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디의 어머니 헬렌은 딸아이의 비상한 학습 능력을 일찌감치 알았다. 제이디가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이 아이를 품기에는 저희가 모자라서….”
첫 학교를 보내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헬렌은 학교로 호출되었다.
“매시간 저런 식이에요.”
헬렌은 동급생들 앞에 서서 교단 뒤 칠판을 한가득 메우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았다. 좋아하는 책의 문구를 받아써 보라는 선생님의 과제에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책 한 쪽을 그대로 외워 쓰고 있던 것이었다.
조금 더 황성과 가까운 지역의 학교로 보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는 영재예요. 그건 무척 행운인 일이지만…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다소 영향이….”
헬렌은 이번에는 현대 베르딘어가 아닌 고대 문자로 칠판을 채우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았다. 그다음 시간에는 헬렌이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수식을 막힘없이 써 내려가며 수학 문제를 단숨에 풀어 버렸다.
헬렌은 딸아이를 제 손으로 직접 가르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제이디. 이미 닦인 길만 걷는 사람은 되지 말렴. 너는 특별해. 충분히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란다.”
그녀는 모든 것을 늘 곧이곧대로만 흡수하는 딸에게 스스로 무언가를 개척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다.
모녀이자 둘도 없는 친구처럼 제이디와 헬렌은 언제나 함께였다.
“상트칠리아라는 풀이란다. 촉감이 고양이의 혓바닥 같아서 재미있지. 자, 한번 만져 보렴.”
“우아앗! 따가워!”
어린 제이디는 헬렌의 손을 잡고 숲속 길을 거닐며 나무와 꽃의 이름을 배웠고, 잡초와 약초, 독초를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매일매일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치맛자락이 더러워지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제이디는 칠판 앞의 작은 공간보다 훨씬 넓은 자연 속에서 온종일 노닐었다.
자연이 친숙했다. 손끝을 스치는 식물의 잎사귀. 귀밑머리를 스치는 바람의 촉감. 발바닥에 닿는 촉촉한 흙의 냄새. 주변 만물이 제이디의 스승이었다. 제이디는 만지고, 냄새를 맡고, 공책에 그림을 그리는 등 모든 감각을 활용해 세상을 배워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디는 자신의 놀이터이자 학교였던 숲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에 타들어 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싹 다 태워 버려!”
“예!”
그들은 제이디가 그때까지 본 적 없던 하얀 옷을 입고, 희한하게 생긴 나뭇가지를 든 채 하늘에서 뜨거운 불덩이를 소환해 냈다. 동그랗게 구름을 가르며 천공에서 떨어지는 불 별똥별이 제이디가 사랑하는 숲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길로 허겁지겁 집으로 가자, 불을 불러내던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자들이 침입해 있었다.
그들은 헬렌의 책장과 서랍을 샅샅이 뒤졌다. 그거로도 모자라 부엌의 찬장과 다락방, 식료품 창고까지 모조리 헤집어 놓았다. 엄마의 낡은 책과 공책, 실험 도구가 숲속의 식물과 함께 불타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이 맥동했다. 사랑하는 숲이 타 버린 것도 슬펐고, 이유도 모른 채 엄마와 자신의 보금자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끝내는 제이디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엄마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이거 놔요! 우리 엄마 놔 달라고요! 아악!”
“제이디, 안 돼!”
제이디는 양팔을 결박한 채 무자비하게 엄마를 끌고 가는 군인의 다리에 매달렸다. 팍! 발길질에 내쳐진 제이디는 무릎으로 재빨리 기어 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이 아이는 …
함께 도주한 친딸입니다. 당시엔 갓난아기 …
아직 어려서 충분히 교화한다면 …
처분을 논의해 본 다음에 …
저들끼리 쑥덕거리던 군인들은 다시금 매몰차게 제이디를 떼어 낸 뒤 엄마를 데려갔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오두막 마룻바닥에 앉아 제이디는 오지 않는 엄마를 한참이고 기다렸다.
그 어디에도 제이디가 사랑하던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삶을 이루던 모든 것과 생이별하고서 며칠이 지나 피골이 상접할 때쯤, 베르딘 황실의 군인이라는 자들이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제이디의 엄마가 ‘마녀’임이 밝혀져 처형되었으며, 너는 고아가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모로 누워 멍하게 쓰러져 있던 제이디는 눈을 감고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보육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실려 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매일같이 세뇌하듯 같은 말을 반복시켰기 때문이다.
“위대한 광휘의 베르딘 제국에 반기를 드는 ‘마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다. …”
말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기에 그대로 욀 수밖에 없었다.
“제이디. 엄마 말을 명심하렴. 개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의 길을 닦아야 해.”
제이디는 이를 악물었다. 마력을 일깨우겠답시고 원장이 종아리에 매질을 해 대도 모두 견뎌 냈다. 그러다 보육원 독립을 몇 년 앞둔 어느 날, ‘황립 아카데미’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장 몰래 우유 배달 아주머니와 정원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제이디는 이런저런 낡은 교재를 손에 넣었고, 입학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입학시험 날.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었다. 하지만 제이디는 코웃음을 칠 정도로 쉬운 시험지를 단 15분 안에 풀어냈다.
“고학년 수준의 수식을 이렇게나 빨리….”
“어느 가문 자제라고요?”
“거주지가 보육원으로 되어 있어요. 뿌리 출신이군요.”
“…예?”
보육원 출신 평민의 수석 입학. 전액 장학생. 쉬이 있을 수 없는 사건에 황립 아카데미의 등불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원장은 그 아이를 당장 입학시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적힌 황립 아카데미의 통지서를 벅벅 찢었지만, 베르딘 황실의 직인이 찍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학금을 들려 제이디를 황성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입학 당일, 수석 입학자에게 수여되는 배지를 교복 깃에 달며 제이디는 노을 지는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인한 해적선의 돛처럼 펄럭이던 새빨간 머리와 아스라이 떠오르는 여명에 총명하게 빛나던 장밋빛 눈동자….
엄마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엄마의 얼굴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
긴긴 잠에서 깨어난 제이디는 조용히 눈을 떴다.
간만에 엄마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본 건데, 제이디는 울고 있었다. 눈꼬리로 흐른 눈물을 닦아 낸 제이디는 차가운 침대 시트를 손으로 문질렀다. 마치 그리운 이의 온기를 찾듯 하염없이.
악몽이어도 좋았다. 오랜만에 엄마를 봤어.
“제이디. 너는 특별해. 너는 특별해. 너는….”
읊조리며 떠나간 이의 흔적을 되짚어 보지만, 딱히 위로는 되지 않았다.
지난 의료 봉사 이후로 마음이 심란해 이런 꿈을 꾸었나….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그때 그 잔인한 현장과 감정이 불현듯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축축한 베개가 속절없이 차가워 제이디는 그만 머리를 들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레이디, 오늘도 안색이 좋지 않네요.”
“내가 그런 말투 소름 끼친다고 했지?”
“진짜야. 너 요즘 좀 파리해. 무슨 일 있어?”
“이 정도는 괜찮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눈두덩을 문지르는 제이디의 주변을 한 장정이 맴돌았다. 밝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났다.
인문학부 4학년 리노 슈펜하이어였다. 타고난 호감형 외모와 미적 감각으로 베르딘 황성의 예술계, 사교계를 주름잡는 슈펜하이어 백작가의 셋째 아들, 즉 귀족이었다.
제이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건 요즘 잠자리가 영 시원찮아서였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서 진로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의료 봉사 때의 무마취 절단 수술 일이 자꾸 생각나기도 하고. 게다가 여전히 실험실의 생쥐 알프레드에게 유클라디오 독즙을 주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약제사는커녕 인정 많은 바보 제이디 헤이스터로만 역사의 한 쪽을 장식… 아니. 역사는 무슨. 그냥 지나가는 황성민 1로만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그런 건 죽어도 싫은데.’
제이디의 시큰둥한 반응에 금세 관심이 식었다는 듯 리노가 정면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옆으로 내밀었다. 마치 펜 빌려 달라는 말에 별다른 사족 없이 응하는 사람처럼 무덤덤한 태도였다.
퀭한 눈으로 시선을 돌린 제이디의 눈빛이 순간 마력구가 켜진 듯 반짝 빛났다.
“요르디히 계란 비스킷? 이걸 어떻게 구했어?”
너무 인기가 많아 입고되는 날 시장 거리에 나가도 줄을 서서 사 먹어야 한다는 디저트였다. 지난 게릴라전이 일어난 날, 록펠라 광장에 외출했을 때 제이디와 휘노의 최종 목적지도 바로 요르디히 제과점이었다. 비스킷 포장 상자를 건네받은 제이디가 건국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하리몽드 티백이랑 묶음 구성이잖아! 정말 나 주는 거야?”
“통 못 자는 거 같아서.”
하리몽드는 불면을 완화하는 미미한 신성 마법 주문이 걸린 최고급 마법 차였다. 잘 키운 아카데미 메이트, 열 친구 안 부럽다. 제이디는 누가 보고 채 갈라 비스킷 상자를 제 가방에 냉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분석적인 태도로 돌변해 리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은근히 세심한 구석이 있어.”
“그걸 이제 알았어?”
“너 말이야… 이런 거 아무한테나 주면 안 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 그런 용안으로 남용하는 호의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그것도 이제 안 거고?”
제이디의 말은 리노가 2학년 때부터 그녀와 친해지게 된 이유와 밀접했다. 제이디는 리노가 자신이 가진 고유의 따뜻하고 섬세한 성품을 보여도 연애 감정으로 오해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여자 사람 친구였다.
제이디는 급기야 턱 끝에 손가락을 대며 진중한 태도를 보였다. 표정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심각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너는, 있지. 졸업할 때까지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나는 괜찮은데 휘노나 유리아나 뭐 이런 애들한테 별생각 없이 잘해 주고 그러면 안 돼. 물론 조금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너도 참 너만의 고충이 많겠다 싶어.”
“어…… 그렇지.”
자기 객관화에 관한 친우의 충고를 드디어 듣게 될 줄이야.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서야 자신의 본질적인 고민을 제이디에게 이해받게 된 리노였다. 그것도 꼴랑 비스킷 하나에.
허무해진 리노가 잠깐 흐린 눈을 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대화를 이었다.
“방학 땐 어디서 지낼 생각이야?”
“글쎄. 절반은 기숙사 잔류, 절반은 휘노네 저택에서 보낼 것도 같고. 얘기는 아직 안 나왔지만 늘 그랬으니까.”
“…….”
리노가 말간 얼굴로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마지막 방학인데 대학 탐방이나 여행 같은 건?”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진학할 생각이 없어?”
“그냥 계속 고민 중이야.”
리노가 의외라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제이디만큼 영리한 인재라면 어느 대학에서든 환영할 텐데. 공부에는 딱히 뜻이 없는 리노였지만, 제이디가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건 본인이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아 보였다.
“…혹시 후견인이 필요한 거면 내가 아버지께,”
“아! 지각이다.”
낡은 가죽 손목시계를 확인한 제이디가 리노의 말을 끊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 말에 리노가 본인의 시계를 확인했지만, 수업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로웠다.
“…….”
제이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받을 만한 소소한 호의에는 크게 반응하여도, 큰 도움을 주려고 하면 금방이고 뒤돌아서 홀로 걸어갔다.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제이디에겐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있었다. 그 벽은 평민 출신 아카데미생들이 으레 가진 자격지심이나 자존심과는 다른 맥락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 단단히 숨기는 게 있었다.
‘비밀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안타까운 거지. 매번 혼자서만 감당하고 버텨 내려 하는 게. 조금은 털어놓고 짐을 덜어내 봐도 좋겠는데. 리노는 제 친구의 왜소한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의 안에는 어떤 비밀과 마음이 숨어 있는 걸까.
“같이 가.”
마지막 방학까지 단 4주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리고 그 4주는 제이디가 거쳐 온 4년간의 아카데미 생활을 송두리째 뒤엎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