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친위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날은 황실이 ‘반란기’라는 용어를 최초로 공표하며, 혁명군과의 전면전을 선포한 날이었다. 마침내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정신을 다스리고, 신분을 위장하고, 자본의 흐름과 돈을 그러모으는 법을 익히고, 하나둘 동료를 모으고, 지하 도시를 발견해 키워 나가고, 총기를 개발하고, 반란을 주도하고….
수차례 시간을 돌아오며 리안은 조금씩 정답에 가까워졌다. 예전엔 없었던 ‘최초의 미래’를 보는 때도 많아졌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패인을 분석하여 기술을 발달시키고 그 발달한 기술과 지식을 들고 돌아가 다시 발달시켰다. 기술의 발전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어떤 시간대에서는 오직 기술 하나만을 위해 시간을 전부 투자하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은 현 시점의 제국군이 단기간에 따라잡지 못할 만큼 격차를 벌려 놓았다.
탕─
“너무 빨라!”
“저런 총은 본 적도 없다고!”
철컥, 타앙─
그날. 아에론이 저를 배신하고, 은색 머리 아카데미생이 자신에게 고약한 풀을 먹인 날. 그날은 리안이 겪어 보지 않은 ‘최초의 미래’였다.
황실 마법대가 광장 거리를 급습해 게릴라전이 발발했다. 휴일이었던 터라 상인 및 민간인과 더불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카데미생들까지 휘말리고 있었다. 리안은 미리 파악해 둔 적군의 경로로 재빨리 말을 몰았다. 그리고 광장에 합류하려는 적군 보병들을 습격했다.
“아악!”
“장전! 빨리!”
제국군 정규대 보병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드는 총알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장식 머스킷을 든 병사들이 저마다 꽂을대로 화약을 다지며 우왕좌왕했다.
철컥─ 탕!
그런 와중에도 끝도 없이 날아드는 총알에 벌써 대여섯 명의 병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갈색 머리 청년 하나가 달리는 말에 앉아 화약 연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평민 복식으로 위장한 리안 베르딘이었다.
빙글, 여유롭게 총을 돌려 또 한 발 장전을 마친 그가 부산스러운 병사 한 명의 다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철컥, 방아쇠 아래 금색 레버를 밀어내자 팅, 공중으로 탄피가 솟아올랐다.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탄피 너머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사냥감을 주시했다. 금속 탄피가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 숨을 멈추고, 희끄무레한 연기 사이로 보이는 적에게 조준, 발사.
탕─ 총알은 다시금 정확히 적군에게 명중했다.
‘저리 굼떠서야.’
일대의 머스킷 부대가 미처 총 몇 발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전멸했다. 황실 마법대만 믿고 훈련과 총기 개발을 게을리하니 이런 진풍경이 나오는 것이었다. 수준 낮은 정규대의 전투 실력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팅, 마지막 탄피가 떨어졌다. 달각… 달각… 총알을 재장전하는 소리가 유유히 울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맵싸한 화약 연기가 흩어질 때쯤엔 이미 정체불명의 청년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렇게 리안은 광장 거리의 마법대에 합류하려 한 정규대 보병을 단신으로 가뿐히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시가전이라니. 아주 미쳐 돌아가지.’
리안은 제국군이 급습할 거라는 정보를 첩자를 통해 이미 전해 들은 뒤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혁명군에게 암호문으로 소식을 알리고 신식 무기를 보급하라 지시했다.
총의 위력으로는 살상 마법을 이길 수 없으니,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마법은 그 위력이 강한 만큼 시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자신이 개발한 총이라면 그사이 몇 발은 쏠 수 있었다.
광장과 가까워지자 멀찍이 건물이 붕괴되는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재빨리 말을 몰아 난리 통으로 향하자, 예상과는 달리 수세에 몰린 혁명군 세력이 보였다.
‘왜?’
예측이 빗나가자 리안은 어디서 오류가 생겼는지 바쁘게 추론했다.
“격발이 안 됩니다!”
“탄피가 젖었어! 제기랄!”
누군가 종이 탄피에 물을 뿌렸다. 화약이 썩고, 총탄이 무용지물이 됐다. 저마다 은폐한 채 엎드려 있던 혁명군이 발포되지 않는 총을 들고 당황했다. 재빨리 구식 머스킷으로 무기를 바꾸었지만 그런 느린 총으로는 마법대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전멸이 예견되자 붉은 연기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퇴각 신호였다. 일찌감치 도망친 첩자의 흔적을 쫓았더니 아에론이 있었고… 그 이후 또한 모두 예측하지 못한 미래였다.
이번엔 독을 맞고 죽게 되다니. 아에론이라는 패를 버리라는 신의 자비인가. 조금, 아니 많이 귀찮긴 하지만 처음도 아니니 다시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웬 막무가내 아카데미생이 등장할 게 뭐람.
“움직이시면 안 돼요…! 처음이란 말이에요.”
“제가 경을 살린 건가요?”
“몸조심하시고요.”
뭐 때문에 그렇게 악착같이 자신을 살리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의를 봐서라도 살아 줘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육체를 포기하지 않고 본부로 돌아가 후속 처치를 받았다.
의술을 담당하는 혁명군 간부 헐리 무니가 몹시 충격받은 얼굴로 조악하게 처치되고 수술된 리안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 이거 정말이지….”
세세히 리안의 몸을 살피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끔찍한 봉합이네요.”
“…….”
“하지만 상황을 고려하면 꽤나 순발력 있었다고 해야 할지.”
“뭐, 집중력이 나쁘지 않았다.”
제 어이가 그 저돌적인 추진력을 따라가지 못했을 뿐….
“무슨 풀을 먹이더군. 생으로.”
“예? 아니, 그게 뭔 줄 알고 받아먹어요?”
헐리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양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했다.
“받아먹은 게 아니라….”
리안은 별달리 설명할 재간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쓰고 역한 향이 나는 보라색 풀이었는데.”
“해독초? 그런 건 어디서 구했대. 어떻게 생긴 건지 기억나요?”
“세인트… 어쩌고. 작은 꽃이 달린 잡초 같았다.”
“…….”
그 말을 들은 헐리가 이번에는 멍한 얼굴로 몇 차례 눈을 끔뻑거렸다. 리안은 어쩐지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먹자마자 빠르게 해독되는 게 느껴졌어.”
“…운 좋은 줄 아세요. 저한테 안 왔으면 그대로 죽었을걸요.”
“죽어?”
뜻밖의 말에 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약초는 100도 이상의 물에서 5분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초 안의 성분이 몸속에서 발현되면 독보다 더한….”
쿨럭!
타이밍 좋게도, 그 순간 리안이 새까만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오감과 전신이 마비….”
“이, 런… 몸이….”
“무례하시네요. 그쪽 목숨이 저한테 달려 있다고요.”
“이걸 먹고 안 죽는다는 보장은.”
“…없지만서도?”
확실히… 달려 있긴 달려 있었네.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쪽으로.
몇 차례 더 검은 피를 토하던 리안이 그대로 혼절하고, 헐리가 그런 그를 애처로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래요. 눈 좀 붙이고 계십시오.”
그는 잘못 처방된 해독초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차분히 움직였다. 수분 안에 해독하지 않으면 그대로 즉사하지만, 그럼에도 무척이나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비단 그에게 한쪽 다리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든 급하면 화를 초래한답니다.”
헐리는 리안이 회귀를 시작한 후로 몸에 신성 마법이 통하지 않아 어렵사리 구한 민간 의사였다. 그는 황실의 감시를 피해 약장사를 하며 먹고살다가 발각돼 ‘마녀재판’에서 다리 한쪽을 잘렸다. 이후 우연히 다친 리안을 도와주다 회유되었다. 돈이 궁한 녀석이었던지라 로제타에 비하면 끌어들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조금 까칠하다는 게 흠이지만.
아무튼지, 그리하여 가까스로 되살아나고도 리안은 며칠을 앓아누워 있어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피골이 상접한 채였다.
헐리 무니가 이건 살인 미수라며 당장에 색출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들들 볶았지만, 리안은 이 건을 아에론의 독에 의한 피해였다고 일단락했다.
비록 생명을 살린다는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으나 그렇다고 실패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했다. 해독초의 순간 해독 작용이 없었다면 골목가를 벗어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절 잊어 주세요. 그게 제가 바라는 은혜겠죠.”
그 장밋빛 눈에 담긴 감정은 다양했다. 열망, 도전, 반골 정신 그리고 진심. 그것들이 조합된 눈빛은 확실히 새로웠다. 그리고 리안에게 필요했다.
잊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리안은 그 아이가 궁금했다. 어쩌면 또 다른 인과관계에 엮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실의 개를 기르는 황립 아카데미에서 그토록 위험한 공부를 하고 있다니. 과연 언제, 어디까지 이단 학문을 연구할 수 있을까.
【사람 한 명 좀 추적해 줘요.】
그래서 리안은, 한 명씩 동료를 구할 때마다 그러했듯 이번에도 제 직감을 실험해 보고자 했다. 사실 이미 리안의 눈앞에는 혁명군이 된 그 학생의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 * *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 여자 기숙사.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끼익… 복도 깊숙이 위치한 기숙사 방의 문이 조심조심 열렸다. 문틈으로 뽀얀 실내화를 신은 발 하나가 쏙 빠져나왔다. 달빛을 받은 은회색 머리카락이 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파자마 원피스 위에 분홍색 롱 카디건을 걸친 여학생이 좌우를 살폈다.
사감 선생님이 지나가는 소리가 멀어지자, 옷깃을 여민 여학생이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기숙사 건물의 폭신한 바닥재는 천으로 만든 실내화의 소음을 완벽히 흡수해 주었다.
한밤에 무단 외출을 감행한 학생, 제이디 헤이스터가 빠르게 발을 놀려 기숙사 입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했다. 아치형 뒷문을 통과해 밤의 교정으로 나온 제이디는 3년 동안 착실히 개척해 둔 지름길에 올랐다.
밤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은 수풀을 지나 돌계단을 내려가자 아카데미 서관의 버려진 창고가 나왔다. 제이디는 랜턴에 불을 붙이고 스산한 소리를 내는 문짝을 지나쳐 먼지 쌓인 구석으로 향했다. 퀴퀴한 먼지와 끈적한 거미줄을 요리조리 피해 목적지에 당도한 제이디가 랜턴 불빛을 발밑으로 비추어 보았다.
찍…. 덫에 걸린 쥐 한 마리가 애처롭게 바동거리며 찍찍거리고 있었다.
“잡았다.”
이렇게 또 한 번 쥐 사냥에 성공했다!
제이디는 기쁘게 미소 지으며 덫을 놓아둔 자그마한 철창의 문을 닫았다. 쥐가 든 케이지를 들고 다시 재빠르게 이동해 당도한 곳은 서관 건물이었다. 석조 건물의 벽을 짚으며 조심조심 기척을 숨기고 문단속이 가장 허술한 뒷문 중 한 곳으로 침입했다.
곧 제이디는 로건 교수의 연구실 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의 너저분한 책상 밑 카펫을 들추고 마룻바닥에 난 문을 열어 경사진 나무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내 두 사람의 아늑한 비밀 연구실이 나왔다.
“미치겠어, 정말.”
먼저 온 로건이 제이디의 손에 들린 케이지를 보며 질색했다.
“교수님 몸에다 실험하게 해 주시든가요?”
“실험체가 필요하면 교배를 시키든 좀 더 청결한 동물을 쓰든. 꼭 그런 더러운 쥐 새끼로 해야겠냐?”
“번거롭게 굳이.”
“그게 더 번거롭다는 생각은?”
“딱히. 전혀요.”
“하여간 안 맞아.”
“치.”
늘 그렇듯 두 사람은 또 유치하게 티격태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