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혼 확정
이른 아침부터 세미는 하네스에게 깨지는 중이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록시나를 걱정하는 마음뿐이었다.
록시나가 앓아누운 지도 닷새나 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네스와 라울은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해야 할 만큼 안 좋았다. 그녀를 진료한 의사 역시 절망적이란 소리만 해댔다.
“딴생각할 건가!”
하네스가 윽박질렀다. 영 집중을 못 하는 바람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죄, 죄송합니다.”
“그 머릿속에서 부인을 완전히 지워 내줘야 정신을 차리겠군?”
“기사장님, 부인이 위독합니다.”
“알아!”
“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어요. 그게 너무 답답합니다.”
세미가 울상을 짓는 바람에 하네스는 이마를 짚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인 줄 알아! 이혼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지만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때를 대비해 공작님도, 부인도 행동거지를 조심하려고 하는데 네가 왜 재를 뿌려!”
“혼자니까요, 공작 부인이 외로워하는 게 보입니다!”
“이 멍청아, 그 외로움은 네가 어…….”
“하네스!”
라울이 단장실에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티에리 바라단이 왔어!”
“고, 공, 공작 부인의 아버지가?”
“빨리 준비해!”
“공작님은!”
“길렌으로 오시는 길이야. 뭐 하나!”
어리벙벙해하는 하네스를 라울이 재촉하는 바람에 세미가 검을 집어 건넸다.
“어서 가시죠.”
“나중에 얘기하자. 젠장…… 안 좋은 예감이 들어.”
하네스는 세미가 건넨 검을 받아 들곤 단장실을 뛰쳐나왔다.
세미도 그를 뒤쫓아 뛰며 복도 쪽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바라단 가문의 독수리 문양의 휘장을 훑었다.
“폐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것 같단 말이야.”
「안투르 퍼시 공작과 공작 부인에게 명하노니, 이혼하라.
부부 사이에 불화가 깊고 관계가 좋아질 것 같지 않으므로 이혼하여 새 가정을 꾸려야 한다. 록시나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처를 찾으라.」
안투르의 집무실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마치 폭풍 전야와 같았다. 라울과 하네스는 심기 불편한 안투르의 눈치를 봤다. 모든 신경이 책상 위에 펼쳐진 칙서에 쏠려 있었다.
이혼을 허가한다는 칙서였다.
안투르가 그토록 바라던 이혼이 확정됐다. 라울과 하네스로선 그가 기뻐할 줄 알았던 탓에 무슨 조화인가 싶어 침만 삼켰다.
길고 긴 침묵으로 인해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평소처럼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처럼 안투르의 안색을 뜯어보느라 눈매를 가늘게 뜬 티에리 바라단 때문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기쁘지 않으십니까?”
입매 끝을 내린 티에리가 물었다. 사위이긴 했으나 왕자인 탓에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장인께서 들고 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폐하께 부탁드렸습니다. 칙서도 전달드리고 딸아이도 데리고 가겠다고요.”
티에리는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가 도로 끼는 등 딴청하며 신경을 긁었다. 안투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고 코웃음을 쳤다.
“꽤 서두르네요.”
“하루라도 빨리 재혼을 시켜야지요.”
“하루라도 어릴 때 팔아먹으려는 거겠죠.”
“계집은 어린 게 좋습니다.”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예상했던 만큼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티에리는 정말 상종도 못할 인물이었다. 안투르는 경멸의 시선으로 티에리를 노려봤다.
“아바마마는 당신 같은 자를 왜 곁에 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위가 자신을 사람대접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칼날 같은 시선은 부담됐다. 그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이죽거렸다.
“폐하껜 잘합니다.”
“언젠가 아바마마께서 당신에게 좌절감을 선물했으면 좋겠습니다.”
안투르가 적대감을 드러내자 티에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록시나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은 못 데리고 갑니다. 아파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안투르의 대답에 티에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요?”
“감기입니다. 고열과 오한으로 인해 의식이 흐립니다.”
“얼마나 됐습니까?”
“닷새째입니다. 보시겠습니까?”
“감기라면…… 됐습니다. 병세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티에리가 몸을 일으켰다.
“옮을까 봐 겁납니까?”
“치사율이 높은 병입니다. 이 늙은이에겐 아주 치명적이죠.”
“록시나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으면 그때 데리고 가겠습니다. 공작님께 장례까지 부탁할 순 없으니까요.”
“티에리 바라단! 당신 딸이 사경을 헤맨다고 했습니다!”
“제가 딸아이에게 애정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들은 대를 잇지만 딸은 무용지물입니다. 결혼했으면 잘 살아야지, 이혼이나 당하다니…… 쯧.”
티에리는 록시나가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감기에 걸린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그랬습니다. 시간 낭비를 했네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 지독합니다.”
“이혼을 강요한 공작님이 할 소린 아니죠.”
닷새째 사경을 헤맨다면 기적밖엔 바랄 게 없다고 판단한 티에리는 안투르에게 목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하네스와 라울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기막혀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습니까!”
하네스가 흥분하며 가슴을 때렸다.
“소문대로 지독하군요.”
라울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하네스는 씩씩댔다.
“부인께서 사경을 헤맨다고 하면 좀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장례? 아주 죽길 바라는 눈치네요!”
“차도가 보이는 걸 숨겨야 해. 저 늙은이가 록시나를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차, 차도가 있습니까?”
하네스의 음성이 밝아졌다.
“열이 떨어졌어. 한기는 여전하지만 의사의 말로는 오늘 밤만 잘 버티면 금방 털어 낼 거라고 하더군.”
“다행입니다!”
라울의 표정도 활짝 피었다.
“라울, 나 대신 아바마마를 만나 줘.”
“제가요?”
“난 록시나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제가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이혼 무효.”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울은 물론 하네스까지 얼어붙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던 그들의 시선이 안투르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티에리 때문에 생긴 동정심에 판단력이 흐려졌나,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투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진지했다.
“록시나를 잃을 순 없어.”
안투르는 칙서를 노려봤다.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주먹을 불끈거렸다.
“아바마마께서 이혼을 허락했다는 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야. 록시나의 귀에 들어가선 안 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세미는 길렌 궁전의 앞마당에서 푸른 날개 기사단의 기사들과 대기 중이었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세워 놓은 마차가 마음에 걸려 티에리 바라단과 함께 온 기사에게 물었다.
“저 마차는 뭡니까?”
“부인을 모시고 갈 마차입니다.”
“모시고 가요?”
“이혼하셨으니까 친정으로 가셔야지.”
이혼? 세미는 숨을 들이마셨다. 손끝이 저릿저릿할 만큼 두려웠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허락을 하셨으니까 이렇게 큰 마차를 끌고 온 게 아니겠나.”
“가, 감기에 걸려서 이동이 어려울 텐데…….”
“감기?”
기사가 되물어보려고 할 때 티에리 바라단이 기사들을 불렀다.
“돌아간다!”
“공작 부인은요?”
세미와 있던 기사가 물었다.
“그 쓸모도 없는 건 두고 간다!”
티에리 바라단이 말에 올라타며 신경질을 부리자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어 섰다. 세미도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록시나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명 쓸모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혼한 딸이라서 그런 소리를 한 걸까? 충격이 컸던 탓에 넋이 나갔다. 초점을 잃고 선 세미의 앞을 티에리 바라단과 호위 기사들이 지나쳤다.
날카로운 인상과 서슬 퍼런 기운에 숨통이 조이고 등골이 오싹했다. 안투르가 자신을 비웃던 게 생각났다. 이제야 비웃음의 뜻을 알 것 같았다.
하급 귀족을 떠나…… 티에리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가빠져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청혼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건가?
절망한 세미는 고개를 푹 숙이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아버지에게서 지켜 주려면 안투르 퍼시 정도는 돼야겠지…….
***
그건 꿈이었을까?
매일 밤마다 안투르가 안아 줬던 건…….
록시나는 스르르 눈을 떠 천장을 바라봤다. 흐렸던 의식이 점차 맑아지면서 든 생각은 온통 안투르였다.
“부인!”
록시나가 눈을 끔뻑거리자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들어온 키에라가 이마를 짚었다.
“정신이 드세요?”
“……응.”
“오한은요?”
“이젠 괜찮아. 기운은 없지만…… 열도 없는 것 같고…… 기침도 떨어졌나 봐.”
록시나의 대답에 키에라는 두 손을 감쌌다.
“정말 다행이에요! 의사를 불러올게요.”
“키에라.”
“예?”
“혹시 바…… 아, 아니야.”
록시나는 안투르가 밤에 왔었냐고 물어보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꿈이 아니라면 키에라가 먼저 말해 줄 터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어?”
“닷새요.”
“물 좀…….”
“네, 잠시만요.”
키에라는 록시나에게 물을 따라 주곤 침대 머리맡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나자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가 들어왔다.
“예, 부르셨어요.”
“부인께서 깨어나셨어. 의사를 모셔 와.”
“예!”
하녀도 록시나가 일어나 앉아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공작님께도 알려야죠, 그건 제가 다녀올게요!”
“알릴 필요 있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내 걱정을? 별일이네.”
“매일 밤마다 오셔서 간호하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역시…… 안투르였구나.
록시나는 눈가를 쓸었다. 일순 울컥했다. 앓았던 탓에 꽉 동여맨 울음보가 터지려 했다.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해 눈을 깜빡일 때 키에라가 덧붙였다.
“많이 미안해하시더라고요.”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게요.”
“너도 마찬가지야.”
고마운 마음에 눈가를 붉힌 록시나가 키에라를 노려봤다.
“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거 알아. 미련한 짓을 한…….”
“좋아하는 만큼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키에라는 싱긋 웃었다. 그 바람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키에라…….”
“저는 공작 부인이 좋아요. 6개월 동안 같이 고생해서 그런가? 아니면 저보다 처량해 보여서 그랬는지, 죽을까 봐 걱정했어요.”
이번에는 활짝 웃던 록시나가 눈물을 흘렸다.
“뭐 이렇게 인생 그 자체가 우울한 귀족이 다 있나 싶어서…… 발이나 닦이는 나보다 되게 외로운 사람이구나…… 항상 가엾고 마음이 쓰이던 차에 그렇게 앓는데…… 어떻게 가만히 둬요. 저까지 떠날 순 없잖아요.”
조용히 떨어지는 눈물만큼 록시나를 향한 연민이 분위기에 스며들어 실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마워.”
록시나가 훌쩍거렸다.
“그리고…… 서운한 소리를 해서 미안해.”
“고, 공작님껜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정말…… 위험한 제가 아니라 공작님이었으니까요. 오한이 오실 때마다 껴안아서 따뜻하게 데운 건 공작님이니까요.”
키에라도 록시나처럼 훌쩍거리며 눈가를 문질렀다.
“응.”
“갑자기 왜 다정해지신 건지 모르겠는데…… 잘해 보세요. 이혼도 철회하신다고 하니까.”
“이혼 철회?”
키에라도 내뱉고는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혼…… 승인된 거니?”
“저, 저…… 저기…….”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
록시나는 주먹을 쥐며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 썼다. 키에라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이혼을 허락하셨대요. 이틀 전에 친정아버님이 모시러 왔다가 편찮으시단 얘길 듣곤 돌아가셨어요.”
“내 상태를 보고 가셨어?”
“아뇨.”
키에라는 단전 깊은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쏟아 냈다.
“쾌차하면 데리고 가시겠다고…….”
안투르가 이혼에 관한 걸 입막음하려고 해도 티에리 바라단이 남겨 놓고 간 인상이 워낙에 강렬했던 탓에 구설을 피하는 건 어려웠다.
키에라도 티에리의 비정한 모습에 치가 떨린 듯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래…… 그랬구나.”
록시나는 푸싯 웃었다. 과연 아버지답다. 그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풍경이 오묘했다. 은회색 구름은 분명 눈부신데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 황량하고 살풍경스러웠다.
아니, 날씨 탓이 아니라 이혼이 확정됐다는 소식 때문이리라.
안투르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록시나는 두 손을 꼭 쥐며 키에라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거칠게 뛰는 심장 박동이 잦아들지 않는다. 록시나의 침실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지만 손잡이를 당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투르는 무겁게 다물렸던 입술을 떼 들숨을 폐부 깊이 들이마시다가 내쉬었다. 배가 푹 꺼질 만큼 숨을 길게 내뱉어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자로 태어나 긴장할 게 없는 삶을 누렸던 그로선 이 상황이 큰 부담이었다. 손잡이를 돌리는 데 필요한 용기까지 그러모아야 하는 걸 보면.
“안 들어가세요?”
지켜보는 게 답답했는지 키에라가 물었다. 안투르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물병과 잔이 든 쟁반을 문 옆 테이블에 놓은 키에라가 물러갔다. 안투르는 한숨 섞인 숨을 내뱉은 후 문을 열었다.
용기를 쥐어짜듯이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록시나의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이레 동안 앓았던 탓에 얼굴 살이 많이 빠져 있고 어깨와 허리가 마른 가지처럼 말라 있었지만 혈색은 건강하게 빛났다.
“의, 의사 말로는 이젠 걱정할 것 없다더군.”
안투르는 민망함을 감추고자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많이 걱정했어.”
“걱정했다는 건 들었어요.”
“음.”
“고마워요.”
남창에 대해 묻거나 간호를 왜 했느냐 따지듯 묻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록시나는 감사함만 표했다.
“……그, 그래.”
“여러모로 신세를 졌어요.”
“신세랄 게 있나.”
“그런가요?”
“음.”
안투르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지만 록시나의 반응이 냉담한 탓인지 침만 꼴깍거렸다. 키에라가 말하길 록시나는 밤샘 간병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었다.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니었지만 무미건조한 반응에 섭섭했다.
“제게 할 말 있나요?”
“무슨 말?”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없나 해서요. 이를테면…… 밤이면 밤마다…… 찾아왔던 거.”
“당신을 걱정했어. 오한 때문에 힘들어했으니까.”
“이혼을 요구한 아내에게…… 왜 그런 정성을 보이죠?”
“이혼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투르는 가면을 쓰고 안았던 남창이 자신이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자신이었다고 말하면 록시나가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았다.
이혼한 상태이니 당장에 짐을 싸서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어떡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살살 녹여 이혼 철회까지의 시간을 벌어 볼 생각이었다.
“왜 이혼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필요해.”
“왜요?”
“그건 차차 말해 줄게.”
“지금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어요?”
“음.”
안투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혼하고 싶지 않다니 좀 의외네요.”
“당신이 아팠으니까.”
록시나는 빙그레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안투르 때문에 화가 났다. 남창이 자신이었다는 걸 빨리 밝힐수록 좋을 텐데.
“폐하께선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거예요?”
키에라에게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비밀로 하라고 했다. 안투르에게 직접 듣겠다고. 그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를 응시했다. 저를 간병하느라 수척해지긴 했으나 감탄을 자아내는 미모는 여전했다.
신이 빚어 놓은 걸작처럼 잘생긴 얼굴에 먹구름이 생겼지만 심장이 거칠게 뛸 만큼 멋졌다.
“우리 이혼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고민 중이시겠지.”
“……예.”
“서, 서두를 것 있나?”
“……고마웠어요.”
감동받은 얼굴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괜히 불안했다. 록시나의 태도에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만 쉬어야겠어요.”
록시나가 돌아섰다. 그는 눈동자를 굴렸다. 뱃속이 쓰라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마른 입술을 꾹 다물고 우두커니 서 있자, 그녀가 재촉했다.
“안 나가요? 난 이만 쉬고 싶은데.”
“어…… 그래.”
“다음엔 이혼 소식을 들고 오길 바라요. 이혼 여부가 꽤 중요하니까요.”
침대에 누운 록시나가 이불을 어깨까지 올렸다. 안투르는 미간을 긁적거리다가 뒷걸음을 걸었다. 뒷덜미를 후려치는 섬뜩한 기운 때문에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푹 쉬어, 또 보지.”
안투르가 돌아섰다. 록시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민망함을 감추고자 입술을 깨문 채 침실을 나왔다. 탁. 침실 문을 닫은 그의 시선이 키에라가 놓아둔 물병으로 향했다. 목이 탔다. 그는 물병째 들고 마셨다. 꿀꺽꿀꺽. 물을 넘기는 소리가 갈급했다. 시원한 물로 입가를 닦은 후에야 정신이 든다.
그는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그는 손등을 적신 물기를 망연히 바라봤다.
후회가 짙은 시선이었다. 한참 동안 넋을 놓은 듯 물병을 바라보던 그가 별안간 핏 하고 웃었다.
“내 발등…… 내가 찍은 건가?”
***
록시나가 쾌차했다는 소식이 퍼시 전역에 퍼졌는지 저녁 늦게 데보라가 별궁을 찾았다. 그녀는 죽을 뻔한 고비를 잘 넘긴 록시나를 육안으로 확인한 후 안도의 숨을 쉬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병색이 가신 얼굴을 뵈니 반갑네요.”
“……반갑나?”
“예, 반갑지요. 그날…… 제게 다녀가신 후로 앓기 시작했다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어요?”
데보라는 록시나가 앓은 이유를 예측한 듯 손등을 문질렀다.
“확인해 보셨어요?”
“했네.”
데보라는 록시나의 안색을 뜯어봤다. 안투르와 제가 자신을 속이는 건 물론 농락했다며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런 분위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일 만큼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 같았다.
“화…… 안 내세요?”
“내서 뭐 해?”
“……저라면 입에 거품을 물겠어요.”
“난 자네처럼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야.”
“용서하시는 거예요?”
“화를 내지 않는다고 용서가 쉬울 거란 생각은 말게.”
록시나의 대답은 잔잔했다. 그 탓에 더럭 겁이 난 데보라가 울상을 지었다.
“공작님이 시켜서 한 일인걸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알아, 자네를 탓하거나 원망할 생각 없어. 이왕 이렇게 왔으니까 심부름 하나만 해줘. 이게 마지막이야.”
록시나는 내일쯤 만나려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편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남창에게 보내는 마지막 초대장.”
“마…… 마지막이요?”
“남창이 공작님이라는 걸 안 이상 계속 만날 순 없지. 매듭을 지을 때가 됐어.”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데보라는 침을 삼켰다. 당혹감을 지우지 못한 그녀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깜빡거렸다.
“자네는 초대장만 전하면 돼. 공작님께서 눈치채지 않게 몸을 사리면서.”
“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지…….”
“말했잖아. 매듭을 지을 때라고.”
록시나는 서늘한 음성만큼 매서운 눈초리로 데보라는 바라봤다. 그가 남창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솔직하지 못했던 점은 실망스러웠고 화가 났다. 록시나로선 제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지금 안투르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안투르의 진심.
그러자면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속일 차례였다.
***
다리를 꼬고 앉은 안투르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봤다. 록시나의 표정과 태도를 곱씹을수록 불안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 석연치 않아.”
초조하게 숨을 들이마실 때 노크 소리가 상념을 깼다.
“필라프입니다. 마레에서 온 어떤 여인이 마지막 초대장이라면서 이런 걸 보내 왔습니다.”
“들어와!”
마레라고 하면 데보라일 터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그는 숨을 그르렁 내쉬었다. 곧 필라프가 들어왔다. 그는 초대장을 들고 있었다. 안투르는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재촉했다.
“다른 말은 없던가?”
“이별 통보라고만 했습니다.”
쿵.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이…… 이별 통보?”
안투르는 초대장을 받자마자 급박하게 뜯어 봤다. 이혼 확정에 이어 이별 통보라고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수고했어, 이젠 그만 와도 돼. 그동안 만족시키느라 수고한 값을 준비했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넌 정말 훌륭한 남창이었어. 덕분에 즐거웠고 고마웠어. 그럼 안녕.」
초대장의 내용을 읽던 안투르의 얼굴이 핏기를 잃어 하얗게 질려 갔다. 심장에 단검이 박힌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책상을 짚으며 중심을 잡았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아 곧 주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공작님!”
“고, 공작 부인에게 가야겠다. 외출 준비해.”
“괜찮으십니까?”
“서둘러, 필라프!”
안투르는 소리를 버럭 지른 후 서신을 구겼다. 록시나가 사라져 간다. 이혼 소식을 들은 것도 아닐 텐데 타이밍이 좋게 이별을 선언하자 공포심이 숨통을 조였다.
안투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난 황소처럼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이혼 확정…….
불행한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남창의 정체에 이어 이혼 확정까지. 록시나에겐 절망의 연속이었다.
물론 남창과 행복한 미래를 꿈꾼 것도 아니고 이혼이 불허될 거란 기대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처참한 상황을 맞을 줄 몰랐던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록시나는 와인 병과 크리스털 잔을 응시했다. 안투르 퍼시의 아내, 록시나 퍼시로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텅 빈 탓일까? 이혼녀가 됐으니 이제 얼마에 팔릴까? 그런 생각에 빠져 한숨조차 내쉬지 못할 때 문이 열렸다.
가면을 쓴 안투르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끝까지 정체를 숨기려나 보다. 이혼한 마당에도.
록시나는 안투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남창인 척하고 있으니 그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맞아 줄 생각이었다.
“데보라에게 연락을 못 받았구나?”
록시나는 일부러 데보라 얘길 꺼냈다.
“이리 와, 오늘은 와인을 마실까 하고 준비해 봤어.”
안투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가면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크리스털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녀가 건넨 잔을 쥔 그는 오늘도 말이 없었다. 남창에 벙어리 행세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비꼬아 줄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들어온 그가 얄미웠다.
안투르는 록시나가 준 와인 잔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얄미울 정도로 태연한 태도에 불만이 싹텄지만 록시나는 입술을 오므리는 걸로 삐뚜름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래, 속일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야.
이제 곧 정신을 잃고 쓰러질 테니까.
록시나는 그가 마신 와인을 흘끗거렸다. 한두 모금으로 입만 축일 줄 알았던 와인을 한 잔이나 마신 거로 모자라 두 잔째 홀짝거려 마음에 걸렸다.
저러다 픽 쓰러지는 건 아닌지.
바닥에 쓰러졌다간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 혼자선 거구인 안투르를 침대까지 옮길 수 없었다.
이러다 계획이 틀어지는 건 아닐까, 마음을 졸일 때였다. 안투르의 걸음걸이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약발이 도나 보다.
“윽!”
중심을 잃은 안투르가 짧은 신음을 쏟아 내고는 휘청거렸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건 물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입을 다무는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찰나적으로 눈앞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쨍그랑!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시야를 채운 모든 사물들이 휘기 시작하더니 아득하게 멀어졌다.
젠장, 이게 뭐야…… 와인에 뭘 탔나?
팔을 앞으로 휘저으며 침대에 쓰러져 앉은 안투르가 록시나를 노려봤다. 초점을 잃어버린 눈에 비친 그녀는 유령처럼 희미했다.
“몸에 해로운 약은 아니에요.”
록시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속삭였다.
“수면제를 좀 탔어요.”
안투르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사이 록시나가 가면을 벗겼다. 흠칫 놀란 그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동안 연기하느라고 고생이 많았어요, 안투르.”
록시나가 싱긋 웃는 바람에 안투르는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 알고 있었어?”
“네.”
“언제부터 알았지?”
“언제부터 안 게 뭐 중요해요? 당신이 끝까지 속이려고 든 게 중요한 거죠.”
록시나의 대답에 안투르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우리가 남남이 됐다는 것도 들었어요. 이혼을 축하해요, 안투르.”
“이혼할 마음 없다고 했잖아.”
“그건 당신 생각이죠.”
“아바마마께 라울을 보냈어. 이혼을 철회해 달라고!”
“내겐 아무 말도 없이? 이혼을 강요해 놓고? 너무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록시나는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그 전에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었을 텐데요?”
“미안해, 사과할게. 당신이 다른 놈과 자는 건 용납이 안 됐어! 염문이라도 터질까 봐 걱정했어.”
“오직 당신 걱정뿐이었겠죠.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을 만큼.”
“차차 설명하려고 했어.”
“그게 언제인데요?”
“라울이 돌아오면!”
안투르는 고함쳤지만 눈앞이 핑 도는 바람에 이마를 짚었다.
“내게 수면제를 먹인 이유가 뭐야?”
“마지막 밤만큼은 전남편과 하고 싶어서요.”
“전……남편?”
안투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혹감을 지우지 못한 안투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을 놓았다.
단지 그 이유로 수면제를 먹여?
인상을 찡그려 흐려지는 정신처럼 가물거리는 눈꺼풀에 힘을 주자 록시나가 조롱하듯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이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딱 한 번이라도.”
“수면제는 재우는 약인데 무슨 수로 애원하게 만들어.”
“가능해요.”
“록시나!”
안투르가 소리를 왁 질렀다. 목에 핏대를 세운 그는 성난 사자 같았지만 록시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당신을 묶을 거예요.”
“묶겠다니!”
“묶어야지만 할 수 있는 거예요.”
“묶어서 뭘 하게.”
“말했잖아요, 당신이 애원하게 만들 거라고요.”
“수면제를 먹인 데다 묶겠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인가? 내가 당신을 속여서 화가 난 건 알아! 용서할 수 없을 만한 분노지만…….”
“닥쳤으면 좋겠어요.”
안투르는 록시나에게서 펄펄 끊는 분노를 느꼈다.
“지나간 얘긴 하지 말아요. 기절한 듯이 잠든 당신의 목을 조를 수도 있어요.”
안투르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바람에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약 기운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안투르는 눈에 힘을 준 채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정신을 잃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눈을 부릅떴지만 몸을 가누는 게 쉽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게 쉽지 않아 가슴이 들썩거렸다.
“록시나…….”
물 먹은 솜뭉치처럼 흐느적거리던 안투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젠장!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한계가 온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코를 묻은 채 씩씩거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땐 가만히 안 둬.”
“아뇨, 그때부터 시작이에요…….”
록시나는 안투르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눈이 완전히 풀려 게슴츠레했지만 이대로도 매력적이었다.
성난 늑대가 덩치만 큰 강아지처럼 온순해져 귀여웠다. 일순 깨물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안투르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턱을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입술을 삐쭉거렸다.
얌전히 당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꾸 저항하니까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겁먹지 말아요.”
안투르는 입매를 비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이게 고작이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코에서 비릿한 냄새가 맡아지더니 심장을 갉아먹는 공포심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겁이 났다.
심장이 오그라질 것 같은 두려움도 잠시 거짓말처럼 정신이 흐려지더니 이내 맥없이 나자빠졌다. 픽 쓰러지는 모습이 낙엽처럼 가벼웠다.
안투르가 잠들었다.
록시나는 기절한 안투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야 관문 하나를 겨우 넘었다.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깊이 숨을 불어넣은 그녀는 콧구멍과 목구멍을 동시에 열어 날숨을 내보낸 후 안투르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처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마지막은 남창이 아닌 전남편…… 안투르 퍼시를 안을 거예요.”
아주 음탕한 방법으로.
다른 여자를 안을 때마다 전부인과의 황홀했던 잠자리가 생각나도록.
그것은 마치 저주인 양…… 그렇게 당신을 괴롭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