명이 스스로의 허벅지와 배를 종이 삼아 날카로운 무언가로 짧은 단어들을 새겼다.

【투산 라빈스키 8세】

【비명 총성 고문 협박 폭행】

“록펠라 시장 거리의 상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들인 투산 라빈스키는 록산느 보육원에서 거두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어.”

붉은 기 표식이 확인되지 않은 걸 보면 무고한 제국민이었을 터. 록산느 보육원에서 만난 그 어린 소년은 결국 어머니를 잃었다.

모든 희생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리안 베르딘이 수차례 시간을 되돌리며 깨우친 법칙이었다. 매 순간 사사로운 인정과 작은 희생 하나하나에 얽매이던 것도 옛날 일이다.

“리안. 역사의 진보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단다. 잊지 말렴. 모든 영혼을 구제할 순 없어. 그러니 적절한 영혼을 선택해야 한다. 시대의 전복에 일조할 유용한 도구가 될 영혼을.”

그것이 회중시계를 물려준 어머니, 1황비의 유언이었으며, 자신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과업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번 우주의 ‘단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지금은 시간을 돌릴 때가 아니었다. 희생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보고서에 담긴 증거로 선전물을 준비해요. 제국군의 비둘기가 전한 정보는 검증되었습니까?”

“확실합니다.”

포로 해방 작전이 예정된 날, 황실은 2차 록펠라 광장 시가전을 개시할 계획이었다. 일자는 이달 말. 황립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 날 밤이었다. 황성 내 많은 귀족이 아카데미 홀에 모인 시간, 미래의 등불들이 마침내 개화하는 그 밤, 광장에는 또 한 번의 불꽃이 타오를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지나면 더 이상의 평화는 없을 것이다.

*  *  *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무도회장 정문으로 들어섰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 과하지 않으면서도 생기 넘치는 화장과 유려하게 드러난 선이 고운 어깨. 그리고 화려하게 치장한 이들로 가득한 홀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최고급 드레스.

이제는 소녀가 아닌 여인 제이디 헤이스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몰려드는 시선들을 감내했다.

【일이 바빠 소식이 늦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길. 모리스 딜레앙.】

구구절절 중얼거린 혼잣말 같은 편지에 달린 답치고는 짧았다. 정말로 바쁜 게 맞는지 어떻게 지내시냐는 물음에 대한 답도 없었지만, 이마저도 제이디에게는 충분했다.

후견인의 선물 상자를 열어 본 제이디는 곧바로 드레스를 입고, 함께 전달된 구두에 올랐다. 창틀에 기대앉아 자신과는 먼 세계인 양 무도회장을 구경하지 않아도 됐다. 소중한 친구들, 교수님들과 함께 아름답게 빛나는 마지막 추억을 장식할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 홀 중앙에 들어선 제이디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크리스털 장식물 사이 높다랗게 세워진 샴페인 탑이었다. 황금빛 샹들리에, 가지각색의 핑거푸드와 디저트가 놓인 단상. 그리고 아카데미 문장이 새겨진 푸른 휘장이 높지막한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 열주 사이사이에 저마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개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제이디가 알지 못하는 귀족이었다.

거대한 조각상으로 꾸며진 중앙 단상 위에서 심각한 얼굴로 멋드러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휘노가 가까이 다가온 제이디를 알아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곧 교대 시간이 되자 누구보다 빨리 악기를 팽개치고 내려온 휘노가 제이디에게 달려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고, 네 드레스는 갑자기 릭시가 입고 있고! 정말 걱정했단 말이야…!”

“사정이 좀 있었어.”

자초지종 설명을 전하고, 제이디는 휘노와 함께 샴페인을 들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현재를 즐겼다.

릭시가 제이디의 드레스를 입고 완벽하게 연설을 마치자 그녀를 망치려 했던 첼리나 일당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씩씩거렸다는 이야기, 첫 춤 시간에 더할 나위 없는 춤과 스텝으로 이목을 끈 리노 이야기, 일로이 헌트가 재수 없는 라히크 교수의 가발을 조금 더 치밀하고 섬세해진 마법으로 벗기고 발뺌했다는 이야기, 첼시 교수님이 로건 교수님과 파트너로 춤을 췄다는 이야기 등.

그 짧은 사이 놓친 이야기들을 모조리 전해 들은 제이디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시들지 않았다.

“오늘 정말 예쁘다, 제이디.”

“저, 저 멀리서 네 모습밖에 아, 안 보였어…!”

중간에 합류한 클라리사까지 함께 셋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 이윽고 다시 휘노의 교대 시간이 다가왔고, 클라리사는 제이디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진학 관련해 교수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갑자기 사라졌다.

높은 구두를 신은 탓에 발목이 아파 오자 제이디는 잠시 홀 중앙부에서 외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려한 휘장을 젖히고 유리문을 열면 밤바람을 맞으며 쉴 만한 테라스가 있었으나, 대개 함부로 열었다간 동급생들의 그렇고 그런 스캔들을 목격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정보를 들은 바 있어 관두었다. 자칫 운 나쁘면 교수님들 사이의 그렇고 그런 스캔들까지 맞닥뜨릴지 모른다.

그래서 제이디가 선택한 장소는 홀 복도에 마련된 휴게실이었다. 빈 휴게실을 발견해 들어가자 은은한 주광빛 마력구로 아늑하게 밝혀진 실내에 폭신한 카우치와 담요가 놓여 있었다. 아픈 발을 풀 수 있게 발 받침용 쿠션도 러그 위에 자리했다.

잠시 카우치에 앉아 쉬던 제이디는 어디선가 들리는 바스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휴게실 안쪽에 마련된 자그마한 곁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군가 먼저 들어와 환복을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얼른 나가야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기척이 아니었다.

“읏….”

“하아… 잠깐….”

분명 훔쳐보거나 엿들을 의도는 아니었다. 결단코, 전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금 후에 일어날 사태에 대하여 제이디의 책임은 전혀 없었다. 물론 당사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밖으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카우치에서 일어나 구두에 발을 꿰던 제이디는, 곁방 안 누군가가 잘못 건드린 문이 스륵… 열리는 순간, 자세 그대로 빳빳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건장한 체격의 두 남성. 보드라운 연보랏빛 머리칼. 상기된 수려한 얼굴과 붉게 피어오른 입술….

“리노?”

“……!”

그러니까, 이건 그저 해프닝일 뿐이었다.

*  *  *

남자였다.

물론 편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제이디가 그 상황에서 그저 멍해 있다가 도망치듯 후다닥 휴게실을 벗어났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리노가 이름 모를 누군가와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어서였다. 즉 제이디가 충격받은 지점은 ‘남성’이 아니라 ‘키스’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리노에게 정인이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춤과 예술, 화술에 뛰어난 사교계의 꽃 슈펜하이어의 도련님이다. 눈부신 외모와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리노니까 당연히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화아악. 제이디의 귓불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적극적인 키스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본 건 말 그대로 난생처음이어서.

“오해하겠지….”

혹시나 내가 편견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너무나 소중한 친구이니 리노가 행복하다면 그게 어떤 일이든 제이디는 그를 마음 깊이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었다. 리노 본인이 제 마음을 오해해서 먼저 거리를 두지만 않는다면.

고뇌가 점점 깊어져 갔다. 손에 든 샴페인을 홀짝홀짝 세 잔째 비울 즈음에는 다시 휴게실로 돌아가서 오해를 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제이디는 언제부턴가 제 옆에 살짝 거리를 두고 서서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낯선 신사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저 사내는 아까부터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군요.”

“네?”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휴게실로 향하려던 제이디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 사내 말입니다. 아, 저기 저 사내도. 마치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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