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28)화 (29/116)

“뭐니? 볼일 있어?”

제이디는 짐짓 차분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총 세 명이었다. 느릿느릿 움직여 모습을 드러낸 아이들이 같은 자세로 서서 제이디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건,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멍한 얼굴로 입을 열 때였다.

“우리가 먼저 찾은 깃발이야. 그러니 우리가 가져갈게.”

“까마귀 떼 못 봤어? 우리가 다 해치웠는데 무슨 소리야?”

“까마귀…? 그런 거 몰라.”

뭘까. 위화감이 들었다. 제이디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에 선 아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느릿한 걸음, 어눌한 말투, 비틀거리는 몸. 혹시 최면에 취해 있는 걸까?

제이디의 가정은 곧 진실로 밝혀졌다. 달빛 아래 비치는 그들의 피부가 창백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디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각 조가 풀어야 할 관문은 무작위. 마지막 관문에서 제이디의 조는 소환술이라는 장애물을 만났지만. 저들은 아마 최면술이라는 관문을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셋 중 하나도 멀쩡하지 못해서 구조 신호탄을 쏘아 올리지 못한 듯했고.

아니…. 시험 설계를 이따위로?

뭐가 됐든 다른 조를 방해하면 안 되지. 게다가 최면에 당한 주제에 무방비한 우리 애들한테 마법 공격을 해? 이건 합리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리 조원들은 어쨌어. 검은 줄기로 공격하던데. 그거 공격 마법이었지?”

“흐음…. 무슨 소릴 하는지 잘 모르겠어….”

“정신 차려! 유급하고 싶어?”

가장 앞에 있는 학생에게 가까이 다가간 제이디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앞뒤로 흔들었다.

“유급…?”

돌연 그들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모로 봐도 상위권인 자기네들이 시험을 통과 못 할 리가 있겠느냐며 그들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이내 아예 자지러지듯 웃어 젖혔다.

아오, 제정신이 아니잖아! 최면술을 깨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신성 마법이 필요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제이디는 이내 제 알 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붙잡고 있던 어깨를 놓았다. 안타깝긴 한데, 얘네들한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깃발을 뽑고 조원들을 찾아서 귀환해야 했다.

“너넨 아무래도 시험 완수하긴 그른 것 같으니까. 내가 대신 신호탄 쏴 줄게. 얌전히 교수님들한테 업혀서 돌아가도록.”

“이…! 이리 내놔!”

신호탄이 들어 있을 가방을 빼앗아 열려는데, 학생의 반항이 심했다. 답답한 제이디는 그럼 너희들 맘대로 하라며 팩 신경질을 부린 뒤 그들을 팽개치고 깃발 쪽으로 다가갔다.

“야!”

“우리 거라고!”

그런데 요 발칙한 것들이 돌연 몸으로 막아서며 저를 퍽 밀치는 게 아닌가.

“이것들이 미쳤나.”

점점 열이 받았다. 내려가기만 하면 기록구 까서 톡톡히 감점시켜 주겠어. 제이디는 씩씩거리며 아이들을 재차 밀치고 깃발을 뽑아 들었다. 드디어 손에 넣은 깃발을 품에 감추고 냉큼 뒤돌아 일로이와 리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잔뜩 악화했다.

“……!”

아무래도 최면술을 너무 만만히 본 걸까. 제이디는 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미… 미친.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내놔.”

제이디는 도르르, 눈동자만 굴려 제 목에 겨눠진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원드였다. 두 종류의 원드가 동시에 제게 겨누어진 것이다. 저들 중 한 명이라도 주문을 왼다면, 그것도 둘 중 마법을 전공한 마법학부 아이가 살상 마법 주문을 왼다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진다.

졸업 시험에서 최초로 인명 사고가 날 수 있었고, 그 주인공은 제이디 본인이 되는 거다.

아. 어쩐지 모든 게 잘 풀린다 싶더니.

최면술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풀린다. 하지만 이들에게 깃발을 넘기지 않고 뻐기다가 마법이라도 맞는다면 기다릴 기회도 없이 죽을지 모른다. 제이디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송골송골 돋아나는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바스락, 뒷걸음치는 발밑으로 바싹 마른 풀이 흩어졌다.

“줄게. 깃발 줄 테니까, 원드 먼저 내려 주지 않을래?”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원드를 내리지 않았다. 앞에 있던 아이가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깃발 먼저 내놓으라는 거였다.

꾸욱…. 어느새 겨눠진 원드 끝이 제이디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흐윽…!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뒷걸음치던 발걸음도 아찔한 낭떠러지에 도달하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제이디는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고 보자 싶었다. 마력구에 다 기록될 테니까, 나중에 학부장님들이랑 학장한테 다 보여 주면 돼. 증거가 명백해서 발뺌도 못 할 거야. 그래. 다 잘 해결될 거야…!

결국 빠르게 결론을 내린 제이디가 손을 뻗어 깃발을 아이들에게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뒤쪽에 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앞에 있던 아이를 제치고 제이디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최면에 빠져 시커메진 눈동자가 소름 돋게 희번덕거렸다.

“너, 걔잖아?”

아. 그제야 제이디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인 데다,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해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자백은 말도 안 되는 …”

“그건 우리가 신경 쓸 게 아니고 …”

자신이 한창 아딜론 밀반입자로 퇴학 위기에 처했을 때, 목욕실에서 본 아이 중 하나였다.

“이상하지? 4년 내내 조용하던 애가 갑자기 거물 백작가의 수혜자가 됐다고?”

“저 애도 그 악마의 풀인지 뭔지를 피웠을지 누가 알아. 평민이라서 참 좋겠어. 같은 죄를 저지르고도 동정심을 등에 업고 무사하니까.”

그리고 제이디가 아마도 그 일을 계기로 딜레앙가의 수혜자가 됐을 때, 가장 시기 질투를 하던 무리 중 하나였다.

제이디의 등골이 선득해진 순간, 눈앞의 아이가 입꼬리를 찢어 웃으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넌 그냥 없어지는 게 낫겠어.”

그 말이 끝난 순간,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제이디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약 3초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느라 멍해 있었다. 시야가 돌연 위로 향한다 싶더니, 어느 순간 환한 빛을 내뿜는 보름달만이 영롱하게 장밋빛 눈동자에 맺혔다.

…떨어지는 건가?

그렇구나. 날 유독 미워하던 애가 진짜 내게 마법을 썼나. 아니면 날 밀쳤나. 늘 빠르게 회전하는 머리가 이 순간만큼은 멍했다.

사고 회로의 완전한 정지. 검푸르게 펼쳐진 밤하늘만이 온 시야에 쏟아지고… 어느새 훅, 몸이 수직으로 낙하하는 감각이 들 때쯤에야 제이디는 간신히 초점을 찾고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무력하게 당해 버리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아직 제 손에 깃발이 쥐어져 있다는 점일까. 추락하는 중에도 제이디는 절 밀쳐 낸 절벽 위 학생들을 보며 허탈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솟아오른 눈물이 추락하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허공에 방울방울 흩뿌려지는 게 보였다.

이게 뭐야…. 이건 좀 아니잖아….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그저 억울해 미칠 것 같은 감정을 마지막으로 느끼며, 제이디는 스륵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꿈이기를….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잃은 제이디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카펫처럼 깔린 마른 풀 위에 뺨을 대고 누워, 심연을 헤매었다. 어느새 까만 어둠이 물러가고 푸른 기운을 머금은 새벽안개가 짙게 깔렸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도 꼭 이런 감촉의 풀밭을 침대 삼아 누워서 하늘을 구경했던 것 같아. 파삭… 여명에 짙푸른 회색빛이 감도는 마른 풀이 움찔거리는 제이디의 손가락을 감쌌다. 풀의 감촉과 냄새는 무척이나 익숙해서, 제이디는 꼭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에 있는 것처럼 오히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벽의 펠라스 산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이 부근이었던 것 같은데 …

… 절벽에 흔적이 …

…이디! 제이디! …

그 적막감을 깨고, 벼랑 위가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옆으로 누운 제이디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귀 끝에 간지러운 게 닿은 고양이처럼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 아직 좀 더 자고 싶은데….

그때였다.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닥거리듯, 혹은 환청이 머릿속에서 울리듯 낯설고도 익숙하고,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라며 제이디가 번쩍, 눈을 떴다.

허억…!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건 폐부로 가득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었다. 물속에 가라앉다가 뭍으로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한껏 숨을 머금고 뱉기를 반복했다.

몸을 일으키고 초점을 똑바로 잡기도 전에 시야에 아주 흐릿하게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청보랏빛의 꽃이 자글자글 달리고… 꼬불꼬불하고 가느다란 이파리가 풍성하게 난…

‘약초?’

마치 약초처럼 생긴 식물이었다.

아직 거리감이 회복되지 않아 그 식물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엎어져 있는 잿빛 풀밭과 뾰족뾰족 우거진 침엽수림 사이, 그 어딘가에, 난생처음 보는 신비로운 약초 하나가 인사하듯 봉긋하게 솟아 있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채취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굉장히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생각보다 멀쩡한 듯했지만, 추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 밤을 지새운 터라 온몸이 꽁꽁 얼어 있었다.

‘넌 이름이 뭐니?’

다시금 희미해지는 의식에 눈동자가 무거워졌다. 가물가물한 시야에도 제이디는 그 청보랏빛 약초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기억하기 위해서.

그때, 자신을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여기예요!”

“제이디!”

“다들 신속히 움직여!”

구조대임을 인지하고 안심한 제이디가 까무룩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교수들을 대동한 리사, 일로이가 황급히 다가와 제이디의 상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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