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소동에 민중의 지팡이여야 할 경무청이 뭇매를 맞게 되었다. 경무청장 아놀드는 이를 혁명군의 선전 요소로 활용하는 동시에, 불운한 학생을 구제하여 사건의 공범이었던 경무청을 영웅으로 둔갑시킬 예정이었다. 아울러 최근 멋대로 날뛰는 하임스 학장의 기세를 누르고 황실 직속 행정 기관인 경무청의 명예도 지킬 셈이다.
물론 모든 것은 혁명군 수장 모리스 딜레앙의 계획이었다. 자신은 그의 대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니. 그 아이가 뭐라도 된단 말이오?”
“소식이 늦군요. 꽤나 거물인 후견인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딜레앙 백작가라죠.”
“…지금 딜레앙이라 했소?”
학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를 궁지로 몰기 전 모든 뒷조사를 다 마쳤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지도에도 없는 깡촌 출신의 철저한 고아였다. 사돈의 팔촌 중에도 귀족의 핏줄은 없었다. 그런 아이가 신흥 대부호 가문의 수혜자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아시다시피 이런저런 사각지대에 후원을 많이 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 아이의 재능을 높게 산 모양이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가문이 어디 그냥 대부호인가?
원래는 변방의 황량한 북부 영지를 다스리던 별 볼 일 없는 귀족가였다. 영지는 광활히 넓었지만 비옥한 것도 아니고 특산물도 없고 마법 가문도 아니어서 근근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가주 모리스 딜레앙 백작이 노부인과 대부인을 잃고 전쟁을 거쳐 직계 혈족이라고는 하나 남지 않은 혈혈단신이 되었기 때문인지 부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때문에 딜레앙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베르딘 제국에서 곧 단단히 도태되어 멸문할 가문으로 취급받고는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실속 없는 영지 내에서 광맥이란 광맥은 귀신같이 다 찾아내더니, 단 몇 년 사이에 말 그대로 제국 내 은행이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누구도 관심 없던 딜레앙 백작령이 그야말로 제국의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후 딜레앙 가문의 휘장을 단 상단이 개척한 무역로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이며, 축적한 부를 활용해 이런저런 신사업을 추진해 앞으로도 그 돈줄이 마를 날이 없었다. 가장 무시무시한 소문은, 그가 아직 개척하지 않은 광맥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국내든 타국이든 돈벌이에 거슬리는 건 모조리 돈으로 들이받아 해결한다는… 어마어마한 관세를 낸다는 이유로 그 위대한 베르딘 황실조차 한 수 접어준다는… 몇몇 제국민은 베르딘 제국의 화폐 단위인 ‘에크론’을 붙여 ‘에크론 백작’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그 대부호가 엮이다니…!
심지어 딜레앙가는 황립 아카데미 장학 재단에도 제일 많은 후원을 해서 하임스 학장이 가장 눈치를 보는 가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가주인 모리스 딜레앙 백작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 있지만 말이다.
그런 백작의 눈에 천애 고아 제이디 헤이스터가 당최 어떻게 발견될 수 있었냔 말이다.
그때였다. 학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하임스의 조수가 서신 한 장을 전달했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학장님 앞으로의 속달 서신입니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하임스 앞에서 아놀드가 시가를 빼어 물었다. 천천히 돌려 가며 불을 붙이고는, 서신을 읽을 시간을 주겠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서신에는 딜레앙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안경을 고쳐 쓰고 서신을 열어 본 학장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고작 고아 여자애 하나 때문에 장학 재단 후원을 철수하겠다니? 그 재단과 연결된 가문만 몇인 줄 아시오?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나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황실 기관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일이 이 지경까지 옵니까. 미래의 등불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같은 녹봉 먹는 처지에, 서로 부끄러울 일 좀 없게끔 해 주시오.”
“이…!”
아놀드가 재떨이 위에 사뿐히 시가를 올려놓았다. 내 언젠가 하임스 반 네 녀석이 사고 칠 줄 알았다, 하는 표정은 덤이었다. 학자라는 족속에게 권력을 주면 이렇게 된다니까.
“하여간. 조용히 처신하길 바랍니다, 학장. 참고로 경무청 에반 차장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는군요. 사건을 번복하지 않으면 집요하게 아들내미 앞길을 막겠다는데 별수 있나.”
하임스 학장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사태에서 가장 오판을 저지른 사람은 에반 차장도, 제이디 헤이스터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 * *
혁명군 세력이 은밀히 개입한 이후 사건은 일사천리로 술술 해결되고 있었지만, 제이디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때 이른 첫눈을 대비하지 못한 길이 얼어 버려서 제이디에게 갔어야 할 딜레앙 백작의 속달 서신이 미처 당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첼시 교수에게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제이디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공개 재판이건 뭐건 제이디에게는 싸울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겉으로 첼시와 로건의 말을 따르는 척하던 제이디는, 통지받은 퇴학 날짜를 하루 앞둔 날 새벽, 몰래 짐을 꾸려 도주할 생각을 했다. 이미 이 지긋지긋한 아카데미를 나가겠다고 결론을 내리니 하루도 더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눈을 뜨니 창밖에는 함박눈이 가득 날리고 있었다. 제이디는 낡고 작아진 아카데미 교복 코트를 걸치고 짐 가방을 든 채 조용히 정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자 고요히 쌓인 눈 위로 제이디가 걸어온 길을 따라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첫 발자국이었다.
제이디는 날리는 눈에 저 발자국이 도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이 들고 난 흔적일랑 조금도 남지 말았으면.
체념한 낯으로 다시 몸을 돌려 기차역으로 향하려는 때였다.
털털털털…
이른 새벽부터 새하얀 눈길 위에 기이한 기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동차?’
탈탈탈탈… 탈탈탈탈탈…
귀를 파고드는 조악한 내연 기관 소리에 제이디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툼한 눈길을 뚫고, 낡디낡은 삼륜 자동차 한 대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끼이이익─
운전자가 레버를 당기자 기괴한 소리를 내며 고철 덩어리 같은 그 기계가 멈춰 섰다.
“제이디 헤이스터?”
지붕도 없는 1인 좌석에서 내린 누군가가 제이디를 불렀다. 제이디는 대답 없이 눈만 끔뻑끔뻑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 추우세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물음이었다. 상대방이 제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문까지 덮어 버릴 정도로 생소한 광경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새벽녘에 무리한 운전이라. 심지어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어? 아아! 이 정도쯤이야.”
“집배원분이신가요?”
제이디의 격식 없는 말간 물음에 빙그레 미소 지은 여인이 탁, 자동차에서 뛰어내린 뒤 걸치고 있던 방한 코트를 벗었다. 황성 우편집배원의 유니폼이 아니었다. 멋들어진 푸른 제복이 하얀 눈과 대비돼 쨍하게 존재감을 발했다.
그녀는 제복 안주머니에서 경관 수첩을 꺼내 보여 주었다.
“수도 베르딘 경무청 마법수사과 아니타 리젤 경관이다.”
“……아.”
경무청 직원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제이디가 뒤늦게 묵례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저요?”
리젤이 제이디의 차림새와 한 손에 들린 짐 가방을 훑었다.
“서신이 도착하지 않았나.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
리젤이 중얼거린 말은 흩날리는 눈발에 묻혀 제이디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어…. 음. 집에 가는 길이에요.”
“미안하지만 돌아가 줘야겠어.”
“왜요?”
“오늘 이 아카데미 내 전원에게 아딜론 중독 검사를 실시해. 마법수사과에서 고안한 새 검시법으로. 네가 절대 빠져선 안 되는 날이지.”
그런 소식은 전혀 못 들었는데?
“역시 전달되지 않았나 보구나. 오늘 이 시간부, 베르딘 경무청 수사 권한으로 아카데미 출입이 전면 통제돼. 단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말이야.”
“…에엑?”
“에엑!”
리젤이 놀란 제이디의 추임새를 따라 하며 하하하 웃었다. 제이디는 한참이고 더 눈을 맞으며 서서 벙벙한 낯을 했다.
* * *
난데없이 들이닥친 베르딘 경무청 마법수사과 경관들과 검시관들 때문에 아카데미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범죄자가 속출했다. 대부분이 상류층 귀족 자제였는데, 몇몇 교수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물론 제이디의 검시 결과는 당연 ‘음성’이었다. 억울한 평민 고아 학생이 누명을 벗은 동시에, 진짜 악의 근원이었던 범인이 모두 색출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소식은 혁명군의 비밀 인쇄소를 타고 선전물로 만들어져 온 황성 거리에 퍼지게 되었다.
【억울한 학생의 누명을 벗긴 마법수사과의 새 검시법】
【상류층 자제들의 불법 약초 밀반입… 젊은 귀족의 현주소】
【적폐로 물든 제국의 상아탑, 무책임한 등불들을 규탄하라】
결과적으로 경무청은 정의와 위신을 회복하고, 혁명군은 또 한 번의 선전에 성공했다.
“제국의 상아탑을 들쑤시는 걸 정말 황실이 묵과한 거야?”
“자비에르 황제께서 아딜론 관련 수사에 대해서는 모든 권한을 청장님께 일임하셨으니까. 이 사건을 계기로 급히 고안된 검시법이 성공적이라고 판명되었으니 오히려 매우 기뻐하신다더라.”
오늘 하루 아카데미를 뒤집고 흔든 해일이 지나갔다. 워낙 사건이 중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목의 중심에서 멀어진 제이디는 자체적으로 근신을 풀고 얼굴을 가린 채 식당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곳곳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엿들으며 이런저런 정보를 입수했다.
황실에서는 검시관들을 이끈 마법수사과 경관 아니타 리젤 그리고 수사를 총괄한 아놀드 막시무스 경무청장을 직접 치하했다고 한다. 제이디는 눈밭 위에 고물 자동차를 대고 악수를 권하던 분홍 머리의 여경관을 떠올렸다.
‘정말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아도 돼? 정말? 진짜로?’
오늘 아침만 해도 아무도 모르게 훌쩍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심지어는 첼시 교수님도, 로건 교수님도, 휘노와 리노도… 누구도 개입되지 않고 제삼자의 손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이런 깔끔한 해결은 기꺼웠다.
다만 절망에 빠져 있다 갑자기 구원되니 얼떨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간만에 느끼는 생소한 정의에 기쁜 걸 넘어 의아할 정도였다.
도통 믿기지 않는 현실에 꿈을 꾸나 싶어 내내 멍한 채로 뜨거운 수프를 혀 데는 줄도 모르고 떠먹고 있을 때였다. 멀찍이서 누군가가 요란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디!”
제 이름에 번쩍 고개를 든 제이디가 반가운 기색으로 금발 고수머리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또 울음을 터뜨리는 휘노 옆에는, 늘 멋들어지게 넘겨 정리하던 연보랏빛 머리가 조금은 흐트러진 잘생긴 소년도 함께였다. 한동안 진한 상봉이 이루어졌다.
* * *
제이디가 낯선 후견인에게 소포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나서였다.
새벽까지 휘노와 밀린 회포를 풀다 스르륵 잠들고 눈뜬 주말. 제이디는 이른 아침부터 저를 방문한 사람이 있다는 사감 선생님의 전언에 기숙사 입구로 향했다.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챙이 달린 모자로 눈을 가린 우편집배원 한 명이 제이디의 얼굴을 확인한 뒤 말없이 그녀의 이름이 적힌 소포 하나를 내밀었다.
카디건을 여미며 다시 기숙사 방에 돌아온 제이디는 휘노가 깨지 않게끔 조용히 소포 포장을 벗겼다. 고풍스러운 가죽으로 양장 제본 된 공책 한 권과 서류 한 통,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처음 보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리송한 얼굴로 주섬주섬 작은 서류 봉투를 먼저 뜯어서 확인한 제이디는, 너무 놀라 말 그대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뜨거운 찻주전자라도 무심코 만져 버린 양, 들고 있던 모든 물건을 떨어뜨려 버렸다.
【ξ1,000,000,000】
팔랑이며 바닥에 떨어진 수표 위의 ‘0’은 아무리 세어 보아도 변하지 않았다.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급인: 모리스 딜레앙】
잉크조차 마르지 않은 듯 선명한 서명 또한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