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15)화 (16/116)

그냥 그런 거였다. 열일곱의 제이디 헤이스터는 어쩔 수 없이 어리숙했다. 제아무리 이성적이고 성숙하고 영리하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은 존재했다.

역사의 벽, 신분의 벽, 부의 벽.

친족도, 혈통도, 그 무엇도 가진 것 없이 오직 제 몸뚱이 하나만 건사 중인 제이디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녹스 에반에게 과외를 제안하지 말걸, 그때 비스킷을 두고 오지 말걸, 그때 심화 학술 수업 같은 거 그냥 신청하지 말걸, 아니… 그냥 이딴 아카데미 따위 들어오지 말걸.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달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따위를 추적하는 건 무의미했다.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봤자 이미 해결할 수 없는 문제투성이였다.

【퇴학 통지서】

읽고 또 읽어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문서 아래에는 학장 하임스 반의 서명과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의 인장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찍혀 있었다.

성공적인 졸업을 고작 반년 앞두고 퇴학당하게 된 평민 수석생.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 ‘어린 나이에 불순분자가 된 학생의 향후 행보를 추적하라!’ ‘혁명군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 … 거리에 흩날리는 가십지는 거의 소설과도 다름이 없었다. 별별 추측이 난무하며 제이디의 마음을 할퀴었다.

‘아예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아야 하나.’

당최 일이 왜 이렇게 커진 거야.

어렸을 적, 엄마와 헤어졌을 당시 황실 마법대가 지른 불로 하루아침에 타 버린 숲이 떠올랐다. 그 불은 당시 제이디의 뜀박질 속도보다 더 빠르게 번져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3주간 교실 바닥에 버려진 아딜론과 엮이며 제이디는, 강풍에 번져 가던 그때 그 산불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아파.

퇴학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는 원래도 못 자던 잠을 더 못 자게 되었고, 그래서 도무지 두통이 나을 기미가 없었다.

소중한 친구들과 스승의 인생에 흠집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제이디는 겸허히 퇴학 통지를 받아들이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퇴학 통보 후부터 퇴학 당일까지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했다. 만날 수 있는 건 하임스 학장뿐. 하지만 학장 얼굴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제이디는 철저히 혼자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테니까.

‘갈 곳이 없어….’

이 제국 어느 곳에도 제이디를 품어 줄 고향이 없었다.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어릴 적 엄마와 살던 그 산속 오두막은 이미 폐가가 되어 버린 지 오래여서, 보육원에서 지내던 시절 들렀을 때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다시 시작해야 해.’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미련 두지 말고 빠르게 털어 버리고 인생을 다시 개척해 나갈 방법을…

“제이디!”

그때, 기숙사 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맹렬한 기세로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첼시 교수님?!”

마법학부 첼시 아도라 교수였다.

그녀는 빠르게 눈을 굴려 상황 돌아가는 꼴을 판단했다. 몇 벌 안 되는 옷가지가 한데 뭉쳐 널브러져 있고, 모든 학생에게 기본으로 지급되는 짐 가방이 침대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 즉, 제이디는 아카데미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여긴 어쩐 일로….”

첼시는 다짜고짜 성큼성큼 다가와 제이디의 양쪽 어깨를 붙잡은 뒤 우악스레 흔들었다.

“정신 차려! 미친 거야? 네가 왜 짐을 싸?! 내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

“으어어아아.”

“왜 아무 죄도 없는 네가 짐을 싸냔 말이야아!”

“알, 겠으니까, 이거 좀 놓고 말, 씀…!”

어깨가 붙잡힌 채 흔들리며 첼시의 닦달을 받아 내던 제이디의 눈이 금방이고 핑글 돌아갔다. 교수님, 그렇게 흔들지 않아도 전 이미 두통이 있단 말이죠.

마침내 첼시가 진정하자 제이디가 가장 먼저 궁금한 걸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저 면회 금지인데.”

“이봐, 학생. 나 첼시 아도라야.”

베르딘 제국 최고의 천재 마법사. 그와 동시에 제국의 난봉꾼, 골칫거리, 이단아… 등등의 수식어를 가진 자.

제이디와 첼시 교수는 보육원 출신의 평민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친해졌다. 차이점이 있다면, 제이디의 경우 숱한 매질에도 마력이 발현되지 않았지만 첼시는 발현하였고, 그와 동시에 폭주하는 바람에 보육원 지붕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린 전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더해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원장을 버려둔 채 보육원 아이 전원을 데리고 도주해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 주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가방을 꾸리기 위해 꺼내 두었던 옷가지와 자질구레한 짐이 순식간에 공중에 부양한 뒤 제자리로 돌아가 착착 정리되었다.

“교수님…! 기숙사에서 마법이라뇨!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제이디가 괜히 벌컥 열린 문밖을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난 못 보내.”

“이미 퇴학 통지서도 나왔고 행정 절차도 들어간걸요.”

“아니. 절대 용납 못 해. 재판하자. 이제부터는 내가 네 보호자야. 내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도와줄게. 그리고 딱 반년만 더 버티는 거야.”

“…….”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를 이대로 퇴학당하게 둘 순 없어!”

제이디는 교칙까지 어겨 가며 제 방에 쳐들어온 이 막무가내 교수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보호자….’

그 한 마디에 제이디가 허물어져 내렸다. 눈을 꾹 감자 참아 왔던 눈물이 구슬처럼 뭉쳐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그냥, 이렇게 찾아와 이런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것만으로도 제이디는 너무나 감사했다. 4년간 머문 아카데미와 허무하게 이별할 줄 알았는데, 헛산 건 아닌 듯했다.

“하임스 그 노망난 늙은이가 제멋대로 구는 꼴은 절대 못 보지. 나만 믿고 재판하도록 해. 로건이랑 내가 백방으로 뛰고 있으니까!”

“아니에요, 교수님. 그냥 조용히 저 하나만 나가는 게… 그게 최선이에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웁.”

첼시가 한 손으로 제이디의 조막만 한 얼굴을 붙잡았다. 제이디가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오물거렸다.

“학생. 지금 제이디 학생이 당하고 있는 거, 엄청난 차별이야. 기숙사에만 갇혀 있어서 잘 몰랐나 보구나. 자, 이걸 보렴.”

코를 부딪칠 듯 제이디에게 얼굴을 들이민 첼시의 눈동자가 서서히 희게 물들었다. 제이디는 첼시의 마법을 통해 그녀가 머릿속에 담아 온 기억을 읽었다.

【무고한 평민 학생의 누명을 벗겨라!】

【베르딘 아카데미 학생 성명서】

【아카데미의 공정 재판을 촉구합니다.】

아카데미 정문 벽보에 줄줄이 붙은 대자보와 광장을 메운 시위대, 제이디 헤이스터를 지지하는 학생 연합의 성명서까지. 제이디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헉…!”

마법이 풀린 제이디가 물에서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다시 현실 감각을 찾기 위해 몇 차례 머리를 털어 내었다. 역시 첼시 교수님이었다. 정신 마법의 일종인 기억 주입술을 이렇게 부작용 하나 없이 잘 활용하는 사람은 제국에서 첼시 아도라 교수가 유일했다.

“진실이 뭐든 상관없어. 물론 아니겠지만 네가 정말 아딜론을 밀반입했든, 피웠든, 아님 그냥 관상용으로 키우려 했든. 넌 이미 황성 내에서 또 하나의 도화선이 된 거야. 혁명의 상징 같은 거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이런 급전개는 적응이 안 된다니까요?”

“기자 하나가 여기 잠입하는 바람에 아딜론 부작용으로 쓰러진 학생들 소식이 새어 나갔어. 거기에 녹스 에반이 경무청 차장의 아들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하임스 학장의 독단을 멈추고 공개 재판을 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그러니까 짐 쌀 생각은 거두고, 변호사 선임 때까지 당당하게 고개 들고 있어.”

“교수님….”

“펠리디오스나 슈펜하이어는 위신상 조력할 수 없다지만, 난 가진 게 돈뿐인 한량 평민 마법사니까.”

“제가 정말 이 호의를 받아도 될지….”

“물론. 네가 이대로 퇴학 처분을 수용한다면, 널 응원하는 저 아카데미 밖의 사람들도 희망을 잃고 말아.”

“그…렇군요.”

사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 저의 책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무모했고 치밀하지 못했다. 가져선 안 될 호기심을 가졌고, 자신의 임기응변력을 과신했다. 그 바람에 모든 걸 망쳐 버렸다.

그래서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사이에, 한편으로는 저 밖에서 급진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사건이 민중 결집의 또 다른 계기가 될지도 모르지.”

“…….”

왜인지 점점 이야기의 방향이 이상해지는 듯해 제이디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저를 향한 첼시 교수님의 애정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지만. 제이디는 혁명의 상징이니 공개 재판이니 하는 모든 것이 두렵고 과하다고 느꼈다.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듯,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상류 사회에도, 아카데미에도, 민중에도 그다지 섞이지 못하는 느낌.

게다가 일이 이보다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면 자신이 약초 연구를 하던 것도 까발려질 위험이 높아진다. 그럼 어쨌거나 동조하거나 그것을 묵과한 로건 교수님과 휘노가 결과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제이디는 자신이 떠나는 게 제일 깔끔하고 적합한 처사 같았다.

“생각해 볼게요. 우선은 이 모든 게 갑작스러워서요.”

“그래. 너무 마음 쓸 필요는 없어. 네겐 생각보다 조력자가 많단다. 그러니 걱정 덜고 조금은 자 두도록 해.”

“네….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교수님.”

첼시는 제이디의 협탁에 놓인 물병에 비밀스러운 신성 마법을 걸었다. 하리몽드 차에 걸린 마법과 같은 종류였다.

첼시가 떠나고, 제이디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멍하니 침대 위에 걸터앉아 고개만 돌려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기다란 아치형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지는 게 보였다. 새빨갛게 여물어 가는 지평선을 보면 꼭 바람에 흩날리던 엄마의 붉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혁명군의 깃발도 붉은색이라고 했지.

그렇게 제이디가 복잡한 심경을 안고 붉은 놀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다가닥, 다가닥…

제국의 상아탑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 정문을 향해 고급스러운 남색 마차 한 대가 인접하고 있었다. 마차의 창 옆에는 황실 산하 행정 기관임을 뜻하는 푸른 휘장이 걸려 있었고, 외벽에는 휘장의 자수와 색을 맞추어 은색으로 양각된 경무청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세워진 마차 안에서 장성한 중장년의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고하고 딱딱한 눈빛이 아카데미의 외관을 시리게 훑었다.

황실 친위대 출신 군인, 베르딘 경무청장, 아놀드 막시무스였다.

호위를 이끌고 학장실로 들어선 아놀드가 미리 언질을 받고 대기 중이던 하임스 학장과 대치했다.

“상아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막시무스.”

하임스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리를 권했다. 팽팽한 접견이었다.

“아무래도 판단을 잘못하신 모양이죠, 학장.”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마신 아놀드가 도로 잔을 내려놓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스산한 분위기에 그가 든 찻잔만 금세 식어 버린 듯했다.

“그러게 말이네. 고작 평민 고아 하나 때문에 사태가 이 지경까지 커질 줄은. 졸지에 경무청까지 개입되어 유감이오.”

“상황이 몹시 난감해요. 신뢰로 먹고사는 민중의 지팡이가 제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으니. 상류층에서도 연고 없는 어린 학생을 희생시킨 것을 좋게 보고 있지 않아요.”

“필시 혁명군의 선전이 난입했기 때문이오. 아무리 언론을 검열해도 어디서들 그리 찍어 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황실 귀를 간질이기 전에 조용히 수습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 말게.”

“지금 그게 중요해 보입니까?”

“…그럼 당최 무슨 용건이오?”

“학장.”

아놀드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회청색 눈동자가 매섭게 하임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것 같소.”

황실 친위대 출신 군인, 베르딘 경무청장, 그리고 혁명군의 수뇌 아놀드 막시무스가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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