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춘 남자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록산느 보육원에서 지내는구나.”
아이의 옷에 달린 보육원 브로치를 확인한 그가 인자한 목소리를 내었다. 뜻밖의 반응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사분과 눈을 마주쳤다.
“제, 제가… 저는… 죄송합니다!”
아이가 그제야 횡설수설하며 한발 늦게 사과했다.
“이름이 뭐니?”
“…투산이라고 해요.”
“그래. 투산. 그쪽으로 가는 길인데 안내해 주렴.”
몸을 일으킨 그가 마치 귀족 영식을 대하듯 정중한 어조로 제안하며 미소 지었다. 아이는 급기야 어안이 벙벙한 채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청명한 푸른 눈과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음영 속에서도 짙푸른 초록빛으로 빛났다.
마침내 아이가 앞장서서 남자를 록산느 보육원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께서 어찌 제 보육원에…. 혹시 입양이나 후원을 하시려는 걸까. 그런 추측을 해 보았지만 보육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로서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보육원에 도착한 순간, 아이는 이전보다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
“모리스 백작님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공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마구 달려오기 시작했다. 빨래를 널고 있던 다이앤 원장이 하던 일을 곧바로 멈추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 숙였다.
다이앤 록산느. 혁명군의 중요한 정보꾼, ‘비둘기’였다. 그가 정중하게 다가가 인사했다.
“레이디 록산느를 뵙습니다.”
“기별도 없이 찾아오시는 건 여전하십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기별 같은 게 없어도 만남을 예견했을 거면서. 남자는 살짝 모자를 들며 입꼬리를 늘여 웃었다. 과한 겸양임에도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도리어 그를 그답게 하였다.
‘…백작님?’
생각보다도 훨씬 높은 신분에 투산이 새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대귀족을 이토록 가까이 마주하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선뜻 알아볼 법한 신분임에도 백작님이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자신이 그저 길거리에서 먹고살기 바빴던지라 그런가,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
“못 보던 아이인데.”
그가 투산을 눈짓했다. 까무잡잡한 피부, 총명하면서도 예의를 아는 소년. 다이앤 록산느가 투산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며칠째 거리를 헤매는 것을 발견하여 데려왔습니다. 록펠라 시장 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갔다더군요.”
“포로수용소 쪽은?”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협상을 요구하길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비슷한 사연이 있는 아이들을 잘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보고 싶었어어….”
그때, 아직 말이 서툰 네 살배기 어린 여자아이가 널려 있는 하얀 시트를 헤치며 다가왔다. 짧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묶은 아이가 딜레앙 백작의 다리에 달라붙어 칭얼거렸다.
“클로에!”
다이앤 원장이 아직 예절 교육이 되지 않은 아이를 떼어 놓는 것보다 딜레앙 백작이 아이를 들어 올려 안는 것이 더 빨랐다.
“그새 또 컸구나.”
아이는 백작의 품이 그리웠던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다이앤은 그저 난처한 얼굴로 쩔쩔매며 묵례할 뿐이었다.
클로에는 태어나자마자 요람째로 보육원 앞에 버려진 아이였다. 모리스는 그 첫 만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한겨울, 눈 덮인 거리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던 갓난아기. 그 작고 뜨거운 생명을 내려다보며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이 어린것을 버려야 할 정도의 가난이란 무엇일지, 모든 버려지는 것은 종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이후 그는 몇 년간 이곳에 들를 때마다 아이의 성장을 모두 눈에 새겼다.
백작의 품에 안긴 클로에가 그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자그마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아이를 안은 채 다이앤을 따라 보육원 입구로 향했다.
뿌리가 굵은 플라타너스 고목들이 저마다 이파리를 흔들며 연주하듯 싱그러운 소리를 내었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을 빼면, 어제처럼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었다.
“그나저나, 간밤 먼저 온 손님이 계십니다.”
다이앤이 백작을 향해 차분히 일렀다. 그는 클로에를 내려 두고 보육원 지하로 난 계단으로 향했다.
“백작님, 어디 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금방 등을 보이는 백작을 보며 클로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살짝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를 올린 그는 대꾸 없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아이는 어떠한 직감을 느낀 듯이 불안한 얼굴로 다이앤의 치마폭을 꼬옥 붙잡았다. 그가 사라진 자취에 금방이고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록산느 보육원의 지하는 총 다섯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상 건물이 3층짜리인 것치고는 아래로 꽤나 깊숙한 구조였다. 지하 2층까지는 보육원의 창고와 위장용 층으로 쓰였으나, 지하 3층부터는 별세계였다. 이곳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혁명군의 군용 물자를 저장하고 전투 훈련이 이루어지는 비밀 기지 중 한 곳이었다.
가장 깊숙한 복도 끝에 난 철제문을 열고 들어간 그가 모자를 벗었다. 희미한 주광색 마력구 빛을 받은 윤기 나는 고동색 머리칼이 사락, 관자놀이로 내려왔다. 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가 밝은 올리브색으로 물들었다.
방에 있던 간부들이 묵례하며 예를 표하였다. 그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가며 장갑을 벗어 목재 탁상 위에 올렸다.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에 딜레앙 백작가의 문양이 무척 정교한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탁상 맞은편엔 며칠 전 시가전에서 혁명군을 배신한 첩자가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 이미 반쯤 시체가 된 모양새였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백작을 보더니 실성할 듯 놀란 얼굴로 뻐끔거렸다.
“어… 어떻게 살아 있지….”
“…….”
“분명… 내가….”
“풀어 줘.”
백작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첩자에게 다가간 수하 하나가 나이프로 그의 결박을 풀어내었다.
천천히 다가간 백작은 그가 앉은 의자를 망설임 없이 발로 걷어찼다. 쿠당탕, 의자가 넘어지고, 관자놀이를 마룻바닥에 찧으며 나뒹군 첩자가 신음을 흘렸다. 사지가 자유로워졌지만 이미 군데군데 골절된 터라 기듯이 움직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너를 너무 믿었다.”
“어떻게 살아 있냐 했어!”
퍽, 바로 옆에 있던 혁명군 간부, 붉은 머리 로제타가 주절대는 입에 발길질했다. 맞은 입술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이어 백작이 바닥에 엎어진 첩자의 배를 걷어찼다. 엎드렸던 몸이 뒤집히자 가슴팍을 지르밟으며, 부드러운 몸짓으로 미간 정중앙에 피스톨을 조준했다.
“……!”
“목적이나 들어 보지.”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음을 깨우친 첩자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하하하, 큰 소리로 웃어 젖힌 그가 안광을 번뜩이며 백작을 노려보았다.
“목적 같은 게 없다는 건 이미 눈치챘을 텐데.”
“…….”
“백작. 나는 그저 되는 패에 걸었을 뿐이다. 네놈이 바보같이 걸려든 거야.”
“격발이 안 됩니다!”
“탄피가 젖었어! 제기랄!”
“첩자다! 이미 달아났어!”
“아에론… 말도 안 돼.”
그래도 꽤나 믿었던 녀석이 배신할 줄은 몰랐다.
“아에론의 거동을 주시하십시오. 근래 들어 옷단에서 제국군의 조악한 화약 냄새가 난다더군요. 헐리의 후각은 정확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어쩌면 알면서도 그를 믿고 싶었기에 부정했던 건지도 모른다.
수차례 시간을 되돌아오며 백작은 늘 과거의 패인을 분석했다. 많은 경우 사람이, 아니, 사람을 너무 믿은 자신이 문제였다. 그토록 생을 돌아왔으면서도, 사람을 쉽게 믿는 건 그의 외로움이 빚어낸 고질적인 버릇이었다.
“멍청한 놈. 애써 봤자 우린 모두 황실의 개다. 운명을 거스르지 마라.”
그래서 그에게 모욕당하고도 그를 붙잡자마자 바로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독이 묻은 칼로 옆구리를 찌를 것을 예상하고도 그냥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사람을 너무 믿은 자신에게 스스로 주는 벌이었다. 이번 시간도 실패한 거라면… 그런 거라면. 다시 돌아가면 돼.
“너는 늘 금방이라도 떠날 눈빛을 하는구나.”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도 그때마다 친우가 되었던 아에론이 제게 해 주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아픈 아내와 어린 딸이 제게 보였던 호의 같은 것도 떠올랐다. 배신당한 주제에, 그만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애써 두둔했다.
배반의 순간 아에론이 찰나 망설여 급소를 찌르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가 조금은 ‘우리’에게 감화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모리스 딜레앙, 아니 리안 베르딘은 믿었다. 믿겨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아에론. 너는 날 죽이지 않았어.”
“…….”
“급박하지 않았어도 죽이지 않았겠지.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게 그 증거다.”
그 말에 아에론이 한차례 헛웃음을 치더니 시선을 돌렸다.
“네가 죽어도 달리아가 대학에 갈 때까지는 살펴봐 주마.”
“…그런 약해 빠진 정신으로 반역을 하겠다니.”
“약한 게 아니야. 자비와 힘은 반비례하지 않아. 반대라면 모를까. 그건 너도 알아.”
어느새 총을 거두고 의자에 앉은 리안이 긴 다리를 꼰 채 면포로 피스톨을 닦아 냈다. 퉤, 피를 뱉어낸 아에론이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늘어놓았다.
“난… 네놈의 그런 면이 역겨웠어. 아군을 사지로 내몰고… 윽, 혼자서만 고고한 척, 핏방울 한번 묻힌 적 없다는 듯…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이….”
“…….”
“네가 날 믿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네 판단력을 신뢰하게 되었을 테고, 그랬다면 내 신념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
리안은 다 닦은 피스톨을 도로 허리 뒤에 매달고서 묵묵히 친우의 밑바닥을 감상했다. 로제타가 총을 빼 들었다.
“그러게 왜 날 믿으셨습니까. 왜 나 같은 걸 믿어서….”
그가 힉힉거리며 리안을 비웃었고, 리안은 그의 눈에서 일말의 진심을 읽었다. 그러자 마음이 공허해졌다.
무언가를 완전히 믿는 것은 어리석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때때로 죄악과도 같다.
하지만 리안은 숱한 시간을 함께해 온 심복 아에론을 쉽사리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가 없었다. 따뜻함을 잃지 않고, 무언가를 믿는 마음을 잃지 않고 이 사명을 다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리안은 ‘리안 베르딘’이라는 사람의 본성과 자아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을 잃었던 몇 번의 과거에서 자신은 저 황좌에 앉은 폭군 자비에르와 다를 바가 없었고, 그런 자신에게 남은 건 불행뿐이었다. 아에론을 포함해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동료들을 만나며 가까스로 다시 자아를 찾을 수 있었는데. 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때였다. 찰칵, 탕!
더 이상의 모욕을 견딜 수 없었던 로제타가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피스톨을 당겼다. 격발된 총알이 정확히 아에론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총을 맞았다기보다는 터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아 보였다.
“…….”
정적이 일었다. 리안의 입이 속절없이 설핏 벌어졌다.
“간 떨어지겠다, 인마.”
냉혈한 간부의 총 한 발에 어설픈 감상과 추억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참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왔다. 수하들이 아에론의 시신을 끌고 나갔다.
“뭘 또 들어 주고 있습니까. 시간이 아깝습니다.”
로제타의 무뚝뚝한 한마디에 리안이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곧 졌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맞다. 시간은 늘 아깝지.”
“그 감상적인 눈빛은 뭐였습니까? 진짜 못 봐주겠던데.”
“…알지도 못하면서.”
공감받지 못한 리안이 체념적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아, 미간이 지끈거린다.
로제타. 저 소문난 인간 병기를 혁명군 세력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알아내는 데만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답은 의외로 심플했다. 가끔은 억만금의 돈도, 최신식 기술이 탑재된 무기도 정답이 아닐 때가 있었다. 대신 동방에서 넘어온 최고급 수제 디저트 같은 것이 의외로 현답인 경우가 있다.
잠시 생각하던 리안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었다. 오후 시간인데, 시침은 숫자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리안의 눈빛이 다소 가라앉았다.
“담배 드려요?”
그는 질문에는 대답 없이 시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로제. 나는 누굴 믿어야 할까.”
“믿기는 뭘 믿어요, 없어 보이게. 설마 그거 때문에 감상적이었습니까?”
로제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리안은 다시 조금 억울해졌다. 아에론은 늘 내 편이었는데!
“신뢰 없이 어떻게 사람을 움직여?”
“나 화과자가 떨어졌던데.”
말을 말자…. 리안이 눈을 굴렸다.
“이번엔 다른 나라 걸로 안 될까요? 뭔가 단맛이 조금 질려서.”
슬쩍 눈짓 한번 하는 것으로 수하에게 새 다과를 공수하라는 명을 내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을 마치고 보육원을 나서는 그의 뒤로 다시 아이들이 따라붙었다. 상냥하게 미소 짓는 그의 곁으로 클로에가 다가왔다. 달라진 분위기를 귀신같이 눈치챈 것인지, 아주 옅은 피 냄새를 맡은 것인지 조금 주저하는 몸짓이 느껴졌다.
빤히 제 얼굴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이 햇빛을 받아 살굿빛을 띠자, 기시감을 느낀 리안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참 예쁜 눈이지.”
“백작님, 또 언제 올 거예요? 응?”
그는 애교 어린 클로에의 말에 빙그레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약 없이 돌아서는 그의 등에서는 늘 그렇듯 상쾌한 향이 풍겼다.
한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그다지 개운하지 않았다. 그는 아에론에게 당한 날을 회상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날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도. 그러자 어두침침한 골목가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던 분홍색 눈동자 한 쌍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 꼭 살릴 거니까.”
다부지기 짝이 없던 학생의 말들을 곱씹던 그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내려왔다. 게슴츠레 떠진 눈동자에 찰나의 질책이 서렸다.
살리기는 개뿔. 저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그 녀석은 절대 모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