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가슴이 철렁
장소를 바꾼 탓일까?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침실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하녀와 시종들에겐 별궁의 부속 건물에서 지내라고 말했기 때문에 침실이 있는 본관엔 록시나뿐이었다.
도둑이 들 리 없겠지만 미세한 소리에도 흠칫 놀라기 일쑤고, 별궁을 오래 비운 탓에 들어와 있던 귀뚜라미가 튀어나올 땐 비명이 터졌다.
휘네 궁전에 있었다면 키에라라도 달려와 귀뚜라미를 잡아 줬을 텐데 그녀가 비명을 질러 대도 그 누구 하나 달려오지 않았다.
“무서워.”
록시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째서 그는 오지 않는 걸까? 초대장이 전달되지 않았나?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으로 인해 눈물이 솟구쳤다.
“빨리 와 줘…….”
록시나는 가면 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렇게 있으려니까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는 날이면 성탑에 갇혔었다.
성탑은 넓었지만 하루 두 번, 끼니를 챙겨 주는 하녀의 출입 외엔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아버지는 록시나가 반항하는 걸 차단하려고 수시로 성탑에 가두었다.
록시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외로움이라는 걸 아버지는 잘 알았다. 아버지는 외로움을 뼛속까지 심어 주며 그녀가 품었던 모든 희망을 앗아 갔다.
다시는 자신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인형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길들여진 탓인지 록시나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늘 절망 속에서 살아갔고 원하는 게 있어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하는 걸 말하는 순간 약점이 되었기 때문에 진심을 말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남창에게도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나이는 몇인지,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어디에 사는지…… 하물며 잠자리를 하면서 느낀 감정은 무엇인지.
어차피 통하지 않을 감정이자 이루어질 수 없는 욕심이라는 걸 잘 알았다. 단순 쾌락만이 록시나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라는 것도.
“왜…… 안 와…….”
록시나는 팔을 문질렀다. 춥다. 온기가 필요한 육신은 깨알 같은 소름으로 인해 오돌토돌 거칠었다.
“빨리 와…….”
록시나는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첫 만남 이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을 찾아 준 건 남창뿐이었다. 그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고 싶다.
“흐읏…….”
설움이 솟구쳤다. 그녀는 흐느낌이 터지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적막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낯빛이 하얗게 질렸을 때 침실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커튼 뒤에 숨었다.
남창인가? 아니면…….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녀는 커튼 뒤에 숨어 문을 응시했다. 곧 촛불을 든 남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
록시나는 안도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평화가 두통이 생길 만큼 정수리를 짓눌렀던 공포심을 밀어냈다.
그녀는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며 아무렇지도 않았던 양 커튼을 젖혔다. 이불을 팔에 걸친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사내를 맞았다.
“늦었네? 기다리기 지루해서 달구경 중이었어.”
록시나는 태연하게 말한 후 사내에게 다가갔다. 촛불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린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도 없고 표정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녀는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왜 그렇게 봐?”
록시나는 이불을 침대에 던지며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렇게 볼 시간에 키스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록시나는 침대에 누워 옆자리를 두드렸다. 사내가 옷을 벗으며 걸어왔다. 그녀는 잠옷 치마를 허벅지 위로 올리며 어둠 속인데도 윤기가 흐르는 다리를 보였다.
사내의 다부진 상체가 드러났다. 그녀는 한껏 기대한 눈빛을 감추지 못해 입꼬리를 올렸다. 욕정뿐일지라도 어두웠던 안색이 달빛처럼 환하게 빛났다.
사내가 침대 위에 올랐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제게 고정한 그가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록시나는 발가락을 오므렸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속옷을 입지 않아 보들보들한 삼각지로 향했다.
금사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음모가 한 올, 한 올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녀는 그의 팔과 등,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며 애를 태웠다. 훕. 록시나가 숨을 들이켰다. 사내의 손이 닫혀 있던 골짜기를 열었다.
제 손길을 기다렸던 만큼 촉촉하게 젖은 속살은 손가락을 녹이려는 듯 뜨거웠다. 그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바라보며 입술을 혀로 쓸었다.
손가락과 혀를 빠르게 움직이자 그녀가 허리를 비틀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손끝으로 작은 돌기를 꼬집듯이 비틀고 가볍게 누르며 애무했다.
젖꼭지가 단단하게 굳어 가는 걸 확인한 그녀가 배를 더듬었다.
“윽.”
사내가 신음했다. 바지 속에 넣은 손이 페니스를 쥐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신체의 일부였다.
“아…….”
록시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의도적으로 가슴을 내민 그녀가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 전에는 하지 않았던 키스 마크를 남기기 시작했다.
“읏.”
목에 잇자국을 내며 살갗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고요했던 사내가 신음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거머리처럼 입술을 붙였다.
록시나가 사내를 쓰러트려 눌렀다. 그녀는 그에게 올라탄 후 잠옷을 벗었다. 출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젖가슴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사내가 록시나의 젖가슴을 양손으로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유두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사이 달아오른 그녀가 바지를 벗겨 페니스를 꺼냈다.
그리고 안투르가 희롱한 구멍에 천천히 넣으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
록시나는 어깨를 옹송그렸다. 깔고 앉는 것도 꽤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아흣!”
강철 같은 기운이 자궁벽을 부술 듯이 치받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기둥의 뿌리까지 집어삼킨 그녀가 교성을 터트렸다.
“아…… 아하, 아!”
그녀는 붙잡힌 젖가슴이 아플 정도로 세게 눌릴 때마다 눈을 파르르 떨었다. 사내가 얼굴을 앞으로 뺀 자세로 유두를 입에 넣고 굴린 탓이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감쌌다. 그가 유방에 손가락 자국을 낼 만큼 힘을 주고 있던 그가 엉덩이를 벌렸다.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계곡을 문지르며 항문을 자극했다.
“아!”
록시나가 부르르 떨었다. 괄약근을 눌렀다가 뗄 때마다 정수리에서 시작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흣!”
록시나가 발작했다.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마찰열로 인해 뜨끈해진 회음부가 우윳빛이 도는 애액으로 인해 끈적거렸다.
그것은 마치 아교풀 같았다. 치대면 치댈수록 수분기가 날아간 그것은 하얀 점액질의 찰기가 강했다.
록시나가 젖가슴을 흔들어 대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사내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돌려 앉힌 후 한 손으로 골반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항…….”
록시나가 고개를 젖혔다. 사내가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자극했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살점을 세게 누르며 비벼 대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헐떡거렸다.
록시나가 발버둥을 쳤다. 그의 손을 회음부에서 떼어 내려고 손목을 밀쳤지만 소용없다. 그는 강압적일 만큼 힘을 줘 독수리 부리처럼 솟구친 돌기를 문질렀다.
“안 돼, 그만!”
회음부가 너덜거렸다. 페니스를 잘근잘근 씹어 대는 질 구멍, 오줌을 찔끔거리는 요도구, 자글자글한 주름이 헐거워진 항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만, 그만해!”
록시나는 아랫배를 튕겼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무릎을 세운 그녀가 도망치듯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가 얼굴을 이불에 박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꾹 누른 그는 상대적으로 세운 엉덩이를 한껏 벌렸다. 애액을 콸콸 쏟아 내는 질 구멍에 귀두를 문지른 그가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그는 능숙했고 빨랐다. 창을 찌르고 빼는 것처럼 신나게 허리를 튕기자 단단한 고환이 회음부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힘과 마찰에 벌겋게 달아오른 음순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읏, 흐읍!”
록시나는 이불을 꼭 쥔 채 신음했다. 목덜미가 눌린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어 발등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흐려진다.
현기증이 일어 몸의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릴 때 사내가 아랫배를 꽉 조이며 격렬한 몸놀림으로 그녀를 황홀경으로 몰아갔다.
“흣, 읏!”
록시나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하응!”
빡빡하게 힘이 들어간 구멍이 조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엉덩이를 위아래로 들썩거리며 그와 하나가 되었다. 사내의 숨결이 등에 달았다. 그가 등에 땀방울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후드득 떨어지는 물기와 공기 중에 섞이는 살 내음과 땀 냄새가 콤콤했다.
록시나가 비명을 질렀다. 절정의 파도가 그녀를 집어삼킨 모양이다. 허벅지 안쪽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갈 것 같아…… 아, 아!”
록시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육욕에 젖은 몸은 탐욕적이었다. 그녀는 이불을 쥐고 있던 손으로 회음부로 더듬었다. 클리토리스를 찾아낸 손가락이 빠르게 회전했다.
“흐읍, 흐읍!”
숨을 거칠게 들이마신 그녀가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아플 정도로 세게 문질렀다.
“하!”
짧은 탄성과 함께 사지가 떨렸다. 후두부를 강하게 때리는 전율에 교성을 터트린 그녀가 하복부에 힘을 줬다. 페니스를 밀어낼 것처럼 조이기 시작한 자궁이 진동했다.
“윽!”
사내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눕힌 후 페니스를 흔들었다. 개구리처럼 뻗어 있던 그녀가 몰아쉬는 숨결과 함께 낱알을 털어 내는 것처럼 페니스를 흔들던 그가 콧등을 구겼다.
록시나는 가볍게 쥔 주먹 사이에서 흔들리는 페니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발악하듯이 흔들어 대며 끙끙 앓을 때 핏물이 고인 것처럼 부어 있던 귀두에서 우윳빛 정액이 솟구쳤다.
그것은 정확히 그녀의 얼굴과 가슴, 배를 적셨다. 깜짝 놀란 록시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았다.
정액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따뜻하고 미끄덩거리는 점액질을 바라보던 그녀가 침을 삼켰다. 문득 무슨 맛일까 궁금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세워 입에 넣었다. 혀끝으로 정액을 핥으며 맛을 보던 그녀가 씩 웃었다.
썩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정액을 빨아 먹자 사내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반응에 설렜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다른 손으로 제 몸에 묻은 정액을 문질러 펴 발랐다.
특히 젖꼭지에 맺힌 정액을 문지르며 색정적인 미소를 짓자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쪽쪽거리던 입술을 넓게 벌렸다.
사내가 혀를 내밀었다. 키스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내가 쿡쿡쿡 웃었다. 그녀의 도발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혀를 팔랑팔랑 움직이며 목구멍을 꽉 채운 그가 그녀의 손목을 목에서 떼 머리 위로 올렸다.
정액을 쏟아낸 지 얼마 안 됐으면서 되살아난 분신이 무한한 힘을 과시하고 싶어 팔팔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한 손으로 결박한 후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들어 올려 제 허리를 감싸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록시나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회복이 반가웠다.
“너무 좋아.”
록시나는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게 섹스라고 생각할 거다.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좋아하게 됐지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이혼이 결정되면 헤어지게 될 테니까.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창이 그녀를 취하는 이유가 돈벌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게 일회성인 관계 때문이라도 그녀는 감정을 숨겨야 했다.
“네 좆이 너무 좋아…….”
이런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하며.
록시나는 사내에게 깔린 채 흐느꼈다.
***
록시나가 눈을 떴을 땐 혼자였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새벽 공기가 팔에 감겼다.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이불을 어깨까지 두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공기 때문에 문을 닫고 싶었다. 테라스 바닥이 젖은 걸 보니 비가 왔었나 보다. 하늘이 맑게 갠 것으로 보아 비가 그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하지만 새벽 공기에 섞인 비 냄새는 비릿했다. 그녀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다 무심코 테라스를 둘러봤다.
흡! 방을 나간 줄 알았던 사내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주변의 경치를 감상 중이었다. 록시나는 얼굴을 더듬었다. 다행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사내는 어떨까? 그도 가면을 쓰고 있을까?
문득 사내의 생김새가 궁금했다. 그녀는 발소리를 최대한으로 죽인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숨기려고 숨도 쉬지 않았지만 사내는 예민한 편이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걸 느낀 듯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실망스럽게도 그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여민 손에 힘을 줬다. 밤에만 보다가 동이 터 밝아지는 새벽에 마주 보고 있으려니 민망했다.
“왜…… 안 갔어?”
뺨을 긁적거린 록시나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난간 밖으로 돌렸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사내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록시나는 용기를 내 사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가면 밑으로 드러난 콧날과 인중, 입술, 각진 턱이 꽤 매력적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도 했지만 얼굴의 반을 가리면 그런 착각에 빠지는 게 당연할 것도 같았다.
“벙어리야? 저번에도 느꼈지만 말 한마디를 안 하네.”
록시나가 대답을 재촉하자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게 그의 대답인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근육과 힘줄이 뒤엉킨 허벅지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분신에 고정됐다.
록시나는 뺨을 긁던 손으로 입을 가렸다. 탄성 어린 비명이 터질 뻔했다. 밝은 곳에서 보니까 실로 엄청났다.
저렇게 큰 것이 제 몸속에서 요동쳤다고 생각하니 가랑이 사이가 홧홧했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안 간 거야?”
사내가 페니스를 흔들었다. 가볍게 쥔 걸 부드럽게 밀었다가 당기며 푸딩처럼 윤기가 흐르고 탱글탱글한 귀두를 흔들었다.
저걸 입에 넣고 맛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의 손짓은 위험했다. 그녀는 혀로 어금니를 훑었다.
“한 번 더 하고 싶었어?”
록시나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는 이번에도 턱을 살짝 기울였다.
“나도 좋아해.”
록시나는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에서 손을 뗐다. 이불이 어깨에서 맥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눈앞의 사내처럼 가면 외엔 그 어떤 것도 걸치지 않은 몸매가 드러났다.
록시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햇볕을 받은 몸매는 반짝거릴 만큼 윤기가 흐르고 건강했으며 고혹적이었다.
그녀는 요염한 눈빛을 보내며 손가락으로 젖가슴을 가볍게 쓸었다. 어젯밤 그가 빨았던 가슴이 멍 자국과 잇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네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밝은 곳에서 보니까 어때?”
사내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꽤 괜찮은 몸인 거 아니?”
그는 입꼬리만 올렸다. 아나 보다.
“남창인 게 아까울 정도야.”
록시나는 솔직한 심정을 스스럼없이 내뱉으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입술을 크게 벌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혈색 좋은 혀가 길게 빠졌다.
“빨아 줄까?”
록시나는 유혹적이었다. 힘을 뺀 눈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밑으로만 먹었더니 입으로 먹는 건 어떤 맛일지 기대돼.”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맛있어야 할 텐데…….”
록시나는 팔을 뻗어 페니스에 댔다. 제 손목보다 굵고 팔꿈치보다 길게 빠진 길이에 숨이 차올랐다.
이런 게 쑤셔댔으니 자꾸만 생각나지.
록시나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그녀는 혀끝으로 입술에 침을 축인 후에야 발기한 페니스에 입을 맞추었다.
사내가 눈을 감으며 신음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기둥을 잡았다. 이렇게 양손으로 잡아도 남을 만한 길이에 눈웃음이 쳐졌다. 그녀는 탐욕적인 시선으로 귀두를 노려봤다.
기둥을 꽉 잡았더니 귀두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귀두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다정했다.
록시나는 천천히 페니스를 입에 넣었다. 턱이 뻐근할 정도로 크게 벌렸더니 눈가가 붉게 변했다.
항상 밑으로만 넣었던 걸 입으로 느끼게 되자 기분이 새로웠다. 손으로 만졌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제 밑구멍을 쑤셨던 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정성스럽고 맛깔나게 기둥과 귀두를 빨아들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턱을 다물었다가 벌리는 등 달큼한 맛을 음미하자 신음이 들끓었다.
사내의 허벅지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힘줄과 핏줄이 울뚝불뚝 솟구쳐 고목의 뿌리가 뒤엉킨 산길 같았다.
그녀는 양 허벅지를 꽉 잡았다.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이 뜨거웠다. 그는 귀두를 입 안에서 굴리며 어금니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갈라진 살결이 미끌미끌했다. 몇 시간 전, 사내가 부어 놓은 정액과 애액이 끈끈하게 흘러 내렸다. 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체액과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내린 침이 턱을 적셨다.
록시나는 사내의 허벅지에서 손을 미끄러트려 벌어진 음부를 문질렀다. 손가락 두 개를 세워 질 구멍에 넣고 쑤시며 혀를 굴리자 가슴이 들썩거렸다.
록시나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목구멍 깊숙이 처넣은 귀두가 목젖을 자극했다.
“콜록콜록!”
록시나는 페니스를 뱉어 내며 침과 콧물을 쏟아 냈다. 추잡한 꼴일 테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힘이 풀린 눈을 들어 사내를 올려본 그녀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손가락으로 구멍을 쑤시고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하아, 아…… 하아…….”
록시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하자 사내가 그녀를 일으켜 세워 난간에 걸쳤다. 넓게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붉은 빛을 띠는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페니스를 내리꽂았다.
“흣!”
록시나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가 그녀의 팔을 허리 뒤쪽으로 끌어당기며 피스톤을 시작했다. 앞으로 쑥 빠진 젖가슴이 덜렁덜렁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묵직하고 컸던 탓에 흔들릴 때마다 유방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통에 전 신음을 토해 내며 푸른 하늘을 더듬었다. 쨍쨍한 햇살이 발가벗은 몸뚱어리를 뜨겁게 달궜다.
살갗이 따끔거렸지만 출렁거리는 젖가슴,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쑤시고 들어와 들이치는 파동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록시나를 번쩍 들어 벽에 밀쳤다. 이번에는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페니스를 뺀 구멍을 제 허벅지에 대고 문지르게 한 그가 입술을 겹쳤다.
그는 야수였다. 그녀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허리춤을 췄다. 허벅지에 대고 질구를 문질렀더니 발가락 끝까지 짜릿했다.
이번에는 무릎을 세운 그가 클리토리스를 자극했다. 배꼽을 중심으로 회오리가 치기 시작했다. 혀를 맞붙인 채 허리를 들썩거리던 몸을 움찔거렸다.
“아하…… 흣…… 아흣.”
록시나는 신음했다. 어느새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오늘은…… 나와 같이 있어…… 돈, 돈은 몇 배로 줄 테니까…… 혼자 두지 마.”
록시나는 사정했다.
“같이 있고 싶어…… 계속 안아 줘.”
거칠어진 숨결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혼자 두지 마…….”
록시나는 두 손을 겹쳤다.
“돈을 몇 배로 줄 테니…… 앗!”
사내가 페니스를 삽입했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흠칫 놀란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손톱이 깊이 박힐 만한 통증에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간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아아…….”
벽과 사내 사이에 갇힌 그녀의 몸이 맥없이 흔들거렸다. 그는 도끼질을 하는 나무꾼처럼 자신의 무기를 정열적으로 휘둘렀다.
허공에 쳐들린 다리가 가늘고 질긴 줄에 매달려 춤을 추는 마리오네트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녀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 자신이 깨물었던 목에 보랏빛이 도는 멍 자국이 생겼다.
처음으로 만들어 본 키스 마크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소유했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해 기뻤다.
지금도 소유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그런지 꿈 속 같았다.
록시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엉덩이가 날리듯 들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눈물이 솟구쳤다.
코끝은 찡했고 배 속에선 야릇한 기운이 용솟음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윽!”
사내가 단말마의 비명 같은 신음을 토했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힘을 줘 안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오늘은 종일 같이 있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심장 박동이 전달됐다.
거칠게 뛰는 심박동에 울컥했다. 마음속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으며 눈을 감았다.
두피가 젖어 있었다. 땀 때문이었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고마워…… 내 부탁을 들어줘서.”
***
「저녁에 다시.」
남창이 놓고 간 서신에 시선을 고정한 록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서 100번도 넘게 보고 또 보고.
“하아…….”
한숨 또한 수십 번이나 내쉬고 또 내쉬며 끓어오르는 짜증을 함께 토했다.
“공작 부인, 이것 좀 보세요. 침실에 두면 정말 조화롭겠죠?”
휘네 궁전에 있어야 할 하녀 키에라가 장미를 잔뜩 꽂은 화병을 들고 와 물었다. 록시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챙겨 온 걸 텐데 화가 치밀었다.
키에라가 아침 댓바람부터 들이닥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오늘은 종일 침실에서 사랑을 나눌 계획이 틀어져 입 안이 썼다.
뚱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자 키에라가 록시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휘네에 남아 있으라니까…….”
“또 그 소리예요?”
“휘네를 지키라고 했잖아.”
“제 주인은 공작 부인인데요? 그리고 그 커다란 건물이 발이 달려 도망갈 것도 아닌데요.”
키에라는 화병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휘네보단 규모가 작지만 넓은 숲과 호수는 정말 절경이에요. 공기가 단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기분이 좋아 보여.”
“공작 부인은 어떠세요? 원하시던 대로 휘네를 나온 소감이요. 막 들뜨고 그래요?”
“그냥저냥.”
록시나는 서신을 반으로 접어 서랍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은 언제 먹을 수 있어?”
“점심시간까진 두 시간이나 남았어요.”
“시간이 그렇게밖에 안 됐어?”
“출출하세요?”
키에라가 물었다. 록시나는 입술을 오므린 채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 보니까 초콜릿과 쿠키를 먹은 후론 내리 공복 상태였다.
“오늘은 일찍 먹지 뭐.”
“예, 조금만 기다리시…….”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필라프가 활짝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록시나는 키에라에 이어 필라프까지 찾아와 인상을 찡그렸다.
“루지에나 후작 부인께서 초대를 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며느님, 알리샤 부인께서 아들을 출산하셨잖아요. 이젠 손님을 맞을 때가 됐다시며…….”
“손자 자랑을 하고 싶은 거겠지.”
“반드시 참석하셔야 합니다. 공작 부인으로서 마땅히 얼굴을 비쳐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필라프는 록시나에게 공작 부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했다. 책임은 있으나 권리와 행복이 없는 비운의 공작 부인.
“언제까지 가야 해?”
“점심식사 초대입니다.”
“오후엔 또 폴로 게임 같은 걸 할 테고?”
“여흥이 빠질 수 없죠.”
필라프의 대답에 록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키에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치 빠른 그녀가 손바닥을 비비며 대답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우아한 공작 부인으로서 참석하셔야 하니까 짙은 남색이 인상적인 드레스에 루비…….”
키에라는 록시나를 화려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는 만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록시나는 욕실로 걸어가며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손짓을 했다.
***
“안녕하십니까, 공작 부인!”
안톤 후작의 성에 도착한 록시나를 제일 먼저 맞은 건 하네스와 라울, 세미였다. 세 사람은 후원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록시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후 세 사람을 지나쳤다.
“공작 부인 말이에요. 너무 아름다워요.”
세미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위험한 발언이군.”
라울이 인상을 찌푸리자 무심코 내뱉은 말에 제 자신도 놀란 세미가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사실인데요. 요 근래 미모에 물이 오른 건 사실이잖아요. 이혼하기로 정한 후론 마음이 편하신가……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하네스가 세미를 감싸자 라울이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하네스는 그런 걸로 눈 하나 깜짝할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라울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록시나의 외모를 찬양했다.
“이혼 후엔 재혼처가 줄을 설 겁니다. 얼굴 되지, 몸매 되지, 폐하를 모시는 관료인 아버지가 있지, 젊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요.”
“정말 이혼하시나요?”
“이혼 합의서가 폐하께 전달이 됐으니까. 폐하의 결정에 따라…….”
“공작 부인과 혼인하려면 얼마나 필요할까요?”
세미의 물음에 하네스와 라울이 눈빛을 교차했다. 두 사람은 세미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세미가 얼굴을 붉히며 머쓱해 했다.
록시나에게 연심을 품은 게 표정에서 드러났다. 하네스는 키득거렸지만 라울은 정색했다.
“말단 기사는 꿈도 못 꿀 금액이지.”
“얼마인지…….”
“자네는 공작님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기사야. 공작 부인께 품어선 안 될 마음이니 빨리 정리하게.”
라울이 핀잔을 주는 사이 안톤 후작과 밀담을 나누르라 후원을 거닐던 안투르가 다가왔다. 안투르는 검푸른 색상의 재킷차림으로 잘생긴 외모를 돋보이게 했는데 그 모습이 우아했다.
“막 공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라울이 보고하듯 말했다.
“공작 부인께 인공 연못 근처에 지반이 약한 곳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전해.”
안투르는 안톤 후작과 걷다가 발이 빠질 뻔한 걸 떠올리며 말했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연못가 인근에서 티타임이 열릴 예정이라 불안했다.
“그렇다고 위험한 건 아니고, 발이 빠질 정도니까 구두를 버리지 않으려면 조심하라고 전하게.”
안톤 후작이 오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설명을 붙였지만 라울이나 하네스, 세미는 왜 그런 곳에서 티타임을 가져야 하는지 의아했다.
그러자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난 생각을 읽은 안톤 후작이 씩 웃었다.
“내 아내가 고집을 부려서 장소를 바꿀 수가 없어. 티타임을 하기엔 그만한 경치가 없다지 뭔가.”
“아…….”
모두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대답에 안톤 후작은 머쓱해했다. 안톤 후작은 애처가나 공처가라기보단 아내에게 꽉 잡혀 사는 걸로 유명했다.
아내의 성격이 워낙 드세다 보니 큰소리는커녕 의견을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안투르는 안톤 후작과 함께 3층짜리 저택으로 들어갔다. 넓은 응접실엔 아내와 며느리, 아들과 손자, 초대에 응한 귀족들이 있었다. 록시나 역시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안투르는 자연스럽게 록시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에 눕힌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신기한 듯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녀가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얼굴을 돌렸다.
안투르는 뒷짐을 지고 다가가 아이를 흘끗 봤다.
“건강하겠군.”
사내아이는 통통하고 깜찍해 인형처럼 예뻤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록시나가 맞장구를 쳐 주지 않아 안투르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네, 예뻐요.”
록시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안투르는 저와 록시나가 맞춰 입은 듯 드레스 색이 비슷해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아랫도리가 불끈거릴 만큼 고혹적이고 도발적이었다.
그는 주변을 슥 둘러봤다. 록시나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내가 있나 싶어 저도 모르게 경계하고 만다. 다행히 사내들은 삼삼오오 모여 창밖을 내다보거나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였던 그가 테이블에 놓인 주스 잔을 집었다. 그러자 록시나가 자연스럽게 그를 지나쳤다. 같이 있기 싫은 듯 멀찍이 떨어져 앉는 바람에 그는 입맛을 다셨다.
남창인 줄 아는 자신을 대할 때완 사뭇 달라 씁쓸했다. ‘같은 사람이야!’라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울컥했다.
안투르는 주스를 마시며 록시나를 쳐다봤다. 그는 노골적이었지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제 시선을 느낄 텐데도 고집스레 다른 곳을 봤다.
“제대로 보질 않으니 모를 수밖에.”
록시나가 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접어야 하는 순간마다 쉽게 포기했다.
안투르 퍼시가 남창인 척 밤마다 찾아가는 사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제게 이혼을 요구하며 생활비를 끊어 버린 남편에게 희망을 버린 상태라면 의심을 기를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형식적으로 가졌던 잠자리완 사뭇 다르지 않았던가. 가면을 썼을 뿐인데 왜 못 알아보냐며 답답해하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관심에서 한참이나 내쳐졌을 테니까.
과거 안투르가 그랬던 것처럼.
“젠장……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안투르는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최근 들어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명치가 아팠다. 쫓기는 것처럼 불안하고 호흡이 가빠질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록시나와 잠자리를 한 후부터 시작된 통증이었다.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하다가 울화통이 치밀었다.
지금처럼…….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 주니까 사람이 달라졌다. 얄미울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바람에 수시로 울컥거렸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건지.
지루한 티타임에 불편한 안투르.
이에 질세라 잊을 만하면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와 달래는 엄마. 록시나는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연못가에서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뗐다.
피임을 위해 매일매일 데보라가 준 차를 마시는 자신에게 아이의 울음소리는 독약이었다. 애써 외면하던 감정이 코끝을 찡하게 하는 바람에 눈가가 붉어진다.
아이의 엄마. 록시나에겐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재혼을 하게 되면 그땐 자식을 얻을지 몰라도 가능성은 희박할 거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은 한 임신할 마음이 없었다.
자신처럼 불행한 인생을 또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복한 환경에서 사랑을 듬뿍 줄 수 없을 바엔 무자식으로 사는 게 뱃속이 편했다.
저렇게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만 빼곤.
“답답해.”
록시나는 명치를 눌렀다. 연못가 인근에 핀 꽃이 살랑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잎을 따라 움직였다.
어느 순간 꽃을 감상하듯 넋을 놓게 됐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서서 외로운 시간 속에 갇혀 있을 때 세미가 그녀를 불렀다.
“공작 부인?”
“응?”
“어딜 그렇게 보세요?”
“응…… 그냥, 이것저것.”
“아름다우세요.”
세미가 속삭이듯 고백했다. 록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정말 아름다워서 가슴이 뛰었어요. 그 말을 하려고요.”
세미의 고백은 뜬금없었지만 공허함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은 소녀처럼 뺨을 붉혔다.
“고마워.”
“오, 오늘 뭐 하세요? 이를테면 저녁에요.”
“그건 왜 물어?”
“필립 경의 댁에서 모임이 있다고…… 귀부인들도 꽤 오신대요. 혹시 참석하시나 해서요. 저도 초대를 받았거든요.”
“아…….”
“가시나요?”
록시나는 머리를 저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사교 모임은 피하고 있어. 사교계 데뷔, 어느 귀족가의 출산 모임, 결혼식, 생일…… 이렇게 대표하는 모임을 참석해야 하는 게 공작 부인의 책임이거든.”
“그럼 혹시 달구경 어떠세요?”
“달구경? 뜬금없이…… 보름달이 뜬 것도 아닐 텐데.”
“초, 초승달이 떴지만 예뻐요. 밤이니까요.”
세미는 록시나와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제 초콜릿을 먹으며 지냈던 시간이 달콤하고 가슴 설레 오늘도 같이 있고 싶었다.
“시간이 나시면…….”
“여기서 뭐 하나?”
안투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덕분에 세미의 얼굴이 붉게 타올라 보기 안쓰러웠다.
“고, 공작님.”
“내 호위를 할 자네가 공작 부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거슬리는군.”
안투르는 틈만 나면 자리를 비우며 록시나의 주변을 맴도는 세미를 따끔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죄송합니다. 고, 공작 부인께서 혼자 계셔서…….”
“혼자 계시면 자리를 이탈해도 되나?”
안투르는 눈매를 이지러트렸다.
“제가 불렀어요.”
록시나가 세미를 감쌌다.
“심심해서 부른 거니까 세미를 나무라지 마세요.”
“아닌 거 알아.”
안투르는 짜증조로 쏘아붙인 후 콧바람을 불었다. 그의 시선은 록시나의 발치로 옮겨졌다. 지반이 약한 곳에 서 있을 건 뭐람?
“이리 와. 거긴 지반이 약해.”
“지반이 약해요?”
록시나는 무슨 소리인가 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흙이 젖은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약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녀는 안투르를 째려봤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데 안톤 후작이 거긴 지반이 약하다고 했어.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나.”
“예, 저도 안톤 후작님께 들었습니다. 거기만 흙 색깔이 다른 게 마음에 걸리네요. 이리 오시죠.”
세미가 뒤로 물러나며 발로 땅을 두드렸다. 제 딴에는 지반이 튼튼하다는 걸 확인시키려고 한 행동일 테지만 덕분에 록시나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사고는 한 순간에 벌어지듯 록시나의 몸이 기우는 동시에 밟고 있던 땅이 밑으로 훅 꺼졌다. 깜짝 놀란 록시나는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었다.
“록시나!”
“공작 부인!”
안투르와 세미가 록시나에게 팔을 뻗었다. 안투르의 키보다 훨씬 깊은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꺼진 땅 위로 록시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안투르와 세미에게 양팔을 잡힌 채였다.
“발이 젖는 정도가 아니잖아!”
안투르가 짜증을 확 부릴 즈음 웅덩이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연못에서 새어 든 물이 흙 위를 덮기 시작하는 바람에 떨어트린 구두가 늪지대에 삼켜졌다.
“꽉 잡아!”
안투르가 세미에게 소리쳤다. 건장한 사내 둘이 록시나를 잡고 있었지만 밑으로 쑥 꺼져 버린 그녀를 들어 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움푹 팬 땅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세미는 겁에 질려 록시나를 끌어올렸지만 그럴수록 발에 무게가 실리면서 흙이 부서졌다.
“세미, 비켜!”
안투르가 고함쳤다. 세미가 도움이 되지 않자 안투르가 어깨로 밀치며 록시나를 끌어 올렸다. 초인적인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긴 그가 허리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반대편으로 몸을 굴렸다.
“괜찮아요!”
티타임 중이던 귀족들이 숨죽인 채 보고 있다가 안투르가 록시나를 구해 내자 달려왔다.
“공작님, 공작 부인!”
안톤 후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길 봐요! 저기 빠졌다간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험한 걸 알면서 왜 여기서 티타임을 해요!”
안투르가 고함쳤다. 록시나를 껴안은 채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안톤 후작이 뒷걸음을 쳤다. 눈에서 번들거리는 짜증과 분노의 빛이 강렬한 탓에 겁을 집어먹었다.
“여긴 위험하니 장소를 옮깁시다!”
안투르는 안톤 후작에게 고함친 후 세미에게도 화를 냈다.
“뭐 보고 있어! 공작 부인의 구두를 찾아오지 않고!”
완전히 집어삼켜진 구두를 찾아오라는 소리에 세미는 웅덩이를 응시했다. 저기 들어가서 건져오라는 건가?
죽으라는 소리로 들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할 때였다. 록시나가 안투르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마차에 여벌의 구두가 있어. 그걸 가져다주겠어?”
이번에도 세미의 구세주는 록시나였다. 세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구두를 가지러 갔다.
“왜 그렇게 화를 내요? 세미의 잘못도 아닌데.”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록시나가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안투르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을 붉은 장미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먼저 갈게요. 사람들에겐 놀란 탓이라고 해 주세요.”
록시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빨개진 얼굴과 사뭇 대조적인 말투였다.
“……데려다 주지.”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도 가려던 참이야.”
“혼자 가고 싶어요.”
록시나는 연거푸 침을 삼켰다. 안투르가 자신을 끌어당길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후로 진정되지 않는 떨림 때문에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가빠지는 호흡 때문에라도 안투르를 멀리하고 싶었다.
“공작 부인, 여기 구두를 가지고 왔습니다!”
구두 상자를 품에 안은 세미가 뛰어왔다. 세미의 등장 덕분에 어색하고 불편했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록시나는 서둘러 신고 있던 한쪽 구두를 벗었다. 그러자 세미가 상자에서 구두를 꺼낸 후 신기려고 들었다.
“세미!”
안투르가 고함쳤다. 무릎을 꿇고 앉은 세미가 록시나의 발을 만지려는 행동이 거슬렸다.
“무례하군.”
안투르는 세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후 구두를 빼앗았다. 그러고 록시나가 들고 있던 발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감싸며 구두를 신겼다. 그의 시선은 세미에게 발을 드러낸 그녀를 힐난하듯 날카롭고 예리했다.
“발끝이라도 신중하게.”
안투르는 경고 섞인 음색으로 말한 후 록시나에게 구두를 신겼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발을 빼거나 자신이 신겠다고 할 그녀였지만 고요한 연못처럼 반응이 없었다.
양쪽 발에 새 구두를 신은 록시나가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안투르를 응시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 먼저 갈게요.”
복잡한 시선을 교차하며 입술을 꼬물거리던 록시나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찬바람이 불 만큼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안투르를 지나쳤다.
그는 록시나가 남기고 간 구두를 집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라 손바닥에 땀이 찼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안투르가 세미를 불렀다.
세미는 록시나의 뒷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움찔 놀랐다. 안투르가 세미의 어깨를 아플 만큼 세게 쥐었다.
“고, 공작님…… 시키실 일이라도…….”
“다시는 그러지 마.”
“예?”
“내가 있을 땐 공작 부인의 몸에 손을 대지 마라.”
이 얼마나 속 좁은 발언인가.
또한 이 얼마나 어이없고 한심한 태도인가.
안투르는 제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쏟아 내고 싶을 만큼 창피하고 속상했다. 하지만 세미의 노골적인 태도를 육안으로 확인한 이상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씹어 삼킬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후로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뛰는 바람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마차에 오른 후에도 진정이 되지 않아 두 손으로 가슴을 꽉 누르던 록시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잇자국이 팰 만큼 붉게 변한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었다.
“엉뚱하긴…….”
록시나는 헛웃음을 쳤다.
“어떻게 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넓은 어깨와 억센 팔, 폐부를 가득 채운 체향.
아니라고 하기엔 매일 밤마다 안기고 맡았던 향기였다. 혼란에 빠진 록시나는 이마를 짚었다.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춥다.
이마를 짚었던 손으로 팔을 문지르던 그녀는 몸을 옹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록시나의 눈빛이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물기 가득한 눈을 높이 쳐든 그녀가 마차 벽을 치며 마부를 불렀다.
“마레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