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4)화 (5/116)

베르딘 황립 아카데미.

록펠라 광장 시가전 소식을 들은 교수들이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은 학생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군의 짓이라더군요.”

“감히 무고한 학생들까지 휘말리게 하다니요…! 그치들은 변별력이라는 것도 없답니까?”

“제국의 상아탑에도 반기를 들 셈이겠지요. 정도를 모르는… 추접스러운 야견과도 다를 바 없는 자들입니다. 아주 씨를 말려 버려야 해요!”

저마다 혁명군에 대해 한마디씩 비난을 씹어뱉었다. 그중에서도 백발이 성성한 땅딸막한 노인 한 명이 침을 튀기며 가장 역정을 내었다. 인문학부 언어학 교수 라히크였다.

그때 호화스러운 마차 한 대가 빠른 속력으로 아카데미 정문을 넘어섰다. 신랄하게 혁명군을 비난하던 그들은 도착한 마차를 향해 서둘러 움직였다.

휘노가 온몸 곳곳 성한 데가 없는 제이디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교수들은 아연한 얼굴로 잠시 두 사람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웬 생선 비린내를 맡은 교수 몇몇이 살짝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러다 곧이어 벌어진 상황에 다들 “어어…!” 하며 허둥지둥했다. 기운을 다한 제이디가 휘노의 어깨에서 스륵, 떨어지며 혼절한 것이다.

“에구머니나…!”

“이, 이를 어째….”

“어서 옮길 것을….”

“비켜 주세요! 의무실로 가야겠어요.”

부산스럽게 우왕좌왕하는 교수들을 물리며 휘노가 소리쳤다.

“그, 그래! 어이, 거기! 첼시 교수를 좀 불러오거라!”

라히크가 지나가는 학생 하나를 붙잡고 심부름을 시켰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건너다보던 학생이 “예, 옛!” 하며 뒤돌아 첼시의 교수실이 있는 서관으로 달려갔다. 첼시 아도라 교수는 신성 마법 실습과 학생 보건을 담당하는 마법학부 교수였다. 제이디와도 친분이 있어 그녀의 일이라고 하면 발 벗고 달려와 줄 사람이었다.

“이보시게. 이리 와서 이 아이를….”

어깨에 두른 숄을 꼭 여미고 체인이 달린 안경을 밀어 올린 중년 교수가 대뜸 학생들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를 불렀다. 푸른 삼각모를 쓴 마부가 검지로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더러 지금 이 꼬질꼬질한 애를 옮기라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혼비백산한 무리를 뚫고 건장한 남자 한 명이 쓰러진 제이디 옆으로 다가왔다. 헝클어진 진저 헤어와 색이 바랜 금테 안경의 조합이 꽤나 히스테릭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잠시 무감한 얼굴로 기절한 제자를 내려다보더니 폭,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거냐?

인문학부 화학 교수이자 제이디의 ‘마녀’ 동료, 로건 리베르였다.

“로건 교수님!”

휘노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며 그를 불렀다. 곧 망설임 없이 한 품에 제이디를 들어 올린 로건 교수가 무능한 동료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도대체가….”

상아탑을 이끄는 등불이란 작자들이 칠렐레팔렐레 수선이나 떨고. 이들에게 돌아가는 세금과 녹봉이 아까울 지경이다.

꽤나 맹렬한 기세에 늙은 교수들이 주춤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휘적휘적 빠른 걸음으로 의무실로 향하는 로건의 꽁무니에 휘노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교수들은 그저 멀거니 서서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다.

*  *  *

목 끝까지 이불을 덮은 제이디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타악! 깊숙한 심연에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흐윽!”

“더! 더 정신을 집중해 보란 말이다!”

“싫어요!”

타악! 아이의 종아리로 다시금 날카로운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선명한 붉은 실금이 그어진 종아리가 애처롭게 파들거렸다. 무릎이 보이도록 허름한 치맛자락을 꼬옥 올려 움켜쥔 두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짝, 짜악, 매질이 이어질 때마다 몸이 휘청이며 후드득, 분홍색 눈동자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잔말 말고 다시 집중하도록.”

“으… 흑… 해도 아, 안 되는 걸, 하라고 하시면….”

끅끅거리며 숨넘어갈 듯 울던 아이는, 회초리가 좀 더 높게 공중으로 들리자 발작하듯 고개를 내저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서슬 퍼런 눈을 희번덕거리는 원장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름의 논리로 하소연했다.

“저… 전, 수학도 잘하고 철자도 잘 맞혀요. 화학이랑 물리 공식도 바로바로 외울 수 있고요! 길가에 핀 꽃이랑 나무 이름도 모두 알고 있어요…! 또, 또, 달리기도 제일 빨라요, 정말이에요! 요리를 하라면 요리도 하고 청소나 빨래도 잘할게요.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 아니, 아니, 몇백 배는 더 잘할게요. 마법만 빼면 정말로 뭐든 잘할 수 있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아!”

다리에 매달려 제발 체벌만은 멈춰 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를 뿌리친 여인이 확 몸을 낮춰 아이의 얼굴을 손안에 구기듯 붙잡았다. 단단히 광기가 서린 섬뜩한 얼굴이었다.

“해내야만 한다. 너처럼 영특한 아이가 간단한 마법 하나 부리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느냐… 응? 듣기로는 신체가 한계에 몰릴 때 마력을 각성하는 경우가 많다더구나. 오늘 너의 한계를 시험해 보자꾸나.”

아니야… 아니에요. 선배들이 그랬어요, 마력은 타고나는 것이라 아무리 노력한들 발현되지 않는다고!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아직 시간은 많아. 그래. 시간만큼은 모두에게나 공평하지.”

급기야 아이의 눈이 혼을 잃은 듯 혼탁해졌다. 전신이 후들거리며 잘게 떨렸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뿌리 출신이라고 못 할 것이 없어. 자, 일어나거라. 수업 재개다. 너만큼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부모 잃은 평민 출신 어린아이에게 마력이 없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보육원 원장들은 혹시나 마법사를 배출할 수 있을까 혈안이 되고는 했다. 베르딘 제국에서 마법사란 곧 넘을 수 없는 부의 상징. 잘 길러 넘긴 고아 하나로 한탕 해 먹으려는 추잡한 욕망이었다. 그러한 그릇된 욕망은 훈련을 통해 마력을 각성할 수 있다는 뒤틀린 신념을 만들어 내었다.

엄마를 잃은 제이디가 보내진 보육원의 원장은 개중에서도 유독 정도가 심했다. 핍박을 견디지 못한 아이 중 몇몇은 한밤중에 도망을 치거나 완전히 엇나가 또 다른 악이 되었다. 그 차례가 제이디에게도 돌아왔을 뿐이었다.

싫어…. 난… 마법 같은 거 없어도….

악몽에 빠진 제이디의 미간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이마와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뒤척이는 소리를 들은 휘노가 침대맡에 엎드려 있던 몸을 스륵 들어 올렸다.

“싫, 어…. 도망….”

“제이디? 정신이 좀 들어?”

휘노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제이디가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가느다란 시선 안에 아늑한 주황색 불빛이 감겨들었다.

마력구가 켜진 밤… 그리고 이 냄새는 분명, 의무실이구나.

조금 더 눈꺼풀을 들자 불빛을 등지고 새하얗게 빛나는 것 같은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와. 엄청 예뻐. 천사?

“교수님, 깨어났어요.”

…가 아니구나. 가끔 제 룸메이트는 어둠마저 밝힐 듯 고고하게 빛나서 잠결에 보다 보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비슷한 무언가로 보이고는 한다.

“그래. 고생했다.”

의무실 창가에 놓인 자그마한 탁상에 앉아 흡연하던 로건 교수가 고개를 한 번 까딱이며 응답했다. 휘노가 눈썹을 내려뜨리며 가여운 소동물을 어루만지듯 제이디에 뺨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넘겨 주었다.

“이야기 나누시겠어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로건에게 물었다.

“어, 몇 분이면 된다.”

“제이디. 나 먼저 가서 방 좀 치우고 차 끓이고 있을게. 천천히 올라와.”

제이디가 몸을 일으키는 휘노의 소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고마워….”

오전 일찍 외출했다가 폭격 맞고, 사경을 넘고, 혼절까지 하고… 이토록 다사다난한 하루는 간만이었다.

뻑뻑 담배를 피우던 로건이 깊게 들이마신 연기를 후우, 뱉더니 툴툴 담뱃재를 털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 너머로 밤바람이 불어와 시폰 커튼 자락이 사락 흩날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동그랗게 뜬 상아색 달이 보였다.

“환자 옆에서 흡연이라뇨.”

“새삼.”

“으… 어떻게 된 거래요?”

제이디가 욱신거리는 상체를 일으켜 베개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밀려오는 미세한 두통에 살살 미간을 주물렀다. 아직은 정신이 말끔히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

“마차에서 내리다 쓰러졌어. 첼시 교수가 하필 자리를 비웠더구나. 필요한 처치는 내가 했으니 괜찮을 거다.”

“아….”

“상황은 대충 들었는데. 나, 참. 장날이 아니라 제삿날이 될 뻔했군. 무식한 황실의 개들 같으니. 도대체 어쩔 생각들인지. 뭐, 다 같이 죽자는 건가?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새 담배를 입에 물고 고개를 기울인 로건이 탁,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였다.

“…….”

또 시작이다. 뭔가 불만이 있을 때면 늘어놓는 저 염세주의적 히스테리. 그 나름의 걱정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제이디는 괜히 듣는 사람이 있을세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이디는 이어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곰곰 생각했다. 어쩐지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던 거 같은데… 뭐더라.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하여간에 이 제국은 글렀어. 어디 건드릴 데가 없어서 아카데,”

“아아.”

제이디가 두 눈을 키우며 작게 탄성을 냈다.

“교수님. 저 오늘요. 사람을 살렸어요.”

신성 마법 같은 거 쓰지 않고도요.

제이디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휘어지는 눈매가 답지 않게 싱그러웠다.

로건의 히스테릭한 주저리가 그제야 멎었다. 툭툭, 재를 털고 다시 담배를 문 로건의 입꼬리가 담백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랬구나.”

자질구레한 칭찬은 없었지만 제이디는 그가 내심 제자의 성취를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의무실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마도 제 뒤를 따라 돌아온 또 한 명의 부상자가 있는 모양이다.

제이디는 자리를 비켜 줄 요량으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폭신한 바닥재와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다리를 내리다 불현듯 깨진 병 조각에 발을 다쳤던 기억이 떠올라 주춤거렸다.

“…….”

하지만 곧 마음을 편히 먹으며 바닥을 디뎠다. 신성 마법의 은혜를 입은 발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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