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히 봤다고요! 최면술에 당한 애들이 절 위협하고 밀어뜨렸어요!”
답답하게 가슴팍을 치며 제이디가 호소했다. 그러나 눈앞에 비스듬히 앉은 학장 하임스 반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보다 못한 하임스의 조수가 그런 제이디를 학장실 책상에서 떨어뜨리며 진정시켰다.
“깃발은 명백히 저희들 거예요! 왜 제 말을 안 믿어 주시는 거냐고요!”
급기야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제이디가 감정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럽게 우는 제이디 헤이스터를 하임스와 조수가 난처하게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일이 아주 단단히 꼬여 버렸다.
절벽 밑에서 구조된 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의무실이었다.
록펠라 광장 게릴라전 이후 정신을 잃고 눈을 떴을 때와 같이, 가장 먼저 걱정스럽게 절 내려다보는 휘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피곤한 얼굴로 그때처럼 창가 옆 탁상에 앉아 있는 로건 교수님이 보였고. 공기 중엔 은은한 가습 향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까마득히 높은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아픈 구석이 없었다. 최소 전신 골절, 최대 사망에 이를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궁금해한 찰나,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제이디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고 당시로부터 꼬박 사흘이 지나 있었다.
“무언가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었던 거 같대.”
기운을 차리고 겨우 식사를 시작한 제이디의 의문을 휘노가 풀어 주었다. 제이디는 휘노가 가리키는 물건을 쳐다보았다. 딜레앙 백작에게 받은 손목시계였다.
“발동하고 흩어진 마력 기운이 잠재해 있는 걸 마법학부 교수님들이 알아내셨어.”
“시계가 아니라 마법 도구였어?”
“아니. 일반적인 물건에 마법을 덧씌운 거야. 하리몽드 마법 차처럼.”
요는, 제이디의 손목시계에 소유자의 위험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물리적 피해를 기력으로 상쇄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것. 모든 피해를 기력으로 막은 탓에 사흘간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만약 마법이 없었으면….”
“…….”
손목시계를 차지 않고 시험장에 갔다면 말 그대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제이디의 전신으로 오싹한 소름이 내달렸다. 만약 딜레앙 백작님이 졸업 시험 전 이 선물을 주지 않으셨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기어코 목숨까지 빚졌다. 사실상 제이디는 제 후원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빚진 셈이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충격에 빠진 제이디가 진정하길 기다린 휘노가 눈썹을 내려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휘노가 말한 문제가 뭔지 알게 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증거가 없다지 않은가. 상대 학생들을 처벌하기에는 역부족일세.”
하임스 학장이 짐짓 쩔쩔매며 달래듯 입을 열었으나, 역효과였다.
“가해자나 감독 교수님이 어떻게 되든 그건 상관없어요.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으면 재시험이라도 치르게 해 주세요!”
“그건 형평성의 문제로…”
“저희가 당했던 일은 그럼 형평성에 맞나요? 다른 조였어도 이러셨을 건가요?”
“아무리 고집부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네. 이만 돌아가게. 헤이스터 군의 피해 사실에 대한 합의금은 넉넉하게 지급하겠네.”
“하…!”
손목시계에 정말 마법이 걸려 있었는가의 문제는 딜레앙가에 증명을 요구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문제는 시험장에서 있었던 모든 활약상이 담긴 마력구가 완전히 훼손된 채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사건 장소에 있던 깃발의 첫 소유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즉 정신이 멀쩡했던 제이디의 진술만으로는 진위를 판가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면술에 당했던 가해 학생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로 일관했다. 동시에 피해 학생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겠다며 앞다퉈 나서는 모습으로 동정을 얻었다. 더욱 영악하게도, 일부러 내다 버려 훼손한 건지 파괴한 건지 그들의 기록용 마력구도 산산조각이 나서 유효 기록을 추출할 수 없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제이디는 끝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반항을 했지만 결국 졸업 시험 점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인명 사고가 날 뻔했다는 너무나 중차대한 과실을 저지른 최면술 교수는 파면되었으나, 제이디의 조 그리고 최면술에 당했던 조 모두 졸업 시험 전체 응시자의 평균 점수를 참작해 받았다. 그러나 제이디의 조는 처음부터 감산점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가해 학생들보다 낮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미안해, 얘들아. 내가 그때 대처만 잘했어도….”
“얀마.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더럽게 재수가 없으려니. 후….”
“제이디가 어, 없었으면… 어차피 낙제점을 바, 받았을 테니까…. 미안해하지 마….”
“그깟 점수가 중요해? 학생이 죽을 뻔한 사고라고!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젠장!”
늘 밝던 일로이조차 얼굴이 어두워져 한껏 성질을 부렸고, 클라리사는 충격이 가시지 않아 울음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제이디를 달랬다.
원래가 ‘떨거지 조’였던 세 사람의 말을 진짜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동급생들의 눈빛을 보면 오히려 낙제를 면하기 위해 쇼를 한 거라는 말이 돌지 않는 게 용했다. 벼랑에서 떨어졌단 것도 믿지 못하는 눈치들이었고.
이러나저러나 상처뿐인 아카데미 생활이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다.
* * *
졸업 시험에서 평균 이하 점수를 받게 되었지만, 제이디는 문제없이 졸업할 예정이었다. 클라리사 또한 존재감이 전무해서 그렇지 영리한 축이었기에 졸업은 무리 없었다.
문제는 일로이였는데, 그는 이미 두 번이나 유급한 상태였음에도 또 유급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 사고로 인해 학부장이 사정을 봐주어 보충 수업과 과제로 어찌어찌 커트라인에는 맞출 수 있게 됐다.
최종 시험을 마친 졸업반 학생들은 아카데미 마지막 행사인 졸업 무도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낮 시간에 일로이의 과제를 도와주던 제이디는, 그를 무사히 졸업생 목록에 올리는 데 성공한 뒤 무료하게 시간을 때웠다.
분노와 억울함은 우울함으로 변화하다가 이제는 체념이 되었다. 그저 기숙사 정원 벤치에 앉아 영혼이 없는 멍한 눈빛으로 봄꽃을 구경하다가, 그림 도구를 꺼내 수채화도 그렸다가, 다시 멍하게 턱을 괴고 풍경을 관찰했다. 성공적인 졸업에 실패한 제이디에게는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연구실에 가지 않은 지도….’
‘내가 욕심이 과한가? 그때 퇴학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사실….’
‘하. 그래도 우리 진짜 잘 해냈는데….’
머릿속 상념들은 끊임없이 얽히고설키며 제이디를 괴롭혔다. 그 와중에도 뭔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아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잊어서는 안 될,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을 떠올릴라치면, 금방이고 다른 생각들이 치고 들어와 또 흘려 버리기 일쑤였다.
그때, 멍한 시야 한편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제이디!”
“여기서 뭐 해?”
휘노와 리노였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빛이 꿀빛 머리카락과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내려앉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 그냥. 꽃구경하고 있었어.”
“이렇게 혼자 쓸쓸하게?”
휘노는 부러 애교스럽게 어조를 높이며 묻더니, 벤치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제이디의 오른 어깨에 제 어깨를 비벼 댔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위로하는 모습이었으나, 제이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뭐…. 그냥.”
“요즘 ‘그냥’이라는 말밖에 안 하는 거 알아?”
이번에는 리노가 제이디의 왼편에 앉더니 주섬주섬 가방을 뒤졌다.
“졸업 무도회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준비는 잘하고 있는 거야?”
“…어?”
제이디는 마치 처음 듣는 정보라는 듯 멍한 감탄사를 냈다. 혹시 내가 까먹고 있던 게 그거였나, 졸업 무도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그럼 그렇지.”
리노가 절레절레하며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제이디의 무릎에 탁, 내려놓았다.
“골라.”
“이게 뭐야?”
“특별히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 주는 거니까 취향껏 골라 봐.”
양장 제본 된 고급스러운 도안책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커버를 무심히 넘긴 제이디는 곧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옆에 딱 붙어 같이 보고 있던 휘노가 가장 먼저 감탄을 터뜨렸다. 사락, 사락, 혹시라도 손때가 묻을까, 구김이 갈까 절로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두 사람의 놀란 얼굴이 점점 상기되어 갔다.
색색의 빛깔, 놀라우리만치 전문적인 설계와 세세하게 적힌 최고급 원단명, 최신 유행을 반영한 형태까지. 리노가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 도안들이었다. 그 황홀한 도안들을 끝까지 넘겨 본 제이디가 번쩍 고개를 들고 리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졸업 선물이야. 제이디 헤이스터 드레스는 내가 책임진다.”
“너무 기뻐!”
제이디는 차마 리노를 끌어안을 순 없어서 애먼 휘노를 와락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
휘노는 제이디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리노의 도안들을 훑어보았다. 황성 내 유명 디자이너나 패션 상표 못지않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도안뿐이었다. 휘노는 이미 가문에서 준비한 드레스가 있었으나, 그게 없었다면 리노에게 부탁하고 싶을 만큼 탐나는 디자인이 많았다.
사교계의 상징인 드레스는 제이디가 태어나서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졸업 무도회도 사실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사라 굳이 갈 생각이 없었는데.
아닌가 봐. 나 사실은 예쁜 드레스도 입고, 졸업 무도회도 가고 싶었나 봐. 친구들이랑 마지막 추억을 예쁘게 만들고 싶었나 봐. 그게 아니라면 리노의 드레스 도안들을 보고 이렇게나 가슴이 설렐 리가 없었다.
“넌 최고의 친구야.”
“이럴 때만?”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제이디를 보며 리노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들어? 좀 말랐어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니, 네 체형과 어울리는… 어디 보자. 이건 어때?”
마침 괜찮은 디자인이 있다며 리노가 한 드레스의 도안을 보여 주었다. 옆에서 휘노가 입을 벌려 감탄했다.
“제일 공들여서 구상해 본 건데.”
“와, 화려하다….”
짙은 붉은빛 원단이 종아리까지 흐드러지는 풍성한 벨라인 드레스였다. 쇄골과 등이 훤히 드러나는 노출이 있는 드레스였으나, 마치 장미 꽃잎을 형상화한 듯한 러플이 팔뚝과 어깨를 감싸 주어 무척이나 우아하고 고아해 보였다. 광택이 많으면 과해 보일 법한데, 리노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벨벳 바탕에 강조 요소로 불투명한 공단을 쓸 거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걸… 내가 입어도 돼?”
“그럼 내가 입을까?”
리노의 실없는 농담에 휘노가 쿡쿡거리는 사이, 제이디는 조금 넋을 잃은 채 계속해서 뚫어져라 도안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눈에 띄는 주인공이 될 것처럼 강렬한 디자인은 사실 평소 제이디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머리 색, 눈 색과 잘 어우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붉은 머리카락을 닮은 이 드레스를 꼭 입어 보고 싶었다.
휘노는 제이디의 드레스에는 이러이러한 구두와 장신구가 어울릴 거라며 어느새 리노와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왜인지 울컥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제이디는 황급히 표정을 굳히고 차분하려 애썼다. 하지만 발그레 물든 뺨은 숨길 수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내 아카데미 생활은 상처뿐이었다는 생각에 매몰돼 있었는데. 어쩌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적어도 너희 같은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일주일 후.
마침내 아카데미 최후의 행사이자 최고로 아름답고 화려한 추억이 될 졸업 무도회 날이 밝았다.
또각…
조금 어색한 구두까지 갖춰 신은 제이디가 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풍성하고 화려한 붉은 드레스가, 마치 세상에서 혼자만 빛나는 것처럼 아름답게 주인의 몸에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