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8)화 (19/116)

‘세인트아마딜리아’라는 초명을 알아들을 자가 황성 안에 몇이나 될까. 그것도 심지어 세 묶음도, 열 묶음도 아닌 서른 묶음.

당신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그런 물음이 담긴 의뢰라는 것을, 백작님이라면 알 수 있으리라.

다음 날 아침.

제이디는 간밤 기숙사 방을 드나드는 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꾸역꾸역 밤을 샜다. 확실히 침입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저 공책에 일종의 마법 같은 게 걸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긴 하다만.

공책에 대한 건 그렇게 결론짓고. 과연 제 후견인이 세 번째 의뢰를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달칵…. 조심스레 방문을 연 제이디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방문 앞에는 무엇도 놓여 있지 않았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겠지.’

세인트아마딜리아 30묶음이라니. 원래가 채집하기 어려운 약초다. 자신이 무언가를 ‘연구’한다는 것을 이미 아는 사람이니 초명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데는 무리가 없을지 몰라도. 워낙 희귀한 해독초이니 하룻밤 새 단 한 줄기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기에 제이디는 눈썹만 한 번 까딱이고는 도로 방문을 닫았다.

…분명 기대하지 않은 게 맞는데.

‘실망하셨으려나.’

두 번이나 원하는 물건을 받아 놓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하지 않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나 한 수혜자를 어떤 후견인이 환영할까.

‘그래. 여기까지 하자.’

이런 건방지고 무례한 제이디 헤이스터를 감당할 후견인은 세상에 없어.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비웃은 제이디는 다시금 가시 같은 방어 기제를 세웠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와 털썩 누운 뒤, 베개 밑에 숨겨 놓았던 가죽 공책을 꺼냈다.

우리 후견인께서 뭐라고 날 다그치셨는지 확인해 볼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공책을 펼쳤다. 하지만 백작님의 답장은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 반응할 가치도 없는 부탁이라고 생각한 건…? 그렇다 해도 할 말 없지만.

그렇게 조금은 찝찝하고 또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잠에서 깬 휘노와 식당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멀찍이서 노란 유니폼을 입은 우편집배원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번에도 챙에 눈이 가려진 채였지만, 제이디는 직감적으로 그가 처음 딜레앙 백작의 소포를 전달한 집배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가타부타 사족 없이 그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든 제이디는 휘노를 먼저 식당으로 보내고 조용히 서신의 인장을 뜯어 보았다.

【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다짜고짜 반말로 시작된 서신에 순간 놀란 얼굴을 하던 제이디가 곧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삼자의 등장이라니.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무례한 반말과는 별개로 제이디는 은근한 반가움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 일을 겪고 얼마 되지도 않아 놓고. 하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야. 덕분에 네 후견인께서 한참이고 박장대소를 하셨지만.】

역시 후견인께도 몹시 고무적인 의뢰였나 보다.

【이봐. 네가 원하는 물건은 너도 알다시피 그 안으로 반입할 수 없어. 그렇다고 내가 갈 수도 없어서, 공교롭지만 네가 와야 해.

외출할 일이 있으면 동봉된 주소로 방문하도록. 동행 안 돼. 마차 안 돼. 길 물어보는 것도 안 돼. 대충 알아서 몰래 찾아와.

이 편지는 읽자마자 찢어서 삼켜 버리도록. 물론 그 전에 타 버리겠지만.

Η.】

그 말대로, 제이디가 편지의 끝 문장을 읽자마자 화르르, 불에 타듯이 편지가 사라져 버렸다. 조금이라도 뜸 들였다면 다 읽기도 전에 재가 되었을 터였다. 다행히도 동봉되었다던 주소지가 적힌 종이는 멀쩡했다.

‘Η’라는 약자로 편지를 갈무리한 상대는 아무래도 저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진 않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제이디는 그저 어깨나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  *  *

제이디가 ‘Η’에게 향한 건 건국일 전날이었다.

사흘 전 딜레앙 백작의 서신을 받고서야 제이디는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베르딘 제국 최대의 축제가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건국제 시즌은 약 일주일. 아카데미생들은 건국일 전날, 즉 건국 전야제가 펼쳐지는 날 일괄적으로 외출을 허락받았다. 제이디는 아침 일찍 펠리디오스 후작가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건국 전야제 준비로 한창인 거리를 방문했다.

몇 달 전의 시가전으로 초토화되었던 광장은 황실과 몇몇 귀족 가문의 원조로 뒤늦게나마 그럭저럭 회복된 상태였다. 물론 예전 모습 그대로 복구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베르딘 제국을 상징하는 은빛 매라든지 신성 마법 문양이라든지 하는 조형물이 곳곳에 보였다. 점심 무렵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제이디는 그다지 설레지 않았다. ‘축제’라기보다는 ‘휴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갑작스러운 시가전을 명한 것.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상처 입은 황성민을 돌보지 않은 것. 그러면서도 병 주고 약 주듯 뒤늦게 광장 재건에 국고를 보탠 것. 진심으로 제국민을 위한 것이 아닐 게 뻔했다. 필시 베르딘 건국제를 기념해 황성을 방문하는 타국 사절을 의식한 처사이거나, 제국민의 이지를 흐트러뜨리려는 수작이겠지.

펠리디오스가의 호위 몇몇을 뒤에 두고 휘노와 함께 왁자지껄한 축제 거리를 거닐던 제이디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참 바보 같지.”

“뭐가?”

“다들 벌써 모든 걸 태워 버린 그 폭격을 잊어버린 걸까? 그날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제조차 없었는데 건국제라니.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거야?”

“…….”

공식적인 추모제는 전무했고, 여전히 대다수의 황성민은 그날의 시가전을 혁명군이 먼저 시작했다고 알고 있었다. 제이디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면 공포심이 일었고 다쳤던 사지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괜스레 애먼 눈치를 보게 된 휘노가 눈썹을 축 내려뜨리며 시선을 내렸다.

“미안…. 난 그런 건….”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휘노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어? 아냐. 너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마음이 조금 그래서.”

휘노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받았다.

“내가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아. 나는 올해도 작년처럼 네가 좋아할 줄만 알고…. 그날 휘말려서 큰일 났던 것도 잊어버리고. 내 생각이 짧았어.”

“…….”

“정말 바보야.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때 생각이 나서 무서운 거지?”

“그렇다기보다는….”

사알짝, 제 생각과는 결이 다르긴 했지만. 무서운 것도 사실이긴 해서 제이디는 덧붙이지 않았다. 휘노는 자책하더니, 곧 비장한 눈으로 제이디를 올려다보았다.

“있어 봐. 당장 마차를 부르라고 할게. 얼른 돌아가자. 건국제 따위!”

“아, 아냐, 아냐…! 진정해, 진정하라구.”

이 밑도 끝도 없이 사랑스러운 귀족 아가씨를 어떡하면 좋담.

제이디는 어젯밤부터 건국제 준비로 휘노가 얼마나 설레했는지 똑똑히 봤다. 옷은 뭘 입을까, 머리는 어떻게 할까, 미리 꾸며 본다고 참새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제 룸메이트를 흐린 눈으로 멍하니 지켜보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이디는 활동하기 편하도록 대충 펑퍼짐한 모직 셔츠에 면바지나 입자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계획은 제 몸에다 이런저런 옷을 대 보는 휘노로 인해 물거품이 됐지만.

처음부터 휘노는 제이디와 우정의 한 쌍처럼 보일 상황을 연출할 계획이었다. 덕분에 지금 제이디에게는 체리 파이를 먹다 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무지 큰일 날 것 같은 치렁치렁한 러플이 달린 새하얀 셔츠에 건국제와 어울리는 고급 체크 무늬 스커트가 입혀져 있었다. 커다란 칼라와 리본이 달린 휘노의 자수 원피스와 비슷한 무늬였다.

이어 거듭 사양한 덕분에 핑크색 대신 와인색 모직 코트를 걸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보드라운 하얀 털모자와 한 쌍인 느낌을 내고 싶었는지 휘노가 둘러 주는 굉장한 부피감을 자랑하는 모피 목도리는 거부할 수 없었다. 제이디는 차라리 핑크 코트를 입고 털목도리를 걸치지 않는 편이 덜 부담스럽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러네? 어떻게 추모제도 지내기 전에 축제를 열 생각을 하지? 제아무리 건국제여도. 좀 이상해.”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휘노가 눈살을 찌푸리며 축제 거리를 둘러보았다.

무심함은 휘노의 탓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랬다. 고통과 피해에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늘 부당한 걸 부당하다 짚어 주어야 겉으로나마 깨닫곤 했다. 부조리는 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사람들에게 먼저 체감되니까.

이러나저러나 휘노의 건국제를 망쳐 버릴 수 없었던 제이디는 앞서서 휘노를 이끌었다. 낡은 로퍼 대신 대충 사이즈가 맞아 강요받은 휘노의 구두를 신었더니 벌써부터 발이 아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일까?’

오늘 제게 서신을 보낸 ‘Η’의 주소지를 찾아 방문할 예정이었다. 허름한 옷차림보다는 이런 옷을 걸치고 방문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동행 없이 찾아가는 게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곳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휘노에게 몰래 같이 가 달라고 할 순 없었다. 또, 동행 금지라고 했는데 누구라도 달고 갔다가 들키면 신뢰를 잃을지도 몰랐다.

제과점, 양장점, 소품 공방, 마법용품점, 악기점… 두 사람은 이런저런 행사를 진행하는 몇몇 상점에 들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양손 가득 쇼핑한 물건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오자,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흩날리기 시작했다.

“눈이야.”

“그러네?”

“따뜻하다….”

휘노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이디의 코 끝으로 난로 같은 온도를 머금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신성 마법은 하늘의 신으로부터 내려졌다. 상처를 치유하는 축복의 힘처럼 귀한 마법도 있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이런 기이한 기상 현상을 일으키는 독특한 날씨 마법도 있었다. 그다지 실속은 없지만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데엔 즉효라, 나름대로 밥벌이가 되는 마법이었다.

눈에서는 달콤한 크림 같은 향기가 났다.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들어 따스한 눈송이를 담뿍 맞았다.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행복한 얼굴을 했다. 몇 개월 전 새빨간 피바람이 불었던 곳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는 순식간에 새하얗고 포근한 빛에 휩싸였다.

목화솜 같은 눈이 소리도 없이 바닥을 하얗게 덮었을 즈음에는 모두 추모제 따위, 전쟁 따위, 혁명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환상적이고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든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붉은 분노를 서서히 꺼트려 갔다. 은밀하고 타의적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따뜻한 눈 때문에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휘노가 제이디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이면 우리도 열여덟이야.”

“응.”

건국일을 기점으로 해가 바뀌니, 나이를 한 살씩 먹는 셈이었다. 법적 성인이 되어 제 이름이 적힌 신분증을 발급받거나 부동산 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술집이나 궐련 상점에도 드나들 자격이 생긴다.

건국일이 되자마자 다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기에 졸업반을 앞둔 4학년은 아마 오늘 새벽 삼삼오오 기숙사에 모여 사감 교수님 몰래 술판을 벌일 것이다. 그들이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움을 만끽할 때, 제이디 자신은 성인까지 살아 낸 스스로가 대견해 술에 취해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기숙사에서 봐.”

“응. 금방 갔다 갈게.”

제이디는 저번에 못 간 헌책방에 들렀다 편하게 들어가겠다며 휘노를 먼저 보냈다. 펠리디오스 후작가의 마차에 탄 휘노가 인사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짐을 모두 휘노에게 맡겨 보낸 터라 제이디의 수중에는 비상금 몇 푼과 ‘Η’가 보낸 서신, 그리고 후견인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책, 이렇게 세 가지뿐이었다.

제이디가 ‘Η’의 약도를 펼쳤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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