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과 마차와 길 물어보는 것까지 금지하셨으니, 제이디는 정말 혼자 약도를 보고 ‘Η’가 말한 곳을 찾아갔다.
불친절할 정도로 단순한 약도였지만 어느 현판에서 꺾으라든가 무슨 색 마력구 조명이 나오면 골목으로 들어가라든가 하는 핵심적인 정보는 모두 담겨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내 종착점에 도착한 제이디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치형의 짙은 고목으로 만들어진 나무 문이었다. 아무 현판도 걸려 있지 않은 그곳은 일반적인 주택 사이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툭툭.
문에 달린 문고리를 두드려 노크를 해 보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제이디는 다시 약도를 확인해 보았다. 문고리에 걸린 조각이 쪽지에도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여기가 맞는데.
몇 번의 노크에도 응답 없는 것을 확인한 제이디는 제멋대로 문을 밀어 당기고 고개를 빼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좁디좁고 가파른 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죽 이어져 있었다. 주광색 등불과 마력구로 환하게 밝혀져 있어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Η’ 씨?”
그렇게 불러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몇 차례 더 ‘Η’를 부르며 제이디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하우스 건물에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니. 아주 좁고 가파른 계단의 양쪽 벽을 두 팔로 짚으며 제이디는 계속 아래로 향했다. 중간중간 옆 벽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문이 은밀히 나 있기도 하고, 점점 기묘한 풀 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내 계단의 끝에 도달한 제이디는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문 앞에 당도했다.
【Η. Μ.】
금장으로 양각된 이니셜이 편지의 주인공이 이곳에 있음을 알렸다.
마침내 노크에 응답한 거주인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제이디를 반긴 건, 다소 왜소한 체격을 한 음침한 젊은 남자였다. 잔뜩 헝클어진 금발 머리. 퀭하게 내려앉은 잿빛 눈과 미세한 매부리코. 그리고 성격 나빠 보이는 삐딱한 입매.
“안녕하세요, ‘Η’.”
“들어와.”
쾅! 제이디가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Η’, 헐리 무니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제이디는 헐리의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가 외다리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미치광이 ‘마녀’의 실험실. 그게 제이디가 인지한 이 공간의 첫인상이었다. 금서에서만 보던 진귀한 약초들, 보글보글 끓는 플라스크들과 어지러이 널린 실험 보고서들. 사면을 둘러싼 금단 서적들….
세상에. 세상에. 이럴 수가.
“당신, 역시 ‘마녀’였군요?”
“그렇게들 부르더군. 남자인데도.”
그는 제 공간에 처음 방문한 학생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제이디는 지금,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진 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기후가 온난한 제국령에는 다양하고 많은 식생이 살아 숨 쉬었다. 그중에는 관상용 꽃나무나 좋은 향이 나서 차로 재배하는 종류가 많았다.
또 마력을 담아 정제한 마력석과 융합해 그 힘을 키우는 일부 식물도 존재했는데 이에 황실 마법부는 이런 식물을 마력 보조용으로 채취하곤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보조’ 개념이라 그저 식물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 융합 화학 역시 난도가 높아 해석하고 계산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황립 아카데미에서도 녹스나 제이디와 같이 1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했다.
제이디는 과거의 로건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황실 마법부 연구원으로 들어가 평생 마법융합자로만 살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눈물 나게 지루한 삶을 견디지 못해 로건 교수님처럼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와 ‘떡잎 마녀’를 발견하고 가르치면서 빌빌거리며 살게 되겠지만.
한편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식물 중 신성 마법에 대항할 만큼 강한 치유력이 있는 약초도 많았다. 황실은 그것들을 ‘마녀의 초’라 부르며 유통을 금지하고 불태웠다. 신성 마법의 위상이 떨어질 것이 두려워서.
세상에는 아직 연구되지 않은 약초가 무수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제이디가 나고 자란 헤이스트 지방만 해도 약초 식생이 많이 분포했다. 어린 제이디는 그런 약초들에 둘러싸인 채, ‘마녀’였던 엄마를 통해 다양한 식물과 교감하며 자랐다.
불타오르는 약초와 함께 많은 ‘마녀’가 한창 처형당할 때도, 제이디는 보육원에서 세뇌당하는 척하며 숨죽인 채 살아남았다. 그녀는 약초가 가진 힘을 아는 산증인이었다.
엄마와 강제로 헤어지고 헤이스트 지방을 떠나 황성에 들어오며 제이디는 로건 교수님을 제외하면 다시는 저와 같은 ‘마녀’를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 바로 눈앞에 ‘마녀’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것도 자신이 꿈꾸는 완벽히 은밀한 연구실을 가진!
제이디는 한참이고 헐리의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펼쳐 보고, 관찰하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헐리를 쳐다보았다.
“스승으로 모셔도 될까요?”
“넌 의리란 게 없니?”
아카데미에 있는 홍당무 머리 교수는 버리는 거냐?
“스승이야 많을수록 좋죠!”
연구실을 밝힌 마력구보다 더 총명하게 눈을 빛내며 두 손을 곱게 모은 제이디가 헐리에게 아부를 떨었다. 헐리는 만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눈앞의 학생에게 기가 질린 기색이었다.
그는 목제 의족을 달았음에도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은 몸짓으로 어딘가로 걸어가더니 주머니 몇 개를 꺼내 탁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자. 네가 말한 물건.”
헐레벌떡 다가와 주머니를 열어 본 제이디는 땡그란 눈으로 세인트아마딜리아를 확인하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 이걸… 진짜로…?”
“아무리 그래도 서른 묶음은 심했어. 세 묶음도 겨우 구했으니 아껴서 활용하도록. 이 간도 없고 의리도 없고 양심도 없는 아이야.”
“네! 없는 게 많은 제자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
조금만 더 ‘마녀’ 같았다가는 신처럼 떠받들 기세였다. 헐리는 진지하게 아카데미에 있는 홍당무 머리 교수가 측은하다고 생각하며, 제이디에게 자리를 권했다.
“헐리 무니라고 해. 앞으로 네가 하는 ‘연구’와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서신을 보내. 찾아와도 좋고. 의술은 몰라도 독성학 쪽이라면 내가 도움이 될 거야.”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흐읍. 제이디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주머니에 든 약초의 향을 맡다가 역한 쓴 향이 올라오는 걸 제대로 확인하고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였다. 진짜 세인트아마딜리아다. 그것도 마티스 아저씨가 구해다 주는 것보다 훨씬 줄기도 굵고 잘 성장한.
“너, 이 초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 진행했지?”
“아직… 정말 기본적인 것만요.”
“열 실험은 해 봤어?”
그가 말하는 ‘열 실험’이란 생초 가열 실험을 말하는 듯했다. 약초는 온도에 따라 성분이 달라지는 경우가 잦아 생즙과 가열 추출액을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제이디는 그가 말한 열 실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듣고 어려움 없이 대답했다.
“가열 추출액은 뽑았지만 아직 실험체에 주입해 보지 못해서 비교군이 없어요.”
그 말에 헐리는 제이디가 여전히 자신이 그날 모리스 딜레앙 백작에게 잘못된 약초 처방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았다. 백작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는 것을 알기에 헐리는 이를 가르쳐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답답했다. 그래서 돌려 돌려 설명하기로 했다.
“이유가 뭐야?”
“여건상 쥐한테밖에 실험해 볼 수 없는데… 쥐가 너무 불쌍해서요.”
“…….”
독성학자로서 필연적으로 온갖 동물에 실험을 해 왔던 헐리는 순진무구한 제이디의 말에 다소 멍해졌다. 그러니까…
“실험용 쥐를 밥 먹이고 재우기나 하고 실험은 하지 않는다는 건가.”
헐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게 말이에요.”
초면인 그에게 듣는 구박은 로건 교수님의 히스테리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로건 교수님의 구박에는 조금이나마 애정이 묻어 있다고 한다면 이 헐리라는 사람의 구박에는 굉장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봐.”
헐리가 다소 엄숙한 얼굴로 제이디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해독초는 독초와 갈래가 같아. 열 실험을 끝내지 않고 사람 몸에 처방하면 안 돼. 여러 가설을 세우고 오랜 기간 연구하지 않으면 자칫,”
네가 살리려던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혼을 내던 그가 말을 멈추더니 눈을 돌렸다.
“…자칫?”
제이디가 장밋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
고작 이런 애송이 때문에 수장을 잃을 뻔하다니. 그다지 감정이란 게 없는 헐리지만 급박했던 그날을 생각하니 은근한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워낙에 귀한 ‘마녀’ 손님이 반갑기도 해 짜증은 마음 한편에 밀어 두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면 좋담.
“너, 로건 리베르 밑에 있다지.”
“로건 교수님을 아세요?”
뜻밖의 인연에 제이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헐리는 그와의 인연을 설명할지 말지 고민했다. 자신이 ‘마녀재판’을 받고 다리 한 짝이 잘려 나갈 때였나. 당시 황실 마법부 소속 연구원이던 로건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게 떠올랐다.
헐리는 로건 또한 과거에 마녀재판을 받은 적 있었지만 어떻게 재판관을 구워삶았는지 무혐의로 풀려났다는 비화를 알게 되었다. 이후 몇 년간 황실의 개로 일하던 로건은 무슨 영문인지 아카데미로 들어가 쥐 죽은 듯 살더니 이런 위험한 떡잎 마녀를 키우고 있었다.
“지루한 옛날이야기야.”
말을 아끼는 그를 제이디는 추궁하지 않았다. 로건 교수님과는 다른 히스테릭한 모습이 보여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녀들은 다 이런가?’
차라리 로건 교수님이 훨씬 세련돼 보일 만큼 눈앞의 헐리 무니라는 마녀에게서는 좀 더 고차원적인 음침함이 엿보였다.
원했던 물건도 얻고, 제대로 된 마녀의 연구실도 구경한 제이디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남겼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종종 놀러 올게요.”
“가기 전에.”
헐리는 미리 준비해 둔 제 오래된 실험 보고서를 엮어 제이디에게 건넸다. 팔랑팔랑 종이를 넘겨 보는 제이디의 눈은 그야말로 튀어나올 듯 커졌다. 번쩍, 제이디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 이런 귀한 자료를.”
“공짜 아니야. 필사하고 반납하도록.”
제이디는 답지 않게 오늘따라 계속 말을 더듬는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최고의 건국제 선물이에요.”
제이디는 간만에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남긴 뒤 헐리의 연구실을 나섰다. 팔짱을 낀 채 탁상에 기대 있던 헐리는 발랄하게 돌아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과연 그럴까.’
그날 밤.
제이디는 친구들, 교수님들과 선물을 주고받고 난생처음 샴페인을 조금 마신 뒤 굉장히 고조된 기분으로 침대에 들어왔다. 술에 취해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속이 울렁거리지도 않고 많이 어지럽지도 않았다.
기분 좋게 마음이 충만해진 채 달게 잠들기 전, 희미한 마력구로 헐리 씨의 세인트아마딜리아 연구 보고서를 들춰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건지, 헐리 씨의 ‘자칫,’ 다음에 이어졌을 말이 무엇이었는지 완벽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가열 없이 생초를 섭취할 경우 부작용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