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을 나눠…?
그런 건 해 본 적 없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 그래서 제이디는 녹스 에반이 ‘수석을 내놓으라’는 제안을 돌려 말한 것으로 이해했다.
“네 지식만 넘기면, 죽을 때까지 없던 일로 묻어 줄게.”
“…….”
“어차피 대학에 진학할 생각 없다고도 들었고. 나 또한 봐 온 게 있어서 네가 이런 거에 손을 댄 일이 꼭 너만의 책임은 아니란 걸 알아. 이 아카데미에서 네가 최초도 아닐 테고. 내 생각엔 이 정도도 꽤 과분한 처사 같은데.”
제이디는 곰곰이 생각했다. 수석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장학생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 또한 자신을 뛰어넘는 학생도 없었다. 제이디로서는 차석이 된다고 해도 기분이 살짝 언짢은 것 말고는 큰 문제 없었다.
아딜론을 소지하고 있던 걸 까발리지 않는 대신 수석을 넘기라는 제안은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아무 의심도 사지 않고 수석, 차석 자리를 조작한다는 게 사람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식을 나누는 건 어떻게 해야 되는데?”
“음….”
녹스는 무언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지만 망설이는 듯했다.
“네가 갑자기 날 제치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을까? 너도 내 실력을 봤잖아. 여기 이 교실에서. 아이들이 수상하게 생각할걸.”
“…….”
“두 사람 다 수석으로 올라오는 건 어때? 점수 차가 크지 않은 구도를 만들자는 거야.”
“공동 수석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그때, 제이디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위기를 기회로. 그와 매일 붙어 있으면 그가 가진 증거, 즉 아딜론을 도로 빼앗을 기회를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네 말대로 2차 종합 시험 전까지 너한테 부족한 걸 내가 채워 줄게. 원한다면 내가 가진 교재나 화학 지식도 다 가르쳐 주고. 수석 자리를 넘기려고 내가 일부러 시험을 망치면 다들 이상하다 생각할 게 뻔해. 네가 자연스레 나를 제치는 편이 더 모양새가 예쁘잖아.”
제이디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마치 아주 달콤한 제안을 하는 양 살며시 미소 지었다. 솔깃할 것이다. 4년 내내 차석과 높은 점수 차를 내며 페이스를 잃지 않던 수석이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미끄러진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상황보다야 본인이 올라와서 수석을 밀어내는 그림이 훨씬 더 멋질 테니까.
“계획이 뭐야?”
그가 제이디의 미끼를 물었다. 본인 또한 솔깃한 듯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간단하지. 나한테 매일 과외를 받아. 내가 보는 교재, 내가 찾은 자료,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전수해 줄게.”
“과외?”
“네가 내 가방 뒤진 거. 지금 날 협박하는 사람은 너지만 따지고 보면 나한테도 카드가 있는 셈이지.”
“…….”
“나야 뭐, 어차피 명예가 실추돼도 나 하나만 손해야. 그치만 명문가 도련님이 평민 수석생의 가방을 뒤졌다? 심지어 아버지가 경무청에 다니는데…? 그거 진짜 본새 없잖아. 너한테도, 네 가문에도.”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는지 녹스가 점점 페이스를 잃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째선지 그의 귓가가 갑자기 발그레 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제이디는 그가 무척 당황해서 그런 거라고만 판단했다.
얘 진짜 바보 아니야? 누가 봐도 저한테 무조건 유리한 상황인데 왜 흔들리는 거야. 내 가족이었음 한 대 쥐어박았을 듯. 속으로 그런 생각을 이어 가며 눈앞에 선 동급생을 깔아 보고 있자,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녹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거래의 성립을 알렸다.
“알겠어. 매일이야.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장소는… 그래. 방과 후 여기 이 교실로 하자.”
“여기?”
“범행 장소에서 압박감이라도 받아야 네가 날 대충 가르치지 않겠지. 금방 폐쇄되는 곳이라 이목이 없기도 할 테고.”
그는 자물쇠를 따는 열쇠는 자기가 구해 보겠다며 주절주절 계획을 늘어놓았다. 정작 계획을 짠 건 제이디인데 오히려 그가 더 신나 보였다. 왜 저래….
그리하여 다음 날.
두 사람의 첫 수업이 시작됐다. 그는 정말로 서관의 낡은 교실을 따는 열쇠를 구해 왔다. 어떻게 구한 건지… 착실한 외모와는 달리 이런 짓을 자주 해 본 애 같았다.
“아. 너도 알겠지만 공부하기에는 기숙사나 도서관보다 이런 조용한 곳이 좋아서.”
“잘 모르겠는데.”
수상쩍게 바라보는 제이디를 향해 그가 묻지도 않은 변명을 덧붙였다. 끼익, 낡은 목재 문을 따고 들어간 두 사람이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자리에 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네가 약한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그랬지?”
“…어? 응.”
“왜 집중을 안 해? 내 지식을 잘 흡수해야 수석을 할 거 아니야.”
“미안.”
그는 차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꾸 집중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설명을 하던 제이디가 그런 그의 모습에 짜증이 나서 눈을 들어 올릴 때면,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또 귀를 발갛게 물들이며 시선을 돌렸다.
‘어디가 좀 모자란 애 같은데.’
이틀, 사흘… 제이디는 다행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매일매일 시간을 쪼개 녹스를 만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딜론 봉투를 도로 빼앗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하지만, 기회는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순 없었다. 이딴 재미없고 쓸모도 없는 일에 더는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제이디는 오늘에야말로 그에게서 봉투를 빼앗을 계략을 짰다.
그 중요한 증거물을 기숙사에 두고 다니진 않을 테고. 봉투는 반드시 녹스의 소지품 중에 있을 것이었다.
“오늘은 그동안 가르쳐 준 걸 시험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어.”
“…어?”
오늘도 녹스는 그윽한 눈길로 몰래몰래 제이디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다 제이디가 뜻밖의 제안을 하자, 화들짝 놀라 반응했다.
“중간 점검은 학습에 있어 중요한 단계니까.”
“아… 그래. 알겠어. 준비해 온 게 있나 봐?”
제이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쪽지 시험지를 꺼냈다.
계획은 이러했다. 정해진 시간에 폐쇄된 서관 교실을 노크해 달라고 휘노와 리노에게 부탁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 부탁을 들어 달라는 말에 두 사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쪽지 시험지로 녹스의 혼을 빼놓는 동안 두 사람이 도착해 살벌하게 노크를 하면, 녹스에게 뒷문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자신은 숨는 척하다, 그의 가방에서 봉투를 슬쩍할 생각이었다.
건넨 쪽지 시험지를 받아 든 그는 한참이고 멍하니 앉아 한 문제에도 손대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이 애는 처음부터 공부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없었다. 제이디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기본자세부터가 글러 먹었는걸. 대체 저와 왜 이런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건지.
그때까지만 해도 제이디는 그저 녹스에게 자신이 아딜론에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감시하려는 목적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의로운 경관님의 아들이니 그 피를 물려받았는지, 뭔지. 그게 아니라면 제게서 아딜론 부작용 증세를 잡아내 증거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 셈이거나.
“너, 왜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아?”
“…내가 그래 보였어?”
“솔직히 말해. 다른 목적이 있는 거지?”
“…….”
“어차피 우린 거래 관계니까. 이런 문제는 툭 터놓고 말하자. 뭐가 문제야? 네 생각엔 내 제안이 불합리한 거 같아? 그럼 대안을 제시해 봐.”
줄줄 이어지는 제이디의 이성적인 말을 가만히 듣던 녹스가 조금 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미지의 생물을 보는 듯 의아한 얼굴이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왜 말이 없어? 왜 이러는 건지 설명을 해 보라구. 들어 줄 테니까. 응?”
“너… 정말 내 의도를 모르겠어?”
“진짜 다른 의도가 있었어?”
“허….”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거냐고.
그때, 약속한 시각이 되었는지 교실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
제이디는 부러 놀란 척 연기를 했다. 슬쩍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도 놀란 듯했다.
“어… 누가 왔나 봐. 어떡하지?”
“…….”
녹스는 짐짓 당황하는 듯하더니 제이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노크 소리가 들리는 뒷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뿐, 확인을 하러 간다거나 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이 더더욱 가중되는 듯 점점 더 표정이 복잡해졌다.
“녹스?”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똑똑. 똑똑똑. 쾅!
정중하게 이어지던 노크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제이디는 한껏 초조한 연기를 했다.
“어떡해?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아.”
“저러다 가겠지. 안에서 잠갔으니 어차피 못 열어.”
“집요해 보이는데….”
“괜찮아. 정말 저러다 갈 거야. 나만 믿어.”
뭘 믿어?
쾅쾅! 쾅쾅쾅쾅!
그 와중에도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녹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여전히 혼란한 얼굴이었다.
리노와 휘노는 이유도 모른 채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이대로 이쪽에서 계속 반응이 없다면 정말 걱정이 되어 마법을 이용하든 힘을 쓰든 어떻게든지 문을 따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다.
제이디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제 선에서 두 사람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세 사람이 미리 노크 사인을 만들어 두었으니, 휘노와 리노라면 금방 알아듣고 돌아갈 것이다.
“있어 봐. 내가 알아보고 올게.”
“아니. 그냥 앉아 있어.”
“그치만 시끄러워서… 아!”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향하려는 제이디의 손목을 녹스가 우악스레 낚아챘다. 절로 아픈 소리가 나올 만한 악력이었다. 당황한 제이디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녹스를 쳐다보았다.
“왜 이래?”
“너 정말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
“……뭐?”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무 감정도 없는데…! 매일 날 만나려고 했을 리가 없잖아?”
“어엉?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아….”
녹스는 화를 내리누르듯 허탈하게 웃더니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제이디가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힘이 강해져 더 아팠다.
“야! 뭔 개소리야. 너랑 나랑 거래 관계인 거 잊었어? 그러니까 만났지.”
어이없다는 듯 웃음기가 묻은 제이디의 목소리에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기회를 틈타 제이디가 홱 제 손을 빼내었다. 도대체 녹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어이가 없네….”
그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어이가 없는 건 내가 아닐까? 다짜고짜 이게 무슨. 처음부터 협박한 건 너잖아.”
제이디가 얼얼한 손목을 돌리고 주무르며 인상을 썼다. 쾅쾅! 계속해서 울리는 문소리가 이제는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덩달아 시끄럽다는 듯 눈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일단 저거부터 해결하고 다시 얘기하자.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 제이디가 다시 녹스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냥 좀 있으라고!”
그 일은 섬광처럼 순식간에 벌어졌다.
제이디는 자신이 상황을 단단히 잘못 판단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이디는 이미 녹스의 품 안에 갇힌 채였다. 그는 제이디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도록 뒤에서 옭아매듯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 상태로 제이디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그대로 체취를 맡듯 숨을 훅 들이켰다.
마치… 엄청나게 이 상황을 갈망했다는 듯이,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 그러니까 이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추행?”
충격받은 제이디가 그 한 마디를 내뱉자, 허겁지겁 이성을 차린 녹스가 제이디의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지금… 나 추행한 거야?”
처음 겪는 상황에 혼란한 제이디는 머릿속 논리 회로를 휙휙 돌렸다. 그러니까… 저보다 힘이 센 남성에게서 원치 않은 접촉을 당했을 때는….
띵. 결론을 도출한 제이디가 해결 과정을 밟았다. 양손으로 옆머리를 부여잡고 낼 수 있는 가장 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그러자 노크 소리가 멎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교실 문밖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듯 지반이 흔들렸다.
콰앙─!
“어떤 개자식이야아아!”
원드도 없이 양손에 불을 일으킨 휘노 펠리디오스가 씩씩거리며 맨주먹으로 문을 날려 버렸다.
3초.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빠른 불 마법 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