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20)화 (21/116)

내가 사람을 죽였다.

아니, 죽였을지도 모른다.

처음 제이디는 헐리 씨의 보고서를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다음 날 눈뜨자마자 달려간 로건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마침내 실험 쥐 알프레드에게 유클라디오 독즙과 세인트아마딜리아 생즙을 주입해 보고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유클라디오 독즙에 시름시름 앓던 알프레드가 세인트아마딜리아 생즙을 맞고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전보다 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마비된 채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며칠이고 제이디를 충격 속에 빠뜨려 놓았다. 그래서 제이디는 아딜론 사건 이후 자신이 아카데미 사람들에게 완전히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저를 둘러싼 부정적인 소문이 넘실거리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제이디가 가는 곳곳에 족쇄같이 추문이 따라붙었지만 그녀는 세인트아마딜리아의 부작용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정확히는 시가전 당일, 자신이 구해 준 남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상하지? 4년 내내 조용하던 애가 갑자기 거물 백작가의 수혜자가 됐다고? 분명 뭐가 있어.”

‘어차피 독 때문에 죽을 사람이었잖아…. 그럼… 죄책감은 덜 느껴도 되지 않을까.’

“저 애도 그 악마의 풀인지 뭔지를 피웠을지 누가 알아. 증거물을 가지고 있었다며. 평민이라서 참 좋겠어. 같은 죄를 저지르고도 동정심을 등에 업고 무사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라 신성 마법사한테 발견됐음 무사했을지도 모르잖아. 보아하니 돈도 많은 사람 같던데? 괜히 내가 건드려서 정말 죽은 거라면….’

“저거 봐…!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까 저렇게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거 아니겠어?”

‘으아아아.’

급기야 상념을 떨칠 수 없었던 제이디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붙잡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험담을 멈추고 정말이지 미친 사람 본다는 양 제이디를 피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편 이 문제와는 별개로, 딜레앙 백작이 맞는지 확실치 않았던 사람이 정말 딜레앙 백작이 맞다고 믿게 된 이후 제이디는 편지 공책에 정중히 인사말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제이디 헤이스터입니다. 그동안 제게 주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아 무례하게 대응했던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제는 거기 계신 분이 진짜 모리스 딜레앙 백작님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수혜자로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무척 많지만,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에 그저 제게 주어진 축복만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물건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는 여전히 군더더기란 게 없었고, 제이디는 그 점이 역시 마음에 들었다.

【모쪼록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더불어 좋은 스승님을 소개해 주신 것도 제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저.. 무척 송구하지만... 그래서 말인데요.

.

●. .】

제이디는 마지막 말 이후 한참이고 더 고민하며 펜촉을 종이에 뗐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잉크가 번지기만 하고 글자는 새겨지지 않았다. 그 망설임의 흔적을 보았는지 딜레앙 백작이 반응했다.

【네.】

제이디는 결국 마음에 얹혀 있던 돌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은행에 함께 가 줄 어른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말을 해 놓고도 조금 양심이 없는 듯해 제이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딜레앙 백작에게서 약간 느린 답장이 왔다.

【제가 배려가 부족했군요.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후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게... 너무 큰돈이라서.... 네.】

【계좌를 만들고 수표 처리를 도와줄 사람을 보낼게요. 편한 날짜를 적어 놓으세요.】

헐리 씨와 친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저에게 무엇도 추궁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분명 후견인 또한 ‘마녀’거나 ‘마녀’를 지지한다는 의미일 터.

마녀를 알고 지지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철저히 좋은 인상을 구축한 가문. 그런 자의 후원이라면 제이디는 두말할 것 없이 받는 게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 설령 이것이 누군가의 음모라고 해도, 제 손에 쥐어진 돈은 실물이니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었다.

‘언젠가 들켜서 처형당한다고 해도 이 돈이면 죽을 때까지 원 없이 연구할 수 있어.’

이내 적당한 날짜를 적어 넣은 제이디는 그날 아카데미 정문 앞으로 마차를 보내겠다는 답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며칠 후. 칼같이 시각을 맞춰 아카데미 정문 앞에 등장한 사람은 예의 그 우편집배원이었다. 물론 오늘은 고위 귀족처럼 신사 복장을 챙겨 입은 채였지만, 제이디는 단박에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마차를 움직여 은행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제이디가 어려워했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혼자였다면 은행원의 눈초리를 감당해야 했을 텐데, 그의 등 뒤에 서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제이디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 처리를 마친 그가 서류를 건넸다. 돈을 꺼내고 싶으면 언제든 은행에 찾아오면 된다고 덧붙였다.

“딜레앙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으니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네. 여기까지 와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제이디를 다시 아카데미로 데려다준 그는 역시 가타부타 사족 없이 깔끔하게 퇴장했다.

10억 에크론.

마침내 그 돈이 자신의 계좌로 입금되었다. 그 고무적인 사실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제이디의 근심을 잠깐이나마 시원하게 날려 주었다.

하지만 그날 제이디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10억 에크론은… 얼마나 큰 돈이지?’

제이디가 수중에 쥐어 본 가장 큰 현금은 기껏해야 1만 에크론이었다. 다달이 들어오는 최소한의 생활비 명목 장학금을 아끼고 아껴 모은 그 1만 에크론으로 제이디는 사고 싶었던 책 두 권과 여벌 속옷, 양말 몇 켤레, 밤에 입을 카디건을 샀었다. 그러고 남은 돈으로 갓 구운 크루아상을 사 먹었던 것 같다.

아무리 신문 경제면을 넘겨 봐도 수중에 쥐어 본 돈이 워낙 작고 귀여운 수준이었으니 제이디는 먼저 자신의 경제관념을 일깨울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온 휘노를 붙잡고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나름 명망 있는 귀족가 자제니까 저보다는 경제에 대해 잘 알 것 같았다.

“있잖아, 휘노. 10억 에크론은 어느 정도의 돈이지?”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휘노는 제이디가 딜레앙 백작가의 수혜자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이겠거니 대강 눈치를 챘다. 그래서 내색 없이, 제이디가 놀라지 않을 수준에서 쉽게 설명을 해 주기로 했다.

“음. 일단 아카데미 학비가 분기별로 20만 에크론이라고 치면… 그래. 학비는 충당하고도 남을 돈이겠지. 물론 황립 대학에 들어갈 학비도 아주 아주 넉넉하게 낼 수 있는 액수겠고.”

“그렇구나.”

“어디 보자…. 요즘 황성 부동산 시세가 어떻게 되더라….”

휘노는 펠리디오스 제1저택의 값어치가 모든 사용인의 1년 치 봉급까지 합쳐 약 5억 에크론 정도 되리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10억 에크론이면 황성 내에서 혼자 살기에 전혀 무리 없는 깨끗한 집을 매매하는 것도 가능할 거야.”

“대단하네….”

“사실 나도 금융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제이디. 만약 10억 에크론이 있다? 그럼 학비나 부동산은 평생 고민거리 축에도 못 들 거야. 재산 관리인을 고용해야 할 정도의 돈이니까.”

“…….”

제이디는 딜레앙의 후원금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어. 뉴폴레도 제도에 염색약 공장을 세워서 부자가 된 부인이 있대. 그 부인이 황성 영토를 사서 공장을 옮겼는데, 글쎄. 황성 중년 귀족들을 상대로 그 염색약이 또 한 번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지.”

“응, 응.”

“그 부인의 개인 자산이 7억 에크론 정도라 들었어.”

“…….”

“황실 재정부가 주목하는 신흥 부호 목록에 올라간 건 당연지사일 거야. 지금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고 있을걸.”

“……….”

그러니까, 10억 에크론이란 생각보다 더, 더, 더 큰 돈임이 틀림없었다.

제이디는 다시 한번 편지 공책을 펼쳤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불을 뒤집어쓴 제이디는 경건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다시 한번 정말 많이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기대에 부응하는 수혜자가 될 수 있게 노력할게요. 어떤 방향의 노력을 해야 할지, 저에게 원하시는 게 있는 건지, 아무튼지 제가 백작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제이디는 ‘무릎을 꿇으라면 그곳이 어디든 꿇겠다’, ‘나를 백작가의 노예로 삼아 달라’ 등의 문장을 쓸 뻔했지만 꾹 참았다.

딜레앙 백작의 답장은 그리 늦지 않게 돌아왔다.

【말했듯이 후원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그대가 어떤 일을 하든, 어디에 후원금을 가져다 쓰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

뭐, 10억 에크론쯤이야. 그런 뉘앙스가 종이를 뚫고도 느껴지는 듯했다.

곧 백작의 필체가 유려하게 선을 그리며 밤 인사를 남겼다. 글자는 소리 없이 조용히 새겨졌지만 어디선가 사각사각 펜촉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달콤한 밤 보내요. 모리스 딜레앙.】

그의 말대로, 후원금의 맛은 참으로 달콤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흘렀다.

건국제 시즌이 지나가고,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는 짤막한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큰돈이 생긴 제이디가 방학을 맞이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머니 헬렌과 함께 지내던 그 오두막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불에 그을리고 사람이 오가지 않아 폐허가 된 그 작은 ‘마녀’의 집은 늘 제이디의 마음 한편에 짐처럼 남아 있었다. 그 짐은 이를테면 지켜지지 못한 약속 같기도 했고, 밥을 챙겨 주지 못한 길거리 고양이 같기도 해서 생각할수록 제이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방학 때마다 기숙사에 잔류해 사감 교수님의 눈치를 보는 것도 싫고, 휘노의 저택에 머물며 신세를 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살던 그 집을 보수하고 증축한 뒤 꾸며 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부우우─

열차의 증기 기관이 거세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스트 지방은 황성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차역에 내려 마차를 타고 또 한참을 가야 나왔다. 가는 데까지 지형이 험해 튼튼한 마차를, 그리고 지도에 없기 때문에 지리에 빠삭한 마부를 구해야 했다.

‘제대로 찾아갈 수나 있을지.’

혹시 길을 잃는다고 해도, 뭐. 이제는 괜찮았다. ‘딜레앙의 수혜자’라는 특혜가 하나 생겼을 뿐인데 삶이 이토록이나 달라졌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만큼 여유롭게.

‘엄마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함께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약초를 캐기 좋은 튼튼한 옷도 사 입고… 황실이 찾을 수 없는 더 깊은 숲속에서, 같이 웃으며 살 수 있었을 거야.

터덜터덜, 흔들리는 열차 창에 관자놀이를 맞대며 제이디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빨간 놀구름이 그녀의 장밋빛 눈동자에 선명하게 맺혔을 때. 제이디는 품에 품고 있던 낡은 가죽 가방을 열어 편지 공책을 펼쳤다.

“…….”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돈을 마련해 준 후견인께 말로 다하지 못할 고마움을 느꼈다. 비록 후견인은 수다 떨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 같았지만.

세간에 그는 몰락 가문을 되살린 개척자로 유명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른다지. 물론 그의 다른 수혜자들도 저와 같은 공책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또, 공책 너머의 사람이 진짜 모리스 딜레앙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이디는 자신의 비밀과 사정을 알고, 저에게 도움을 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았다. 이 위안과 따스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이디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제이디는 휴대용 만년필을 꺼내 거침없이 편지를 적어 내렸다. 몹시도 충동적인 문장이 적혔고, 되돌릴 수는 없었다.

【백작님께서는 이 후원을 정말 지속하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는데 어쩐지 두 눈에 몽글몽글 눈물이 차올랐다.

【백작님께서 키우시는 건 그저 허허 실실 머릿속이 꽃밭에 가 있는 약초꾼이 아닙니다. 친애하는 나의 후견인께서는 지금 광휘의 베르딘 제국에 반기를 드는 불순분자를 키우시는 겁니다. 당장이라도 ‘마녀’로 몰려 처형당할 불순한 사상을 가진 저는 상냥하신 후견인의 후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두 눈에서 이윽고 눈물방울이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제이디는 공책이 눈물로 젖지 않도록 재빨리 소매를 들어 올려 뺨을 닦았다.

후원에 관한 그 무엇도 묻지 말라 했는데. 단 한 번의 질문이 허락된다면, 그렇다면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난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내 부족하고 위험한 연구 때문에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정말 나를 믿어 줄 건가요? 계속 나의 후견인으로 남아 주실 건가요? 내가 어떤 행보를 하든 지지해 줄 건가요?

내가 ‘마녀’여도, 날 도와줄 건가요?

제이디의 펜촉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정말, 이래도 후원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후견인의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후원을 계속합니다. 당신이 뜻을 이룰 때까지.】

설움과 섞인 어떤 감정이 들이닥쳤다. 그 감정의 이름은 아마도 행복 혹은 희망.

제이디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바빴다. 그녀와 같은 칸에 있던 어느 노부부가 안타까운 얼굴로 서럽게 우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와 같은 사람이 격변하는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창문 너머 노을이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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