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깊은 체념
부우우― 부우웅.
부엉이가 우는 소리에 록시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아직 밤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옆엔 어김없이 사내가 누워 있었다. 어제도 그는 그녀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
새근새근 잠든 그는 늘 그러하듯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면을 벗겨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록시나로선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사내가 누구지? 데보라는 알고 있잖아!”
“제가 소개했으니까 당연히 알죠.”
“어디 사는 누군지 말해 줘.”
“꿈에서 깨어나고 싶으세요? 모르는 게 좋을 텐데요?”
“데보라!”
“저는 비밀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확인하고 싶으시면 공작 부인께서 직접 가면을 벗겨 보세요.”
안톤 후작의 집을 나온 록시나는 곧장 데보라를 찾아가 남창에 대해 물었지만 결국 헛걸음이었다. 그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하고 고집스러웠다.
비밀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매춘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결국 남창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록시나는 밤까지 기다리며 두근거림을 억눌러야 했다.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섹스에 미친 여자처럼 신음하는 사이 사내는 두세 번의 파정을 맞았다.
풍랑이 치는 밤바다처럼 매섭게 파고들거나 힘차게 치댄 탓에 몹시 피곤했는지 그는 그녀가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록시나는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그리고 가면 쪽으로 손가락으로 가져갔다. 비뚜름하게 걸쳐진 가면을 슬쩍 들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불빛 하나 없는 실내였지만 바깥에서 비쳐 스며든 달빛과 별빛이 환해 바로 옆 사람의 얼굴 정도는 식별할 수 있었다.
가슴 안에서 북이 울렸다. 그것은 첫 시작은 둥둥, 둥둥. 이렇게 둔중했지만 손가락이 가면을 서서히 들어 올리는 사이 빨라졌다.
땀방울이 이마를 덮었다. 살짝 벌린 입술은 사막처럼 건조하고 거칠었으며 목구멍은 말라 버려 뻑뻑하고 따끔거렸다.
가면을 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코와 눈가를 덮은 가면이 완전히 들렸다. 쿵. 큰 소리를 내며 장엄하게 울리던 북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안투르…… 퍼시.
록시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비명이 터질 뻔했다. 전신을 훑은 소름, 쭈뼛거리는 정체 모를 흐르는 배신감과 분노에 록시나는 얼굴을 쳐들었다.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가면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듯 내려놨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는 모습이 얄미웠다.
한 달이 뭐야, 두 달 가까이 매일같이 잠자리를 한 탓에 무방비한 상태가 된 건지도 모른다. 조심성은 처음 며칠뿐이었을 터.
록시나는 목을 적신 땀방울을 닦아 내며 침대를 벗어났다. 그동안 잠자리를 한 게 안투르였다니. 이혼 합의서를 전달한 다음부터 제게 먼저 말을 붙이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남창인 척 속이고 있었으니 불안하거나 궁금했을 터다. 혹은 자신이 그 남창이라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을 터.
록시나는 자조했다.
안투르의 계획대로 놀아난 것 같아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설움과 상실감이 목구멍을 치받자 정원으로 뛰쳐나왔다.
“흑, 흑…… 흑!”
풀밭에 쓰려져 앉은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미련을 버리려고 잠자리 상대를 남창으로 골랐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남편일지라도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컸던 탓에 이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나약한 마음의 싹을 잘라 내고 이혼을 물러 달라고 애원하지 않으려고 외도를 허락받았다. 남편이 아는 외도인 만큼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록시나는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후드득 떨어트렸다. 망연자실하게 앉아 눈물로 잠옷을 적셨다. 그녀는 안투르의 생각이 훤히 보여 자조했다.
“외도를 허락했을 때…… 계획했을 거야.”
이혼이 확정되면 연기처럼 사라져도 록시나로선 남창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 점을 이용한 안투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불행한 여자라고 야유를 보내고 싶었다.
“내가 그렇지 뭐.”
록시나는 자괴했다.
“어머니 말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몸을 말았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자의에 의한 선택이라며 기뻐했는데.
남김없이 태우겠다며 정욕에 사로잡혔건만 되돌아오는 건 모욕감과 수치심이었다.
“이제 다시는…… 욕심 내지 않을 거야.”
다시는 기대하지 않을래.
어차피 내겐 희망은커녕 그 무엇도 없으니까.
어차피 혼자니까.
록시나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흐느껴 울었다. 고독한 밤을 구슬픈 음색으로 흩트리던 부엉이가 그녀를 위로하듯 울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 바람결에 나부끼는 풀잎이 빚어 대는 처량한 소리, 체온을 식힐 만큼 내려앉은 밤이슬을 묵묵히 견디며 록시나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
“콜록콜록…….”
기침이 잦아들지 않는다. 머리가 무겁고 콧물이 줄줄 나는 게 아무래도 감기 몸살에 걸린 것 같았다. 새벽에 찬바람을 맞은 게 원인일 테지만 상심도 컸던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면 오늘 밤엔 혼자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매일매일 잠자리를 하려던 그녀가 연락을 끊어버리면 안투르가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런 면에선 며칠 동안 아팠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겁나지 않았다. 남길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었던 탓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극도의 우울감과 절망감으로 인해 눈을 뜨고 있는 게 힘들었다. 그녀는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연신 콜록거렸다.
“부인, 괜찮으세요?”
키에라가 생강과 레몬, 꿀 등을 넣은 차를 들고 왔다.
“이거 드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 의사를 불렀어요.”
“키에라…….”
“예, 말씀하세요.”
“두꺼운 이불을 덮어 줄래? 왜 이렇게 춥지?”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덮어 드릴게요.”
“고마워……. 나 좀 잘게.”
“이거 마시고 주무세요.”
“나중에. 지금은 힘이 없어.”
록시나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얼굴을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이불 안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숨이 가쁜 것도 같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게 죽을 만큼 아프거나 이대로 죽으려나 보다. 록시나는 태아처럼 몸을 말고 누워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사이 키에라가 두꺼운 이불을 챙겨 와 덮어 줬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러고 있으니까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한테 매질을 당한 날이면 이렇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죽어 버리면 내일은 매질을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공포와 두려움, 통증으로 인해 사는 걸 포기했던 그때처럼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록시나는 중얼거렸다.
“이대로 끝내도 돼.”
난 정말 괜찮아…….
***
“록시나가 아파?”
퍼시령을 에워싼 성곽의 보수 공사를 위해 나와 있던 안투르는 공작성에서 온 전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에 의사가 다녀갔는데 감기 증상에다 오한과 고열이 심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필라프는 의사가 진단한 대로 말했다. 안투르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턱을 더듬듯이 문지른 그가 라울에게 눈짓을 보냈다.
멀찍이 떨어져 공사장의 인부들을 지휘하던 라울이 잰걸음으로 뛰어왔다.
“예, 말씀하십시오.”
“록시나가 감기에 걸렸다는군.”
“감기요?”
라울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매해 감기로 인한 사망률이 올라가고 있었던 탓에 록시나가 걱정됐다.
“고열 증상도 있습니까?”
“있대.”
“한겨울도 아닌데…….”
“자네는 의사에게 자세한 상황을 듣고 와. 그리고 나는 지금 별궁에 가서 상태를 확인하고 오지.”
“안 됩니다.”
라울이 막아섰다.
“고열이 심할 정도면 위험한 상태인데 옮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난 건강해.”
“공작 부인은 건강하지 않아서 감기에 걸렸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무척 건강하셨습니다.”
“겉보기에만 그래. 벗겨 보면 그렇지도 않…….”
안투르가 무심코 내뱉은 말실수에 라울과 필라프는 당황했다.
“보면 알아, 뭘 그렇게 놀라나.”
어찌 보면 놀란 건 안투르였지만 라울과 필라프를 면박을 주듯 쳐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별궁의 상태도 들러 봐야 하니까 라울은 그렇게 알고 처리해.”
“……예.”
“필라프는 최고급 식재료를 별궁에 보내. 아플수록 잘 먹어야 한다. 씹지 못할 수 있으니까 수프를 만들어 먹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예.”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한 라울과 필라프의 눈초리가 부담됐던 안투르는 먼저 걸음을 뗐다. 슬며시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갑자기 감기에 걸리다니. 새벽녘까지만 해도 멀쩡했기 때문에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더구나 오한과 고열을 동반했다고 하니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제가 간호를 하겠다니까요!”
세미의 목소리에 잠깐 잠이 들었던 록시나가 눈을 떴다.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은 후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몸을 일으킬 만한 기운을 되찾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이마를 더듬어 물수건을 확인했다. 물수건이 미지근했다. 물수건에서 흐른 물기와 땀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젖었다. 목과 가슴골에선 발효가 잘된 빵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모두 땀 냄새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침대 맡에 매달아 놓은 줄을 당겼다. 여러 번 힘껏 당겼더니 키에라가 들어왔다.
“부인, 이제 정신이 드세요?”
“왜, 왜 이렇게 시끄러워?”
“세미라는 기사가 간호를 하겠다면서 생떼를 쓰잖아요.”
“내가 아픈 건 어떻게 알고…….”
“의사가 공작님께 알리는 과정에서 들었대요.”
키에라는 물수건을 손가락으로 눌러 본 후 이마에서 떼어 내고 록시나의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옮아.”
록시나는 손사래를 쳤다.
“너까지 힘들어져. 오늘부턴 의사 외엔 아무도 출입 못하게 해.”
“이때껏 살면서 감기 한 번을 걸린 적 없어요. 제 걱정하지 마시고 이거 드세요.”
키에라는 무뚝뚝하게 말한 후 록시나를 억지로 일으켜 물을 마시게 했다.
“물을 자주 마셔야 좋아요.”
“물도 써.”
“그래도 드세요.”
“괜찮은데…….”
“괜찮기는요! 얼굴이 어떤지 아세요?”
키에라는 짜증을 부렸다. 록시나가 걱정돼 죽을 것 같았다. 키에라는 원래 왕궁 소속의 시녀로 안투르의 수발을 들었다. 그러다 그가 결혼해 퍼시로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록시나를 모시게 됐다.
그 시간이 자그마치 2년이었다. 2년 동안 수발을 들면서 앓아 누운 적이 없었던 여주인이 산송장처럼 비실거려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고생을 해서 그래요. 공작님이 이혼해 달라고 생활비를 끊는 바람에 마음도 몸도 곯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
“말조심해.”
록시나는 키에라에게 주의를 준 후 물을 마셨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미가 막무가내로 침실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키에라는 록시나의 몸을 이불로 가린 후 소리를 왁 질렀다.
“당신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들어와!”
“전 건강합니다. 감기 같은 건 옮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간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세미…….”
록시나는 은혜를 갚겠다는 이유로 선을 넘어 버린 세미를 질책하듯 노려봤다.
“귀여워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구나?”
록시나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싸늘했다.
“이곳은 공작 부인의 침실이야. 공작님의 기사가 흙발을 들일 곳이 아니니까 썩 나가.”
“감기입니다! 증상이 심해지면 간호하려는 사람들이 없을 거예요!”
“내가 해!”
키에라가 소리쳤다. 록시나는 머리를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콜록, 콜록.”
“부인!”
“세미, 어서 나가.”
록시나는 물잔을 내려놓은 후 누웠다. 이번에는 오한이 오려는지 으슬으슬 떨렸다.
“키에라, 두꺼운 이불…….”
“추워요?”
“되묻지 말고 어서.”
록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얇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그녀가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자 세미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요!”
키에라가 장롱에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며 소리쳤지만 세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록시나가 걱정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듯했다.
“당신 정말 말 안 들…….”
“세미 그라이드.”
등 뒤에서 안투르의 점잖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며 세미를 곁눈으로 흘겼다.
“자네에게 별궁의 경비를 맡긴 적이 없는데?”
“고, 공작 부인께서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근무지 이탈은 군형으로 다스리는 걸 모르나?”
“죄, 죄송합니다.”
“기사직을 박탈당하고 싶군.”
안투르는 세미와 정면으로 마주 서 위아래로 훑었다.
“내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그 마음을 숨길 수 없었나?”
“죄송합니다.”
“세미 그라이드에게 명한다.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공작 부인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지 마라.”
세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혼 전인 이상 록시나의 남편은 안투르였다. 세미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뒤로 물러났다.
안투르는 세미를 침실에서 내쫓은 후 침대로 걸어왔다. 두꺼운 이불을 덮어쓴 록시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그는 한숨만 그르렁거렸다.
“공작님…….”
키에라가 울상을 지었다.
“키에라 너도 나가.”
“여기 계시면 감기가…….”
“그러는 넌? 옮아도 돼서 여기 있었나?”
“전 수발을 들어야 해요.”
“남편으로서 온 거야.”
“언제부터 그런 걸 챙기셨어요?”
키에라가 대들었다.
“공작님께서 언제부터 부인을 걱정하셨다고요! 부인께서 왜 이렇게 되신 줄 알아요? 왜 이렇게 쇠약해진 줄 알아요? 마음고생이 심한 탓이란 말이에요!”
“콜록, 콜록…… 키에라, 그 입 다물고…… 나가.”
록시나는 키에라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젖 먹던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켰다. 눈밑이 검붉게 타고 입술이 파리하게 질린 모습이 엉망이었다.
“록시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놀란 안투르는 턱을 쓸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엔 당혹감과 걱정이 뒤엉켜 붉게 타올랐다.
“오, 오늘은…… 꼬, 꼴이 이래서…… 호, 혼자 지내야 해요.”
록시나는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키, 키에라도…… 당, 당신도 나…… 나가요.”
“상태가 심각해. 알고 있나?”
“상관없잖아요.”
“왜 상관이 없어!”
“아…… 내가 죽으면 이혼남이 아니라…… 호…… 홀아비가 되겠군요……. 혀, 형제들 중에선 처, 처음이라 시, 신경 쓰이겠……어요.”
“말하지 마.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비꼬긴가?”
안투르가 가까이 다가왔지만 록시나가 베개를 던지는 바람에 멈칫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처럼 힘들어하면서도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오지 마요……. 어차피…… 나 같은 거…… 당신에, 에겐…… 하, 하찮고…… 또 하찮아서 조, 조롱이나 하다가 끄, 끝날 거였잖아.”
록시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지만 이불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안투르에겐 보이지 않았다.
“욕, 욕심 없어……. 그, 그러니까…… 새, 새장가나…… 갈 주, 준비해요……. 콜록콜록.”
“홀아비 같은 건 될 생각 없어. 약 잘 챙겨 먹고 끼니 거르지 마!”
안투르는 침실 문 앞에서 훌쩍거리는 키에라에게 고함쳤다.
“라울에게 최고급 식재료를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남김없이 먹여서 감기를 털게 해!”
괜히 화가 난다.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감정과 목구멍을 막은 듯한 덩어리 때문에 가슴 한가운데가 타는 것 같다.
안투르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간헐적이지만 흐느끼듯이 신음을 흘리는 록시나를 쏘아봤다.
“하…….”
키에라가 다그친 대로 제 잘못인가?
복잡한 마음을 추스를 수 없다. 별궁을 벗어나는 내내 한숨을 내쉬던 안투르의 앞을 세미가 막았다.
“내게 할 말 있나?”
안투르가 짜증 조로 물었다.
“제가 공작 부인을 간병하게 해주십시오.”
“제정신인가?”
“오한과 고열을 반복하고 기침이 심합니다. 폐렴으로 번져 사망하기도 하고 심장이 멎기도 하잖아요. 마땅한 치료약도 없기 때문에 바싹 붙어서 간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다 옮으면?”
안투르는 연신 콧바람을 쏟아 냈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세미까지 신경을 긁어 놓는 바람에 멀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겁나지 않습니다.”
눈빛을 보니 세미는 진심인 듯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만큼 생기가 흐르는 눈빛은 무모할 정도로 두려움을 몰랐다.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누가 겁이 나느냐, 나지 않으냐 그런 걸 물었나? 옮으면 어쩔 거고 자네가 왜 나서지?”
“이혼한다는 얘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투르는 잘 뻗은 눈썹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에게서 이혼 얘기를 듣는 게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이혼하시면 부인과는 남남이죠?”
“그래서?”
“제가 부인께 청혼하겠습니다. 허락을 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풋.”
안투르는 어이가 없어 비웃었다. 세미 그라이드, 이제 보니 무모한 걸 넘어 무식했다. 록시나는 하급 귀족 따위가 청혼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는 걸 생각 못 하는 게 답답할 정도로 어리석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군.”
“제가 부인을 행복하게 할 겁니다.”
“조건부터 안 돼.”
티에리 바라단은 제 딸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세미 그라이드를 사위로 들일 인물이 아니었다.
“부딪쳐 봐야죠. 제가 공작님께 허락을 구하는 건…… 호위대 소속의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세미는 눈가를 긁적거렸지만 눈빛만큼은 록시나를 향한 마음으로 반짝거렸다.
“은인이 아닌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군.”
안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입 안이 써 혀 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하급 귀족 출신인 호위 기사에게 만만히 보인 건가 싶어 짜증이 치밀었다.
“우리 부부는 이혼 안 해.”
“예?”
“이혼할 일이 없으니 꿈에서 깰 때가 된 것 같군.”
“이혼을 안 하시다니요? 이혼합의서를 국왕 폐하께 제출하셨잖아요!”
“마음이 바뀌었어.”
안투르는 충격으로 인해 낯빛이 하얗게 질린 세미를 조롱했다.
“록시나를 위하는 마음은 가상하고 아름답지만, 내 입장에선 굉장히 거치적거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사랑하십니까?”
“앞으로 해보려고.”
안투르의 어조는 무덤덤했으나 진심이 담겨 있어 묵직하고 진솔했다. 세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낯빛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같은 사내가 봐도 긴장할 정도로 잘생긴 데다 왕족 특유의 품격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한데 사랑을 시작하겠다?
당사자인 록시나가 아닌데도 일순 기분이 묘했다. 그의 진심을 록시나가 듣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것 같았다.
이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무엇보다 남편과 행복한 미래를 설계할 꿈에 부풀 테니까.
세미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가 떼며 소리쳤다. 내내 방치했다가 자신이 청혼하겠다니까 훼방을 놓으려는 안투르 때문에 울컥했다.
“아직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잖아요, 전 이미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게 그렇게 쉽나?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온도가 필요해. 물도 끓어야지만 뜨거워져. 나도 그래.”
“그러니까 공작님 말씀은 끓고 있다는 건데 갑자기 왜 끓기 시작했습니까!”
“자네에게 일일이 설명할 이유 없지. 내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 건 자네가 내 아내에게 청혼하겠다며 허락을 구했기 때문이야.”
안투르는 세미에게 바싹 붙었다. 무표정했지만 자아내는 기운은 섬뜩하리만치 고압적이었다.
“내 경고도 무시해 가며.”
“저는…….”
“자네 얘긴 그만 듣고 싶군.”
“공작님!”
“난 이혼 안 해, 록시나는 내 아내야. 그 저열한 감정을 죽이지 않으면 당장 추방해 버릴 줄 알아!”
안투르는 고함치고 경고하는 걸로 모자라 세미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까지 유지했던 품격이 사라지고 짐승처럼 돌변한 안투르가 펄펄 끓는 입김을 씩씩거렸다.
“내 아내를 탐하는 건 용서 못 해.”
***
“콜록콜록, 콜록콜록.”
의식을 잃은 것처럼 늘어졌음에도 기침만큼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열과 오한이 교차했기 때문에 두꺼운 이불과 얇은 이불 두 채가 침대 위를 어지럽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까지 록시나를 간병하던 키에라는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 누…….”
“조용히 해.”
안투르가 속삭였다.
“고, 공작님…….”
“네 방에 가서 편히 자.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안 돼요, 그러다 옮기라도 하면…….”
“너도 마찬가지잖아.”
“저라도 있어야…… 이불이라도 갈아 드리죠. 지금은 더워서 이불을 걷어 내셨지만 곧 한기를 느낄 거예요.”
키에라는 록시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덧붙였다.
“이따금 흐느껴 우세요.”
“참고하지.”
“공작님…….”
“네가 그랬지? 록시나가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고.”
“그땐 화가 나서…… 죄송해요.”
“틀린 소린 아닌 것 같아. 원인이 나인 것 같으니까 간병하겠다는 거야.”
안투르의 대답에 키에라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졌다. 키에라는 안투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잘못 먹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심경의 변화니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록시나를 걱정해 줘서 고맙다. 무리하지 마. 그러다 쓰러지면 록시나가 네 간병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테니까.”
“그렇다고 공작님이 하시는 것도…….”
“이만 나가 봐.”
안투르는 키에라의 말허리를 자르며 록시나의 이마에 올린 물수건을 짚었다. 갈아 줄 때가 된 듯 뜨끈뜨끈했다. 그는 물수건을 바꿔 준 후 옆에 앉았다.
하루 사이에 입술이 부르튼 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는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메마른 입술에 물기를 축였다.
“그, 그럼 좀만 눈 붙였다가 올게요.”
“아침 식사 먹고 와.”
“그때까지 계시게요?”
“그래.”
“……예.”
키에라는 고개를 꾸뻑 숙인 후 침실을 나갔다. 안투르는 록시나의 뺨을 감쌌다. 뜨겁다. 항상 뜨거웠던 아내였지만 오늘은 웃음이 나오기보다 안쓰러움이 컸다.
“이봐, 록시나…… 예고라도 좀 해. 갑자기 앓아누워 버리면 겁나잖아.”
“으…… 으…… 흣.”
록시나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키에라가 말한 대로 오한이 시작되나 보다. 그는 그녀에게 두꺼운 이불을 덮어 줬지만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안투르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제 체온이라도 나누면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는 땀에 전 몸을 휘감고 있던 잠옷을 벗겨 낸 후 끌어안았다.
록시나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후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아…… 하…… 누, 누구…….”
잠옷을 벗긴 후 끌어안았더니 록시나가 눈꺼풀을 힘겹게 들었다. 초점을 잃은 눈이 허공을 더듬다가 안투르의 얼굴에 고정됐다.
“안 보여…… 누구야…….”
“당신 남편.”
한참 동안 뜸을 들인 끝에 대답했지만 록시나에겐 닿지 않았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던 그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의식을 잃었다.
안투르는 록시나의 뺨에 제 뺨을 문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에 열감이 몰려 뜨끈뜨끈했다. 두렵다. 이러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상황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갑자기 왜…….
록시나…… 그동안 우린 꽤 좋았잖아.
빨리 털고 일어나서 초대장을 보내 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