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스물두 번째 우주, 제국력 832년.
붉은 깃발이 온 황성을 물들이고 황정을 타도하려는 혁명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때.
“언젠가 당신이 내게 물었지.”
리안 베르딘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제이디를 붙잡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내일’이 오면, 우린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고.”
“…그리고 당신은 답을 찾는다면 가장 먼저 내게 알려 준다고 했죠.”
이제 와서는 모두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제이디는 혁명이 시작되기 3개월 전, 오후의 햇살이 들이치는 마차 안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내일’이 새롭든 새롭지 않든 내게 리안의 의미는 같아요.”
“…….”
“리안 베르딘은 제이디 헤이스터에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일 거예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은 내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일 거라고 말했던 한때.
어쩌면 그렇게나마 사랑했던 당신은 이제 없어. 빛을 잃은 제이디 헤이스터가 차가운 얼굴로 돌아섰다. 떠나야 한다. 그와 함께하면 소중한 사람을 자꾸 잃는다. 처음부터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황정을 뒤집는 혁명 따위….
리안은 다시 한번 다급하게 제이디를 붙잡으며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날 그 마차 안에서, 당신은 내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일 거라며 환히 웃던 제이디에게 리안은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니어도… 내 곁에 머물러 주겠습니까.”
“…….”
“내가 더 이상 태양이 아니어도, 그대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약속할게요. 리안이 날 먼저 떠나지 않는 한 언제나 리안 곁에 있겠다고. 설령 리안이 다시 시간을 돌려 날 떠난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알아볼 거예요. 리안은 늘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으니까, 하고 제 가슴팍을 가만히 짚던 사랑스러운 여인이 있었다.
“약속했잖아.”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허망한 듯 무너져 내리는 그를 향해 제이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 약속. 그랬던 때가 있었다. 타오르는 태양 빛에 물든 그의 얼굴을 보며 희망을 찾았던 때.
하지만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다시 또 잃어버린 지금, 희망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불씨. 모든 것을 불태울 듯 떨어져 내리는 저 불덩이들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잘못 생각했어. 당신은 더 이상 내 빛도, 태양도 아니야.”
“…제이디.”
“당신이 잘하는 거 있잖아요. 이럴 때마다 시간을 돌려 왔겠죠. 편리하네요. 스물한 번의 회귀는 스물한 번 도망친 리안 베르딘을 상징하는 거였군요.”
“…….”
가장 가까운 사이란 곧 서로에게 가장 상처 되는 말을 안다는 것. 제이디는 리안의 미련을 깎아 내기 위해 독설했다. 찢어지고 깨지면서도 제국민을 지켜 내려 했던 그의 영광스러운 과거에 도망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나는 당신의 명백한 ‘실패’예요.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요. 그리고 다시 시작해요.”
무심결에 흐른 눈물이 얼굴을 적시는 것도 잊고서, 제이디는 절박하게 말했다. 날 버려요, 제발.
“그래서 내가 다시 모두를 지킬 수 있게… 제발 날 위해서, 시간을 돌려 줘.”
몇 번의 시간을 되돌려 가까스로 만난 나의 ‘마녀’가 이제는 울면서 자신을 버려 달라고 애원했다.
리안이 절망하는 제이디를 품에 안았다. 그의 뜨거운 손이 제이디의 머리를 감쌌다.
“답을 줄게.”
언젠가 꿈결 같던 그 찬란한 미소가 마음에 스며들 때, 리안은 제이디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했었다.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에게 명백한 구원이었다.
“우리의 ‘내일’이 새롭든 새롭지 않든 내게 제이디의 의미는 같아요.”
“…….”
“당신이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날, 당신의 가슴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당신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했어.”
“…….”
“제이디 헤이스터는 리안 베르딘에게 ‘구원’이라고.”
이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다시 시작해도 된다. 그것은 리안 자신이 평생 해 왔던 일이니.
하지만 스물두 번째 우주가 아닌 곳에서 만난 제이디 헤이스터는 지금과 다를 것이었다. 현재의 제이디 헤이스터가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가짜였다. 진짜를 두고 돌아갈 순 없었다. 이 미련을 갖고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제이디는 울음을 멈추고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자 익숙한 높낮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때는 이 울림이 참 좋았었는데.
“이제 와 과거의 당신은 의미 없어. 내겐 이 우주의 당신이 구원이야. 그 구원이 날 떠나겠다면….”
철컥, 총의 쇳소리가 들렸다.
“죽여서라도 미련을 없애겠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내 품에서 죽으세요, 제이디.”
그와 자신 사이에 자리한 총구를 바라보는 제이디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해 보란 듯이 웃었다.
“네, 그럴게요.”
화약 냄새가 물든 손끝이 방아쇠에 닿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그것참 영광일 거예요.”
스물두 번째 우주, 제국력 832년.
붉은 깃발이 온 황성을 물들이고 황정을 타도하려는 혁명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때.
죽음에 가까워진 우리는 각자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파헤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시간을 돌려,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당신은 지금의 리안 베르딘과 다른 모습일까.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영영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지금의 내가 아닐 테니까.
제이디가 두 눈을 감았다. 그를 닮은 태양 빛이 어둠 속에서도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