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코카루니아 숲의 오두막을 떠나는 날이었다. 굳이 간다는 말이 없어도 시일에 맞춰 며칠 전부터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자신을 딜레앙 저택 관리인이라 소개한 사람이 다가와 묵례한 뒤 말을 걸었다.
“떠나 계신 동안 자택을 관리해 드리고자 합니다.”
단정한 진갈색 정장을 입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회색 머리 노신사였다. 딜레앙가의 문양으로 만든 금장 배지가 가슴팍에 달려 있었다.
“원하신다면 조금 더 개보수해도 좋을 듯합니다만.”
그는 어째서 딜레앙가의 수혜자인 제이디가 집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는 듯했지만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제이디는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다 빙그레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집은 이대로 두었으면 해요. 어머니가 원치 않으실 것 같아요.”
“예. 그럼 최소한의 관리만 진행하겠습니다.”
“사실 아무도 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부탁드립니다.”
“그러십니까.”
처음 오두막에 도착하고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제국군이 쳐들어온 날 그대로 엉망인 서재를 쓸고 닦으면서, 제이디는 뜻밖에도 불에 타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장 뒤 구석에 박혀 있던 책은 모서리가 조금 그을려서 제목과 내용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제국령 원주민의 민간 의술을 담은 책인 것으로 보였다. 붉은 가죽 표지에 거대한 여인이 땅에 모로 누운 듯한 그림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다양한 삽화와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제이디는 당장에 그 책을 가방에 넣어 숨기고 이외에도 다른 금서나 문서가 남아 있는지 온 집 안을 살폈다. 하지만 깨진 실험용 유리병이나 썩은 시약의 흔적뿐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를 ‘마녀’의 흔적을 고려해, 제이디는 단단히 집을 걸어 잠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안에 있는 거라곤 낡은 집기밖에 없어 보이도록 외관도 더 이상 화려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제이디의 단호한 의사를 확인한 관리인은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묵례한 뒤 물러났다.
이윽고 채비를 마치고 마차에 오른 제이디는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향하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사위를 뒤덮을 듯 무성히 자라 하늘로 뻗은 잿빛 나무들. 헐벗은 채 삭막하게 얼어 버린 한겨울의 숲을 지나고, 짤막히 신세 졌던 코코리 마을도 지나쳐 마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눈이 녹지 않은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시린 공기가 코끝을 얼려도 창문을 닫지 않았다. 이토록 먼 곳까지 왔었구나.
제이디의 손끝에 하얀색 도료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본 딜레앙가 관리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춥지 않으십니까.”
제이디가 창가로 뺐던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지식해 보이는 은테 안경 너머, 갈대를 닮은 황갈색 눈동자가 안쓰러움을 담은 채 그녀의 손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이 참 넓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고, 제이디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요.”
마침내 긴 연기를 뿜으며 철로를 달리는 기차 한 대가 보였다.
* * *
“돌아왔다…!”
털썩.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대자로 뻗고서 쭈욱 기지개를 켰다. 간만에 느끼는 폭신한 황립 아카데미산 침대가 이렇게 반가울 데가.
여독이 풀릴 새도 없이 개학을 맞이하게 생겼다. 당장 이틀 후면 마지막 학기가 시작된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본가나 여행지로 갔던 학생들이 새 학기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꽤나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개학’, ‘학기’ 등의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제이디는,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 무언가 기묘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왜지…. 뭔가. 잊어서는 안 될 걸 잊고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기분의 정체를, 제이디는 곧 알 수 있었다.
“제이디이이이!”
“꺄악!”
“네가아 어떻게에 나한테 그럴 수 있어어!”
“으어아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거의 실종되다시피 사라진 제이디를 찾는 데 겨울 방학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휘노 펠리디오스가 태평하게 늘어진 제이디를 발견하고 그녀의 멱살을 붙잡은 채 짤짤거렸다.
“별일 없었어?”
“별일? 별이이일? 진짜 너무해!”
일부러 활짝 눈웃음 지으며 여상하게 말하는 제이디의 모습에 휘노는 급기야 탈력한 채 카펫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펠리디오스 후작가의 수행인 피오레가 단호하게 일으켜 세웠다.
“아무 데나 함부로 주저앉으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피오.”
“네. 방학은 잘 보내셨나요, 제이디? 마지막 학기도 잘 부탁해요.”
“그럼요. 아가씨는 제게 맡겨 주세요.”
피오레…. 저렇게 살랑 눈웃음 지으며 친절하게 굴어도, 눈빛 안에 잠재한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휘노의 신변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할 시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 물론 언제나 그런 일은 자신을 너무나 친애하는 휘노가 자진해서 하기는 했지만.
“다 미워! 밉다고! 아무도 내 맘 몰라!”
체통도 잊고 울듯이 외치는 휘노를 보며 제이디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들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고 새벽 일찍 출발한 터라 방학 동안 제이디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각자 스스로를 제이디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로건, 첼시 교수조차도. 제이디조차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주소지였으니, 그동안 그녀의 거취를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
“오죽 걱정됐으면 리노랑 교수님들까지 나한테 안부를 물어보더라. 특히 로건 교수님. 생을 경멸하고 비관한 나머지 어디서 객사라도 한 거 아니냐면서…. 그 말 들으니까 더, 더, 더 걱정됐잖아.”
“미안해. 편지 보낼 여력도 없이 지냈거든.”
“어디서 뭐 하고 지냈는지,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다 보고해.”
“얼씨구. 이제야 귀족 태가 나는구만.”
“너 없는 동안 처음으로 가신들을 들들 볶았거든. 아니, 그 많은 사람이 달라붙는데 사람 하나 못 찾는 게 말이 돼?”
“작정하고 숨으면?”
“작정하고 숨어?! 혹시…!”
휘노는 약초를 연구하는 걸 어디다 들킨 거냐며 소리 지를 뻔하다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제이디는 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아주 오래간만에 휘노를 만나 그간 있었던 일을 최대한 가볍게 보고하듯이 알려 주었다. 휘노는 처음 듣는 제이디의 고향 이야기에 놀라면서도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디에게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는 것 그리고 제이디가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 전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은 휘노는 거센 질문 폭풍을 날릴 거라는 제이디의 예상과는 달리, 조용히 눈을 반짝 빛냈다.
“내가 그리던 다락방이 거기엔 있을 것 같아.”
“그래. 좀 허름하긴 하지만, 네가 딱 좋아할 공간이 있긴 해.”
“꼭이야. 다음에 꼭 초대해 줘. 아무리 먼 곳이어도 찾아갈게.”
‘다음에’.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휘노와의 다음이 제게 주어진다면야 큰 축복일 테지. 하지만 졸업하는 순간, 휘노와 자신이 한 공간에 같은 신분으로 묶일 수 없게 되는 순간. 그 이후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신분 문제로 틀어지는 친우 관계를 종종 봐 왔으니.
“응.”
“또 대답만 하지 말고 진짜로!”
방학 전 편지하라는 말에 긍정하던 제이디를 곧이곧대로 믿었던 휘노가 당부하듯 덧붙였다. 제이디는 조금 서글프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 *
뒤늦게 부랴부랴 수업 시간표를 확인하고, 교수님들과 미리 인사하고. 개학 전날도 정신없이 흘러갔다.
정오 무렵. 제이디는 기숙사를 벗어나 광장 거리로 향했다. 새 학기를 맞아 너무 낡아 버린 코트 대신 새 코트도 사 입고 싶었고, 그간 돈이 아까워 사지 않았던 생필품이나 학용품을 준비하고 싶었다.
“록펠라 광장 왕복이요.”
“5,000에크론입니다. 후불인가요?”
“선불이에요.”
“요금은 우측 바구니에 넣어 주세요.”
이제는 아무 어려움 없이, 눈치 보지 않고 아카데미 마차를 빌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동안은 선불을 하자니 돈이 아까웠고 외상 개념으로 장학금 계좌를 달아 두자니 눈치가 보여서 최대한 휘노와 함께 외출하거나 걸어 다녔었다. 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아카데미 부지를 벗어나기까지 한참은 걸려 도보는 사실상 무리였다. 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던 제이디 헤이스터로 머물 필요가 더 이상은 없다.
딜레앙의 수혜자.
검소한 자신을 기이하게 보던 딜레앙가의 관리인이 떠올랐다. 뭐… 날 아는 이 없는 깡촌에서면 몰라도. 괜히 뒷말 없으려면 황성에선 그 꼬리표에 걸맞은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마차 안, 편하고 폭신한 쿠션에 기대 턱을 괴고 창밖을 구경하다 보니 손쉽게 광장 초입에 도착했다.
아카데미생에게 인기가 많은 젊은 감각의 의류점에 들렀다. 머리 색과 어울리는 차분한 회색 코트를 고르려다, 무슨 심정인지 제이디는 원래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연분홍색 코트로 시선을 돌렸다. 옅은 장밋빛 눈동자와 꼭 맞는 색이기는 했으나 칼라의 디자인이라든지 둥근 끝단 처리와 같은 자세한 면에서 제이디가 원래 입던 것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었다.
“입어 보시겠어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자, 이리로.”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온 점원에게 낡은 코트를 맡긴 뒤 그 분홍색 코트를 걸쳐 보았다. 쏟아지는 디자이너의 감탄을 상술이라 치부한 것과는 별개로, 제이디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옷을 입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몽글몽글했던 적이 있었던가. 값비싼 휘노의 옷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진 못했다.
“화사해 보이고 정말 잘 어울려요, 손님!”
“봄까지 입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신상인걸요.”
사실 유행에 민감한 황성민, 특히 귀족 특성상 지금 시기에 봄 코트를 고른다는 건 이미 한참은 늦은 행동이었다. 제이디에게는 그다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조금 더 고민하며 멀뚱멀뚱 전신 거울을 바라보던 제이디는 도로 코트를 벗었다. 왜 도망치듯 반짝이는 코트를 벗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게 화사해서? 너무 비싸서?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어쩐지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제이디는 왜인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옷이 제 주인을 만난 것 같았는데….”
아쉽게 말하는 점원에게 다시 낡은 코트를 건네받은 제이디는 쫓기는 사람처럼 출입문으로 빠르게 걸었다.
그때였다. 문득, 코카루니아 숲을 떠나기 직전 딜레앙 백작님과 주고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보내 주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황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안전하게 마쳤어요. 매번 드리는 말씀이라 지겨우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묘비에 꽃을 피워 주신 거요.】
【조금이나마 슬픔이 가셨기를 바랍니다.】
【궁금한 점이 생겼어요. 물론 후원에 대한 질문은 아닙니다.】
【네.】
【백작님에게도 슬픔이 있나요?】
다소 충동적인 물음. 그 물음을 건넨 데엔 이유가 없었다. 다만 사람은 자신이 위로받고 싶은 만큼 위로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위로받고 싶은 슬픔이 있는지 궁금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후견인은 이렇게 답했다.
【감당하기 전에 희미해진 슬픔은 남아 있습니다. 굳이 슬픔뿐만이 아닙니다. 실재한 순간에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 처리를 미뤄 버린 감정은 덧없이 딱딱해지더군요.】
【어려운 이야기네요.】
【나는 나의 수혜자가 순간의 희노애락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요. 그대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합니다.】
딸랑, 막 문을 열고 다시 광장 거리에 발을 내디딘 제이디의 몸이 움찔, 멈췄다.
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 늘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속하지 못하는 거라 여겼던. 이념 갈등에 게릴라전이 발발하는 불온한 시대에도 자유연애를 하며 웃고, 차를 마시며 미소 짓고, 짜증을 내며 바쁘게 걷고, 바닥에 넘어져 울고 보채고. 그런 남녀노소의 군상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나는 왜 나의 기쁜 감정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어째서 행복을 생소해하는 걸까.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건 어쩌면 내가 늘 긴장한 채로 삶을 대했기 때문일까.
기대하고 희망하는 법을, 마음 놓고 웃는 법을 몰라서. 나의 행복을 개척하는 법을 몰라서.
【현재를 충실히 사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조금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던 제이디가 다시 문을 열고 의류점에 들어갔다. 코트를 정리하던 점원의 눈이 반짝 커졌다가 곱게 휘어졌다.
“저, 아까 본 옷 계산할게요.”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