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5)화 (6/116)

다음 날 아침.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 학생 전원이 조찬회를 위해 연회장에 모였다. 어제 광장에서 일어난 시가전과 관련하여 하임스 학장이 직접 황실의 계엄령을 전달하고 비상 행동 강령을 발표하기로 했다.

교복을 입고 학부별로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이 저마다 수런거렸다. 제이디는 인문학부에 배정된 자리에 앉아 어제 겪은 일을 회상했다.

지옥도를 보듯 불타오르던 록펠라 광장. 무자비하게 포로들을 핍박하던 제국군의 횡포….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 그 순간의 공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계엄령이라니….’

제이디는 침울하고 피곤한 얼굴로 눈앞에 정물처럼 놓인 전채 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저를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돈을 처발랐다’는 인상이 강한 황립 아카데미의 조찬회인 만큼 양질의 식사를 기대할 수 있겠다만 타이밍이 별로였다. 저 혼자만 세탁을 맡긴 교복 대신 편안한 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기심 찬 눈초리를 받는 것도 그것 때문이리라.

이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지도 어언 4년 차. 제이디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본인이 아카데미 내에서 신비주의로 유명한 학생이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예쁘장하고 영리해 보이는 외모에, 입학생 중 세 명밖에 선발하지 않는 수석 장학생이자 매해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건 꽤 어려웠다.

그녀와 3년째 룸메이트인 휘노는 명실상부한 펠리디오스 후작가의 고귀한 막내 아가씨. 그나마 말을 좀 섞는다는 릭시, 록시 유디아 쌍둥이는 무려 학생회 소속 유명인. 거기다 같은 인문학부 소속이자 아카데미 최고의 미남 리노 슈펜하이어와 수업을 같이 다닌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로건 교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까지!

자신이 ‘친해지고 싶은’, ‘말 걸어 보고 싶은’, ‘정체가 궁금한’, ‘인맥이 굉장한’, ‘궁극의 신비주의’ 등등의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것이었다.

때때로 시기나 질투 어린 아이들이 그녀에게 짓궂게 구는 것도 그 비슷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또한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이디는 종종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고민을 했다.

장내가 웅성거렸다. 하임스 학장이 단상 위로 올라서자 학생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지식의 정수에 올라앉은 듯 고고하고 총명한 푸른 눈동자가 연회장의 조명을 받아 선명히 빛났다. 늘 그렇듯 조금은 정돈이 필요해 보이는 회색빛 백발을 길게 땋아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늙수그레하다고 하기에는 미묘하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장년과 노년 사이의 남자였다.

학생들을 주욱 둘러본 하임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일동이 다시 착석했다. 조금 뜸을 들이던 그가 또렷한 발음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현 베르딘 제국은 반란기를 겪고 있습니다.”

‘반란기’라는 단도직입적인 단어가 나오자 스산한 정적이 일었다. 집중하지 못하고 소곤소곤 떠들던 학생들마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황성을 시작으로 제국 곳곳에 신분 개혁과 산업 규제 완화를 촉구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베르딘 황실은 반란 세력인 혁명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요. 근래 들어, 제국을 둘러싼 정세가 점점 악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임스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가며 학생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마주치듯 눈을 굴렸다. 그의 눈동자에 야윈 은발 머리 여학생이 잠시 맺혔다 떨어졌다.

“그러나 동요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국의 상아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이 변한다 하여도 저 먼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는 신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변치 않습니다. 신은 제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맥동하는 마력이 그것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마법학부 쪽에서 수긍하듯 끄덕거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몇몇은 고조되어 비장하게 눈을 빛내기도 했다. 그 모습들을 보며 제이디는 관성적으로 질색했다.

“제국의 상아탑을 수호하는 학장으로서, 어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한 마땅한 보상과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무도하고 잔악한 혁명군으로부터 신성한 베르딘 제국의 상아탑을 지키기 위해 추후 합당한 정당방위를 행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누구라도 이곳에 흠집을 내려는 자가 있거든, 물러서지 않고 강경히 대응할 방침입니다.”

술렁술렁. ‘정당방위’라는 말에 고요했던 장내가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

아니, 제국군이 먼저 시작했다니까요? 뭘 알고나 말하는 거 맞아?

“그 누구라도 황립 아카데미의 위상을 얕볼 수 없도록 말입니다.”

급기야 마법학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행정학부 또한 박수를 쳤다. 인문학부만이 멀뚱멀뚱 사태를 관람할 뿐이었다.

제이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은 격변하고 있었다. 이미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신흥 부호들이 떠오르는 세력으로 자리매김 중이었다. 힘도 자본도 없던 자들이 기술에 힘입어 막강해지자 흔히 황족과 귀족이라 불리는 고위층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꺾이는 권세를 바로잡고 비호하기 위해 갖가지 규제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역사가 이미 몇십 년을 이어 오고 있었다.

인쇄물 압제니 과도한 세금이니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이디가 특히나 불합리를 느끼는 정책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 민간 의술 탄압.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귀한 신성 마법사를 고용하는 데는 부담스러운 비용이 들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황실은 ‘마법 없이 육체를 치료하는’ 의술을 탄압했다.

특히나 약초학은 이 땅의 뿌리에서 시작하는 학문이었고, 비싼 신성 마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원주민과 평민 사이에서 전수돼 왔다. 그러나 황실 마법부는 이들을 신의 권능에 대항하는 ‘마녀’로 몰아갔다.

또한 그들은 산을 불태워 약초들의 씨를 불살랐다. ‘마녀’ 취급을 받으며 몰려난 학자들은 황성에서 멀어져 갔으며, 젊은이들은 돈이 되지 않는 위험한 걸 배우기보다 황성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렇게 떠나간 이들은 다시 변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둘째로는 건스미스 탄압.

황실은 사제 총기를 제작하는 장인들을 탄압했다. 총기 제작 기술의 발전을 막기 위해 화약값을 천정부지로 올리고 막대한 세금을 먹였다. 제국의 군사력과 다름없는 살상 마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하여.

따지자면 황실은 지금 언론, 경제, 의료, 군사 기득권을 꽈악 쥐고 있는 셈이었다. 마법… 그 신성하고 신비로운 하늘의 힘에 반하는 범속한 의술과 기공은 여전히 배척당하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이디가 보기에 혁명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받아들여야 할 사회의 움직임이자 새 시대를 향한 태동이다.

제국은 무엇이 두려운가? 평화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군의 의견을 말살하며 폭정을 펼치다니. 평민인 제이디의 눈에는 저들의 고귀한 위상과 혈통을 잃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임스는 이어 황실에서 전달받은 계엄령과 행동 강령을 전한 뒤 내려갔다. 뒤이어 조찬회가 시작되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즐비하게 놓였다. 어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 식욕이 돌 법도 한데, 제이디는 입맛이 없었다. 그때, 뒤편에 앉은 행정학부 학생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닐까?”

“멍청아. 전쟁은 이미 시작된 거야. 무조건 국경 밖으로 싸워야만 전쟁이 아니라고.”

“도대체 가만있는 우리까지 왜 휘말리게 하는 거야. 본래가 없는 것들은 조아리며 사는 게 순리 아닌가. 일반인이 아무리 발악한들 마법사를 이길 수 있겠어?”

“이래서 교육이 중요해. 못 배운 것들은 분수를 모른다니까.”

“맞는 말이야. 같은 평민이래도, 아카데미 출신은 생각하는 게 다르잖아. 제국을 위해 봉사할 마음이 된 자들도 있어. 자카르 경도 봐. 그런 사람들의 명예를 꼭 몇몇 애들이 더럽힌다니까. 이러니 차별을 안 할 수가 있나.”

푸훗, 비웃는 소리가 날카롭게 제이디의 귀로 날아들었다.

“…….”

공감할 수 없는 귀족 아이들의 선민의식이 오늘도 제이디를 혼자 있고 싶게 만들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늘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좁게는 학교에, 가족에게, 친구에게. 크게는 사회에, 주류에, 세상에. 그러나 4학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 속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은 분명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리라.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제이디는 얼른 연회장을 벗어나 연구실에 가고 싶었다. 어제 구한 약초들이 완전히 시들기 전에 연구를 마쳐야 했다. 역시 이러나저러나 정신없이 실험을 할 때만이 정말로 ‘나’다워질 수 있었다.

*  *  *

반란기가 고조되며 제국군이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여명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인쇄기의 증기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몇천 장의 전단이 순식간에 찍혀 나와 손에서 손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전해졌다.

게릴라전으로 인한 복구가 한창인 록펠라 광장 거리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 한 명이 느긋하게 가로질렀다. 검은 모닝코트는 구김 없이 날렵하게 뻗어 있어 잘 관리된 듯 보였으며, 눈을 가린 중절모 밑으로 드러나는 선명한 콧대와 입술 선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안쪽에 받쳐 입은 웨이스트 코트의 단추와 주머니 사이로 금장 회중시계의 시곗줄이 예쁜 호선을 그리며 늘어져 있었다.

팔랑….

장갑을 낀 길쭉한 손가락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혁명군의 선전용 전단을 집어 들었다.

【황실은 민중 기만을 멈출 때】

【제국군 총에 사살된 대학생… 고문 흔적】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의 정의인가?】

근래 있었던 시가전 때문에 록펠라 광장에는 절망과 공포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한 부정적 감정을 ‘분노’와 ‘저항’으로 바꾸기 위해 혁명군 선전부는 오늘도 쉴 틈이 없었다.

그는 곧 선전지를 뒤집어 뒷장을 훑어 내렸다.

【광휘의 이름을 입은 자가 세계를 전복하고 대륙의 새 시대를 이끄는 광영이 되리라.】

대표적인 선전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 아래로 중절모를 쓴 누군가의 옆모습을 그린 검은 형상과 함께 혁명군의 수장을 추론하는 온갖 가십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느긋하게 걸으며 전단을 훑던 신사의 다리에 한 어린아이가 툭, 부딪혔다. 혼잡한 거리 상황에 미처 눈앞을 살피지 못하고 뛰어가던 것이다. 꼬질꼬질한 얼굴로 때 묻지 않은 매끈한 바지 원단을 바라보던 남자아이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챙의 음영에 얼굴이 가려진 신사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겁에 질려 움츠렸다.

눈앞의 신사가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싱그러운 녹음의 향기가 풍겨 왔다. 누가 봐도 높으신 귀족 태가 나는… 그런 분의 몸에 더러운 얼굴을 부딪치다니.

신사 앞의 아이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겁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까마득히 쭉 뻗은 그의 몸이 아래로 향하자 아이는 더욱 겁을 집어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는 곧 닥쳐올 호통을 예감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 예감은 정반대로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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