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30)화 (31/116)

고지식해 보이는 안경은 당연히 벗어 던졌다. 장밋빛 눈동자와 어울리는 생기 있는 화장을 하고, 쇄골 라인이 돋보이도록 긴 은발 머리는 동그랗게 말아 낮게 매듭지었다. 종아리께 예쁘게 떨어지는 기장 밑으로는 색을 맞춘 구두가 어우러졌다. 색이 화려한 대신 형태를 단정하게 만들어 오히려 차분해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혈색이 도는 얼굴로 거울을 확인한 제이디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뒤를 돌아보았다.

막 치장을 마친 휘노가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제이디를 응시하고 있었다. 휘노는 윤기 나는 금발과 청록색 눈에 어울리는 진녹색 공단 드레스를 골랐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머메이드라인에 작은 녹색 리본이 달린 힐로 포인트를 주었다. 목과 어깨에는 정교한 무늬의 금장식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그 덕에 평소처럼 경쾌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숙한 느낌이 들어 색달랐다.

“완벽해.”

“누가 할 소릴.”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길 잠시. 휘노가 환하게 웃으며 제이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색색의 마력구가 밝힌 따스한 저녁. 무도회라는 특별한 행사가 주는 설렘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졸업생들은 저마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무도회가 열리는 아카데미 홀로 향했다.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봄밤이었다.

마침내 무도회장이 보였다. 황립 아카데미의 졸업 무도회에는 꼭 졸업생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 중심의 집단이었으므로 각 가문의 명사, 아카데미생의 부모나 친척, 형제들도 참석했고 상대방이 졸업하자마자 약혼하기를 원하는 가문에서 파트너 신청을 해 입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황성 내 사교계 행사 중 하나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맞았다.

딱히 파트너를 원하지 않는 제이디를 위해 휘노 또한 모든 파트너 신청을 거절했다. 게다가 어차피 악단에서 연주하느라 바쁠 터였으니. 펠리디오스 후작은 몹시 유감인 모양이었지만, 굳이 졸업 무도회만이 날이 아니니 막내딸의 응석을 받아 준 모양이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입장할 준비가 된 두 사람 앞으로 리노 슈펜하이어가 다가왔다. 직접 제작한 멋들어진 연미복을 차려입은 리노 또한 훨씬 성숙해 보였다.

졸업까지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서로가 성장한 것도 몰랐던 걸까. 오늘이 지나면, 다들 사회적 차원에서도 어엿한 성인이 된다.

휘노를 따라 괜스레 벅차오른 제이디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은 늘 두렵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사건들에 휘말렸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라 제이디의 자신감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괜찮다. 눈앞에는 든든한 친구들이 있고, 손목에는 언제나 나를 지켜 주는 후견인의 시계가…

“어?”

“제이디? 왜 그래?”

“어… 없어.”

“뭐가?”

댕그란 눈을 끔뻑거리며 저를 바라보는 휘노, 리노를 앞에 세워 둔 채 눈을 굴리던 제이디가 난처하게 입을 열었다.

“…손목시계.”

치장을 하느라 잠깐 풀어 둔다는 게. 그만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했나 봐.

금세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휘노가 자기들이 곁에 붙어 있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제이디는 금방이고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시험장에서 마법을 맞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 날. 그날 이후로 제이디는 시계를 차고 있지 않으면 경미한 불안 증세를 겪곤 했다. 그것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이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수순과도 같았다. 제이디는 언제 어디에서건 불시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마음 한편에 갖고 살게 됐다. 나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표현을 잘 하지 않을 뿐.

제이디는 리노에게 휘노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 뒤, 뒤돌아 다시 기숙사로 달렸다. 차마 두 사람이 붙잡을 틈도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제이디는 빼놓은 손목시계를 허둥지둥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그러다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시계를 마침내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허물어지고 말았다. 높은 구두에 발목이 꺾이는 줄도 모른 채 화장대에 기대앉은 제이디는 얼른 도로 시계를 찬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침내 불안이 가라앉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조금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복도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기숙사 방 밖으로 나간 제이디가 소란의 근원지로 향했다.

“릭시…!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학생회장이자 제이디의 친한 친구 릭시 유디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워낙에 냉정하고 매사 이성적인 아이가 울고 있으니 제이디가 놀라 가까이 다가갔다. 옆에서 릭시의 쌍둥이 남매 록시 유디아 그리고 몇몇 행정학부 아이들이 쩔쩔매며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연설을 해야 하는데, 흑, 드레스가….”

웅얼거리는 릭시의 말에 제이디는 그녀의 무릎에 놓인 천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릭시의 남색 머리와 어울리는 은색 드레스에 웬 시커먼 구정물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이게 뭐야? 드레스가 왜 이래?”

“미친 첼리나 패거리 짓이야.”

행정학부 아이 중 하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후. 원래가 제정신 아닌 애잖아. 그런데 오늘처럼 중요한 날까지 이렇게 훼방을 놓을 줄은….”

“일부러 망가뜨렸다는 거야?”

첼리나라면 4학년 중에서 아주 못되기로 유명한 여자애였다. 특히나 릭시에게 강한 열등감을 품고 4년 내내 그녀를 시기하며 보냈다. 그러다 기어코 일을 친 모양이었다.

“그 계집애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러? 졸업식 앞두고 징계라도 받을 셈이냐고!”

“흑, 어머니가 오신다고 하셨는데, 이런 행색으로 어떻게 가…!”

대신하여 방방 뛰는 제이디 앞에서 릭시는 급기야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유디아가는 그리 지위가 높진 못했으나 나름대로 명망 있는 마법 행정 가문이었다. 쌍둥이의 어머니 유디아 부인은 황성 내 영향력 있는 여성 정치인으로 꼽힐 정도였다.

제이디도 아카데미 생활을 하며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그녀 또한 쌍둥이들처럼 흑발에 가까운 남색 머리에 차가운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쌍둥이들은 그녀 앞에 서면 늘 두 손을 곱게 모으고 푹 고개를 숙인 채 깍듯하게 예를 다했다. 유디아 부인은 친모임에도 그들을 시린 눈으로 쳐다보며 딱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졸업까지, 문제없으리라 믿겠다.”

“예, 어머니.”

“…네.”

그녀가 말한 ‘문제없음’에는 수석 졸업, 대학 입학뿐만 아니라 흠잡을 데 없는 학생회장 활동까지 포함되어 있었을 터.

우아하게 위로 올려 말아 묶은 릭시의 남색 머리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아무리 질시나 모함을 당해도 꿋꿋하게 되로 돌려주며 되갚던 릭시도 어머니의 참석 소식 앞에서는 온몸을 파들거리며 두려워했다.

“리노한테 여분의 드레스가 있는지 물어볼게.”

“없을 거야…. 수량을 딱 맞추는 데만도 굉장히 빠듯했다고 했거든.”

“아니면 지금이라도 광장으로 나가서….”

“연설까지, 흑, 고작 30분도 안 남았는데, 어, 어떡해…. 제이디, 나 어떡해…!”

그야말로 공황 상태에 빠진 릭시를 앞에 두고 제이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후…. 해결할 방법이.

그때, 문득 돌아본 거울에 제 모습이 비쳤다.

“…….”

오늘 릭시가 무도회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유디아 부인은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스꽝스럽게 망가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 건 더더욱이 용납하지 못할 테고.

하지만 밋밋하고 평범한 옷은 모두가 가장 화려하게 치장하고 참석하는 졸업 무도회에서 결코 돋보이지 못할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문제였다.

그러니 방법이 없었다.

“내 드레스를 입어.”

동급으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는 수밖에.

“…뭐?”

“너랑 나, 체형이 거의 비슷하잖아. 분명 너한테도 잘 맞을 거야.”

“그럴 수는…. 제이디 넌 어떡하려고!”

“지금 내 걱정 할 때가 아니야. 시간 없어! 화장은… 드레스랑 어울리게 입술 색만 바꾸자. 구두도 내 걸로 바꿔 신고. 뭐 해, 얼른 일어나! 30분 안에 가려면 서둘러야 해!”

제이디가 구두에서 내려선 뒤 다짜고짜 제 드레스 지퍼를 훅 내려 버리자, “어, 잠깐만! 잠깐…!” 파드득 놀란 록시가 무리를 이끌고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릭시가 얼떨떨하게 앉아만 있자, 제이디는 이번엔 릭시의 상의를 위로 휙 들어 올려 벗겼다.

“빨리!”

“으, 응!”

정말 다행스럽게도, 제이디의 붉은 드레스는 릭시에게도 꼭 맞았다. 릭시가 좀 더 살집이 있는 편이라 가슴이나 허리가 살짝 타이트해 보였지만, 언뜻 보기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고 오히려 훨씬 성숙해 보이는 효과가 났다.

어떻게든 눈물 젖은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를 수습하고, 구두를 갈아 신기고. 입술은 가면서 바꿔 바르라며 화장품을 떠넘기듯 안긴 뒤, 제이디는 문을 벌컥 열고 록시를 향해 외쳤다.

“어서 가!”

눈치 빠른 록시는 정신없는 제 누이 대신 제이디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인사를 남기며 서둘러 릭시의 팔목을 붙들고 뛰었다.

“남은 건 우리한테 맡겨.”

“응, 부탁해.”

릭시의 친우로 보이는 행정학부 아이들 또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뒤따랐다.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뛰어가던 중, 기숙사 계단 앞에서 릭시는 감사를 담은 눈빛으로 제이디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으리라.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 제이디는 바꿔 입은 릭시의 옷을 여미며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왔다.

“…….”

아마도 릭시네가 가장 마지막으로 기숙사에 남아 있던 아이들이었는지, 그들이 떠나자 조용한 적막이 찾아왔다.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멍해 있던 제이디가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치장을 한다고 어수선해진 방을 천천히 정돈하기 시작했다.

문득 창밖을 보니 멀리서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마력구가 화려하게 켜진 게 보였다. 거리가 있어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참,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겠다. 휘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꼭 듣고 싶었는데… 드레스와 구두가 없어서 무도회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울적했지만, 그래도 릭시를 도운 것은 명백히 잘한 일이었다.

까맣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제이디는 창틀에 턱을 괴고 한참이고 바라만 보았다.

“…….”

상처뿐인 아카데미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예쁜 추억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어. 그런데 내게 그건 허락되지 않았나 봐.

문득 생각난 무언가가 있어 제이디는 침대로 다가갔다. 머리맡에 숨겨 둔, 이제는 제법 손때가 묻은 공책을 꺼내 보았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곧 있으면 졸업 무도회예요. 사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제게 꼭 맞는 드레스를 만들어 준다고 해요. 아, 백작님은 이미 알고 계시겠죠? 그 친구 정말 재능이 있어요.】

【선물로 주신 시계는 매일 지니고 다녀요. 여전히 말로 다할 수 없게 감사해요. 혹시 제가 위험에 처할 거란 걸 미리 알고 계셨을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모쪼록 다시 한번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요즘은 많이 바쁘신가 봐요. 어리광 부리면 안 되는데, 내일 무도회를 앞두고 여간 설레는 게 아니어서.. 아, 드레스는 정말 엄청, 엄청, 엄청 예쁘게 완성되었어요. 보여 드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건 제 욕심이겠죠?】

【그러고 보면 저도 백작님도 서로의 얼굴을 모르네요. 언젠가 만나 뵐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만나 달라는 건 절대 아니었어요. 실은 너무 쑥스러울 것 같거든요.】

졸업 시험 날 사고가 난 이후 후견인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고, 제이디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일이 바쁘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덕분에 혼자서만 중얼중얼… 일기장처럼 되어 버린 편지 공책이었으나. 오늘도 습관처럼 불시에 펼쳐 보고 말았다.

【백작님, 저는 지금 무도회에 와 있어요.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고.. 벅차는. 그런 곳이네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백작님도 저의 오늘처럼 기쁨이 넘치는 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늘 친애합니다. 수혜자로부터.】

“…….”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걸까. 뭐… 괜찮지 않을까. 제이디는 들킬 것도 아닌데 괜히 움츠러드는 스스로가 우스워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는 모두 무도회에 가 있을 텐데. 누구지? 클라리사인가? 의아한 얼굴로 조심스레 방문을 연 제이디는, 저를 찾아온 뜻밖의 손님에 휘둥그레 눈을 떴다.

“집배원 경?”

“이름이 좋겠군요. 맥 칼리스토입니다.”

세 번째 만남 만에 이름을 알려 준 무뚝뚝한 우편집배원, 아니, 아마도 딜레앙가의 심부름꾼 맥 씨가 커다랗고 다소 납작한 상자 하나를 건넨 뒤 묵례 후 사라졌다.

“…에.”

최소한의 설명은 해 주셨으면 한다고요?

맥 씨가 사라지고도 상자를 들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던 제이디는 침대로 돌아왔다. 수상함에 인상을 쓰고 천천히 포장을 벗긴 뒤, 조심조심 상자를 열었는데…

“오, 맙소사.”

그 안에는 리노가 만든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화려한 새하얀 드레스가, 편지 한 장과 함께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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