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21)화 (22/116)

Ⅱ. 회중시계의 주인



베르딘 황궁.

1황자 렉시드 베르딘의 성에는 마르지 않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철컥. 장전된 총이 다시 한번 한 시종의 머리 위로 겨누어졌다. 잿빛 플린트록 피스톨은 오래된 골동품처럼 사용감이 있었지만 그 자태가 고급스러워 한눈에 보아도 아무나 손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팔을 뻗어 사격 자세를 취한 총의 주인, 1황자 렉시드 베르딘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였다. 생혈이 스며든 듯 발갛게 번득이는 안광은 이미 정상의 범주를 한참이고 벗어나 있었다. 그 눈에는 초점이 없어 총구가 제대로 조준되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탈그락, 탈그락…

조금 뒤에 서서 렉시드의 차 시중을 들던 시종 하나가 속절없이 손을 떨었다. 그 바람에 다기들이 서로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탕─

총을 든 이가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시종의 손에 들린 찻잔에서 찻물이 한 방울 튀어 올랐다. 만약 그대로 엎었다면, 그 또한 황자의 눈앞에 무릎 꿇린 채 죽음의 위협을 받아야 했으리라.

흩날리는 화약 연기 너머 붉은 안광이 아쉽다는 듯 일그러졌다. 총알이 맞히고 통과한 것은 렉시드의 기대와는 달리 애석하게도 사람 머리가 아니었다.

툭….

대신 그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생크림 케이크가 후드득, 정수리에서 떨어져 피격자의 얼굴과 어깨를 더럽혔다. 베리류를 혼합해 만든 새콤한 붉은 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러그 위를 렉시드의 창백한 맨발이 가로질렀다. 케이크를 뒤집어쓴 남자는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눈앞에 선 황자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체격이 좋은 그가 몸을 숙이자 꼭 짐승 한 마리가 도사린 듯 음험한 음영이 졌다.

또 한 번 목숨을 건졌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턱. 렉시드가 창백한 손으로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을 더 들어 올려 남자의 정수리에 처박듯 올려놓았다. 정돈되지 않은 검은 머리, 그 사이로 붉은 눈이 희미한 빛을 받아 빛났다. 공포에 질린 채 생기를 잃어버린 시종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후들거리는 손으로도 빠르게 장전을 마친 황실 기공사가 다시 한번 붉은 눈의 1황자에게 피스톨을 건네었다.

벌써 네 번째. 여섯 조각으로 잘린 케이크가 모두 동날 때까지 머리가 날아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을까. 기적처럼 삼세번은 무사했지만, 네 번째에는 정말로 총알이 머리를 관통할 것 같았다. 무릎 꿇은 남자는 그저 제 운명을 받아들인 채 묵묵히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수그리면 케이크가 떨어질 테고, 그럼 그 즉시 사살당할 것 같았다.

렉시드가 다시금 멀찍이 걸어가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하, 하겠습니다! 황자 저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총을 거두어 주십시오…!”

총을 쏘려다 말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렉시드가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옆에 같은 자세로 꿇려 있는 여성 시종이었다.

미처 다 여미지 못한 구겨진 옷을 걸친 그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애원했다. 여인은 1황자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빌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했다.

렉시드가 총을 거두어들이고 휘적휘적 소파로 걸어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적당히 식은 홍차가 선명한 다갈색을 띠었다. 그는 아주아주 천천히, 한 방울 한 방울 음미하듯 차를 들이켰다.

마침내 찻잔을 비운 그가 황홀한 얼굴로 고개를 꺾어 올렸다. 한낮에도 어두침침한 응접실을 그나마 밝히는 샹들리에를 가만 올려다보며 혓바닥으로 입술을 한 번 쓸었다. 입가에 촉촉하게 남은 찻물 조금도 아깝다는 듯이, 그는 제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짤막한 티타임을 마친 렉시드가 돌연 빈 찻잔을 집어 던졌다. 애원의 곡소리가 들리던 방향이었다.

챙그랑!

여시종의 광대에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혔다 소리 없이 굴러떨어졌다. 처참히 산산조각 난 찻잔을 내려다보는 남녀의 얼굴이 더 질릴 수 없을 만큼 새하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렉시드는 궐련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듬뿍 연기를 머금고 뜸을 들이자 시야가 점점 몽롱해져 오고, 전신의 감각이 살아났다.

후─ 내쉬는 숨에,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오르듯, 새하얀 도화지에 물감이 번져 나가듯 온몸으로 쾌락이 퍼졌다.

“아름다운 내 화원에서… 천박하고 상스럽게 굴러먹던 대로 말이지.”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아무 데나 제멋대로 재를 털며 입을 열었다.

“예, 하겠습니다. 명하시는 것은 모두 하겠습니다! 그러니 모,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후─ 한 번 더 연기를 뿜어낸 렉시드가 담배를 끼운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내가 죽여?”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사람을 과녁으로 삼고 가지고 놀던 자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듯 굴자 두 청년은 혼란에 빠졌다.

“겁 좀 준 거 가지고.”

“…….”

“그럼 어디 한번 해 보거라.”

눈앞의 청년들은 1황자 성의 화원을 관리하는 젊은 시종이었다. 남녀가 모이는 환경에서 으레 그러하듯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신성한 화원에서 해서는 안 될 음란한 짓을 하고 말았다. 그날 하루, 렉시드의 장난감으로 선정되기에 충분한 죄목이었다.

안 된다고, 차라리 내가 죽겠다며 버티는 남자 대신 여자가 먼저 입술을 사리물고 반쯤 벗겨진 코튼 셔츠를 벗어 젖혔다. 남자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황족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관상용 섹스를 해야 한다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뜸 들이는 태도에 따분해 죽겠다는 듯 렉시드의 눈동자가 게슴츠레해졌다. 그 눈에서 점점 초점이 사라져 갔다. 안색은 창백하지만 눈가만큼은 울긋불긋 달아오른 채였다. 전형적인 아딜론 중독자의 몰골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금세 흥미를 잃고 퍼질러 있던 렉시드가 살짝 고개만 돌려 문을 쳐다보았다.

“자카르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장성한 군인이었다. 제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응접실을 가로질러 선 뒤 간결하고 단호하게 묵례했다. 황실 친위대장 자카르 아르디오스였다.

“곧 궁정 회의입니다.”

렉시드는 귀찮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계속 가운 차림으로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루에르 비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황성의 공무가 마비 상태입니다. 오늘은 일어나셔야 합니다.”

“…정말 끔찍하게들 착실하구나.”

“그럼 대기하겠습니다.”

자카르의 시선이 눈살을 찌푸린 채 누워 있는 렉시드의 얼굴로 향했다. 손등 아래 음영 진 안와 주변이 불긋한 것을 보니, 상황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피스톨에서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화약 냄새가 났다. 제멋대로 털어진 궐련 재로 엉망이 된 러그. 깨진 찻잔과 탁자 위의 차받침. 자카르의 감각이 여러 단서를 잡아내었다.

응접실 내 모든 인력이 눈을 내리깐 채 겁에 질려 있었다. 이 공간에서 여유로운 사람은 오직 렉시드 하나뿐이었다. 당장 회의실로 렉시드를 호위해야만 하는 자카르의 눈꺼풀이 반쯤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플 머리도 없었다.

황실 친위대장 자카르 아르디오스 중령은 뿌리 출신 평민이었다. 군공을 세워 황실의 눈에 들고 입궁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바라던 삶을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때는 화려하게 피어날 베르딘 제국의 붉은 장미였던 1황자, 모두의 선망을 받던 품격 있는 황족이었던 렉시드 베르딘은 현재 마약초에 취해 공무도 내팽개친 채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반쯤 헐벗은 채 벌벌 떨고 있는 두 시종이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자카르는 심경이 복잡했다. 황족을 향한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은총으로 앞날이 피고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어 한시름 놓았으니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황실의 개로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오늘도 망나니 1황자를 위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자들은….”

자카르가 렉시드에게 시종들의 처분을 물었다.

“…뭐더라.”

“…….”

“몰라…. 치워.”

아딜론에 취해 해롱거리는 렉시드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웅얼거렸다. 나지막이 한숨 쉰 자카르가 바로 제 옆에 있는 여인의 목에 칼끝을 겨누었다. 흠칫,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던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릎으로 걸어온 남자가 제발 살려 달라는 듯 납작 엎드렸다.

아마… 이 성의 화원을 관리하는 자들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자카르는 그들의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읽어 냈다.

이윽고 여인의 목에 닿아 있던 검이 흘러내린 옷가지로 향했다. 자카르는 섬세하게 검을 움직여 여인의 옷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세심한 행동에 비해 표정은 시린 듯 차가웠다.

“나가 보거라.”

눈에 띄는 짓은 다신 하지 말거라. 마지막 말은 눈빛으로 전하며 자카르가 그들에게 명했다.

내가 누구이든,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든, 내가 어떤 정의를 추구하든, 미친 1황자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않을 것. 그것이 황실의 개들이 이 성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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