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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은밀한 초대 (6/13)

5화. 은밀한 초대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퍼시 공작령의 세금 징수 방법에 대해 골몰하던 라울이 창밖을 내려다보는 안투르에게 물었다. 약 한 달 전부터 상념에 잠기는 일이 많아진 게 마음에 걸렸다.

“전전긍긍하지 마시고 제게 털어놓으시면 조금은 도움이 될 텐데요?”

“자네는 록시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공작 부인이요?”

“그래, 내 아내…… 록시나 퍼시.”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이 없으신 편이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피해 다니기 때문에 파악하기 어려운 성격이거든요.”

“단지 그 느낌만 있나?”

안투르의 물음에 라울은 찻잔을 들었다. 집중력을 높이려고 마시던 페퍼민트 차의 향을 음미한 그가 찻잔 너머의 안투르를 탐색했다.

“요즘 꽤 공작 부인을 신경 쓰시는데…… 신변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생겼어.”

“건강에 이상이라도…….”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우리가 아는 록시나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밖엔 설명할 길이 없군.”

안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록시나가 이혼을 요구하며 내민 조건이 외도라는 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말 못 한다. 그는 창가에서 떨어져 제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를 뒤로 뺀 그는 무너지듯 쓰러져 앉으며 등받이에 목을 기댔다.

“라울, 자네는 안사람과 잠자리를 자주 하나?”

“일주일에 몇 번 정도는.”

“정기적인가?”

“정기적인 것보단 가만히 둘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

안투르는 피식 웃었다.

“가만히 둘 수 없을 때가 언제지? 궁금하군.”

“배란기 때요. 그땐 말도 못 하게 교태를 부려요. 평소완 완전히 달라집니다.”

“달라져? 어떻게 달라지지?”

“몸짓, 말투, 눈빛이 변하고 평소보다 적극적이라고 할까요?”

라울은 설명을 하면서 흐뭇해했다.

“그런 날엔 확실히 다르죠.”

“라울은 아내의 어디가 좋아서 이혼할 생각을 하지 않아?”

“잘 맞습니다. 언젠가부터 아내가 없는 집은 상상할 수 없게 됐어요.”

“아내가 없는 집을 상상할 수 없다…….”

안투르는 두 손을 겹쳐 배에 올렸다. 허벅지 위에 올린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다시 상념에 젖어 있는데 집사 필라프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라울이 물었다.

“공작 부인께서 짐을 싸고 계십니다. 별궁으로 옮기겠다고요.”

“나는 허락한 적 없어.”

안투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허락을 받으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공작 부인께서…… 집을 비워야 청소를 할 게 아니냐며…… 이혼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제멋대로군.”

안투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가서 해결하지.”

“공작님께서요?”

라울과 필라프가 동시에 물었다. 록시나에 관한 건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 처리하던 그가 스스로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혼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건지 모르겠군.”

“정리를 하는 건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공작 부인의 처지를 생각하면 휘네 궁전에서 지내는 게 불편할…….”

“아바마마께서 승인하기도 전에 소문부터 낼 필요 있나! 조용히 처리해도 될 걸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겠어!”

안투르가 고함치는 바람에 라울은 입술을 오므렸다. 한 마디만 더 했다간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 같았다. 그건 안투르도 느꼈는지 말없이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요즘 진짜 이상하시네.”

라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필라프도 안투르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라울처럼 중얼거리지 않았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만 하려는 듯 라울이 마시던 페퍼민트 차를 흘끗 본 후 물었다.

“페퍼민트 차가 떨어졌는데 새로 내올까요?”

***

“이걸 물처럼 마시면 임신이 되지 않아요. 천연 피임약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반년 이상 장기 복용을 하면 불임이 될 수 있으니까 주의하세요.”

불임…….

차라리 아이를 못 낳는 몸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일지도.

록시나는 데보라가 준 차를 마시며 짐을 싸는 하녀들을 응시했다. 2년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치우거나 버려야 할 게 계속 나왔다.

“부인, 이건 버리기 아까운데…….”

하녀 키에라가 아기 신발을 내밀었다. 케이프런 왕국은 신부에게 아기 신발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버려.”

“새 신발인데…… 소재도 고급이고.”

“이번 결혼에선 임신할 일이 없으니까 갖고 있어도 짐만 돼.”

“제가 가져도 될까요? 필요한 사람에게 팔면 꽤 받을 것 같아서요.”

“마음대로.”

록시나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한 후 차를 마셨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지 못하는 것처럼 임신과 출산 역시 록시나에겐 가능성이 없었다.

제게서 태어나 봤자 마음고생을 하는 건 물론 매일매일 불행하다는 생각뿐일 테니까.

록시나가 그랬던 것처럼.

“멈춰라!”

안투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를 마시던 록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발길을 뚝 끊었던 그가 무슨 일로 온 건가 싶었던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별궁으로 옮긴다지?”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옮겨?”

“제 마음이요.”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안투르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록시나는 하녀들을 물렸다.

“데보라의 집을 자주 찾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별궁에서 지내면서…… 하던 걸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록시나의 대답에 안투르는 기가 막혔다.

“그게 이유야?”

“네.”

“그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군.”

록시나는 대답하기보다 데보라가 준 차를 마셨다.

“매일매일…….”

“공작님은 관계를 하는 게 즐겁지 않나요?”

안투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록시나가 푸시시 웃으며 조롱했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싫진 않나 봐요?”

“별궁으로 사내를 불러들이겠다는 건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며칠 전에…… 새벽에도 했어요. 그 느낌이 좋아서…… 계속 같이 있고 싶었는데…… 데보라의 집인 데다 데보라의 집을 대낮에 나올 수가 없어서 많이 아쉬웠어요.”

“난 당신의 남편이야. 아직까지는 남편인 남자에게 그런 얘기까지 해야겠나!”

“공작님은 언제부터 제 일로 열을 내셨죠? 제가 뭘 하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별궁은 안 돼.”

“좋아요, 그럼 이곳으로 부르죠. 대놓고 외도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록시나의 도발에 안투르는 입매를 비틀었다. 조각처럼 반듯하게 깎아 놓은 이목구비가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젠 내가 당신에게 그 어떤 영향력이 없나 보군.”

“알았으면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무시해 주세요.”

“아름다운 이별…….”

“서로 원하는 걸 들어주면서 헤어지는 게 아름다운 이별법이 아닐까요?”

“나도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데 이번엔 불안해.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닐 텐데 말이지.”

안투르는 록시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었다. 이럴 땐 그의 시선을 느끼고 한 달 동안 안고 뒹굴던 사내를 떠올려 보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록시나는 안투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곁눈으로 슬쩍 훑거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내는 등 철저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그를 무시했다.

“그 사내를 불러들일 건가?”

록시나가 별궁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됐던 그가 아내의 침실을 찾은 진짜 목적을 말했다. 록시나가 피식거렸다. 그녀 역시 그가 왜 왔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대답해.”

안투르가 노려보는 바람에 록시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외도를 허락받은 날부터 자신을 조종하려는 느낌을 자주 받았던 탓에 슬슬 언짢았다. 그녀는 기분 나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몰라요, 별궁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을 못 해요.”

“가면을 쓰고 들어오는 남자들을 모두 받아들이겠다?”

“상관없어요.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록시나가 도발하듯 소리치자 안투르는 주먹을 쥐었다. 다른 남자를 안을 수 있다는 말에 심장이 뜯기는 기분이었다. 대답만큼이나 탐탁지 않은 감정이었다.

“한 사내와 해. 하나만!”

“그건 제 마음이에요!”

“난잡해지지 말란 소리야!”

“제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인데요!”

“불안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안투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달려와 록시나를 벽에 밀쳤다. 깜짝 놀란 그녀는 겁을 집어먹어 사색을 지었다. 그가 양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와 벽 사이에 낀 그녀는 어깨를 옹송그린 채 그를 올려 봤다. 고개를 숙인 그는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숨과 날숨을 교차했다.

이럴 땐 꼭 며칠을 굶은 짐승이었다.

“왜, 왜 이래요…….”

“당신 참 둔하군.”

“둔해요?”

“나였다면 단박에 알아차렸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록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순진한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맹탕 같은 눈으로 들여다보자 안투르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잿빛 눈동자를 이글이글 태웠다.

“……별궁으로 가도 좋아. 하지만 이혼할 때까진 하나하고만 해. 하나!”

“약속 못 해요.”

“못 해?”

“지금도 가랑이 사이가 간지럽고 뭐든 쑤셔 넣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로 만족해요!”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지른 록시나는 안투르를 밀쳤다. 하지만 그는 악산처럼 버텼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밀쳤지만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만 맺히는 게 고작이었다.

“비켜요.”

“새벽까지 그렇게 해댔으면서 또 쑤셔 넣고 싶어? 당신이 데보라의 집을 들락거린다는 걸 알아.”

“데보라에게 매일매일 보고를 듣나 보죠!”

“퍼시에서 매춘업을 하려면 내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지.”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만큼요!”

“그래, 아주 상세히 보고 하는 편이지. 당신이 얼마나 밝히는지!”

“뭐, 뭐 하는 거예요!”

안투르가 록시나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간지럽다며, 쑤셔 박고 싶다며? 내 것도 넣어 보려고!”

“당신은 안 돼요!”

“넣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짝!

안투르의 뺨이 돌아갔다. 록시나에게 따귀를 맞은 그는 충격에 빠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당하는 손찌검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감히 나를 때려?”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큼직한 손바닥으로 감싼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 제정신이야?”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남창은 되고 나는 안 되나? 그러지 말고 한번 넣어 봐. 색다른 경험이 될 테니까!”

“그러다 당신 아이라도 임신하면요? 바라단 가문의 피가 섞인 아이가 생겨도 괜찮아요?”

록시나가 쏘아붙이는 바람에 안투르는 얼어붙었다.

“깜빡했나 봐요, 내가 누구의 딸인지.”

안투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색다른 경험은 못할 것 같네요. 아이가 생길 테니까.”

록시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손바닥이 욱신거리는 만큼 눈가가 뜨겁게 부어오르고 코끝이 찡했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눈물이 고인다. 그녀는 물기 가득한 눈초리를 매섭게 치켜떴다.

“내 구멍엔 무엇이든 넣을 수 있지만 안투르 퍼시는 안 돼요. 절대.”

록시나는 안투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과열됐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열기와 통증이 가시지 않을 뺨을 문지르던 안투르가 찻잔을 집었다.

조금 전 록시나가 마시던 차였다. 목이 탔는지 단숨에 들이켜려고 해 록시나는 경고했다.

“이걸 마시면 불임이 될 수 있대요.”

안투르는 찻잔을 입에서 뗐다. 그는 믿기 어렵다면서도 찻잔을 내려놨다.

“데보라가 준 거예요. 창녀들이 쓰는 방법인 것 같아요.”

안투르는 입맛을 다신 후 의자에 앉았다. 원래대로였으면 제 할 말을 마치자마자 침실을 나갔을 터다. 뺨까지 맞았으니 도망치고 싶은 감정이 앞설 터.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기만 했다. 남창은 되지만 자신은 안 된다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죠? 보고 받은 건 없나요?”

“이제 아바마마께서 읽으셨어.”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 읽으셨다고요?”

“고민 중이시겠지.”

“알겠어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록시나.”

“그만 불러요.”

“난잡한 생각을 버려. 당신은 창녀가 아니잖아.”

“내 인생이에요, 공작님이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간섭하는 건 이것으로 끝이길 바라요.”

록시나는 클러치를 챙긴 후 침실 문을 열쳤다. 양팔을 넓게 벌려 양문을 동시에 연 그녀는 끈임 없이 이혼을 요구했던 남편을 침실에 버려 준 채 씩씩하게 걸었다.

안투르는 치맛자락을 가볍게 흩날리며 멀어져 가는 록시나를 바라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피임이라…….”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대답이었다. 안투르는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한숨을 코와 입으로 내뿜었다.

***

별궁은 공작성에서 꽤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시가에서 멀진 않았지만 주변이 호수와 사냥터로 조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은밀한 사생활을 지킬 수 있었다.

록시나는 짐마차의 선두에 선 필라프를 손짓으로 불렀다. 말고삐를 당겨 방향을 튼 그가 그녀의 마차에 다가왔다.

“말씀하십시오, 공작 부인.”

“나는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마레 시가지에 갈 생각이야. 자네가 내 대신 별궁에 짐을 내려 줬으면 좋겠어.”

“그건 제가 할 소임입니다만, 어딜 가시려는지…….”

“녹인 초콜릿이 먹고 싶어서.”

“노, 녹인 초콜릿이요?”

“갑자기 당겨서. 늦을 테니까 짐정리가 끝나면 돌아가게. 그리고 이건 내 마지막 선물.”

록시나는 결혼식 때 걸었던 목걸이에서 뗀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성의만 받겠습니다.”

“2년 동안 사이가 나쁜 부부 사이에서 고생한 거 알아. 받아 줘.”

“제가 할 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수도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사람, 참.”

“저는 부인이 행복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 초콜릿을 맛있게 드시길 바라며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필라프는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 후 돌아섰다. 록시나가 머쓱해하든 말든 자기 할 일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주머니를 클러치에 넣으며 방글 웃었다.

“공작 부인!”

세미가 록시나를 불렀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세미!”

“거처를 옮긴다고요?”

“응.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기사단이 한가하진 않을 텐데?”

“하네스 기사장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우승하면 드리기로 했던 상품을 전하고 싶다고 했더니 허락해 주셨어요.”

“로지한테 주라니까.”

“받아 주세요. 안 받겠다고 하시면 버릴 겁니다.”

세미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록시나는 빙그레 웃었다.

“버리는 건 아까우니까 받을게. 고마워.”

“감사합니다!”

세미는 네모난 상자를 내밀었다. 록시나는 상자를 받자마자 뚜껑을 열었다. 에메랄드 목걸이가 시선을 끌었다. 하네스가 무리한 게 느껴질 만큼 고가의 목걸이였다.

“예뻐.”

“공작 부인께 어울릴 만큼요.”

세미는 극찬했다.

“가지고 있다가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받기로 하셨잖아요.”

“알았어. 다시 한번 고마워.”

록시나는 상자를 옆 좌석에 놓은 후 창가에 팔을 괬다. 그러고 세미의 머리 위로 지나는 철새를 감상하며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벼, 별궁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였다고 들었습니다. 외롭거나 무섭지 않나요?”

“가 봐야 알겠지?”

“어, 언제 나오세요?”

“자주 나올 거야.”

“호, 혹시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하실 수 있을까요?”

“세미의 집엘?”

“어머니께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요. 얼마 전에 이사했거든요.”

록시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세미는 뛸 듯이 기뻤다.

“감사합니다. 이대로 별궁까지 호위하겠습니다!”

“마레 시가지에 입성하면 초콜릿을 먹을 거야. 그리고 볼일을 보러 갈 예정이고. 그러니까 세미는 이제 공작성으로 돌아가도 돼.”

“초, 초콜릿이요?”

“달콤한 게 먹고 싶어서.”

“그럼 거기까지 호위하겠습니다.”

세미는 록시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세미가 할 일은 공작님의 호위야.”

“공작 부인을 호위하는 것도 기사단의 임무입니다.”

“곧 이혼하는걸.”

“기사단이 아닌 세미 그라이드로서 호위하겠습니다.”

세미는 고집스레 말했다. 말투부터 눈빛,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록시나는 푸시시 웃었다.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목걸이만 전해 주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별궁으로 옮긴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네스까지 허락했다니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좋아, 그러면 초콜릿을 같이 먹어 줘.”

록시나의 대답에 세미는 활짝 웃었다. 해맑은 미소에 눈웃음이 지어진다. 그녀는 창턱에 머리를 기댔다.

창밖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날씨 참 좋다.”

***

록시나가 별궁으로 이동하는 사이 안투르는 데보라의 집에 왔다. 록시나가 찾아올 걸 예상한 것처럼 몇 가지의 당부를 해 놓을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오늘도 뵙네요.”

“능글맞게 굴지 말고 앉아.”

안투르는 쌀쌀맞게 쏘아붙인 후 데보라를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오늘부터 록시나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걸 아나?”

“네. 새벽에 말씀하셨어요. 거처를 별궁으로 옮길 테니까 앞으로는 그쪽으로 보내라고 하셨지요.”

“그 말만 하던가?”

“네.”

“남창에 관한 질문은?”

데보라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쯤은 물을 법한데…… 제가 묻지 않은 이상 호기심을 보이지도 않아요.”

“자네가 물었다? 뭘 물어봤나?”

“아무런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지요. 한 달 이상 매일매일 관계를 하다시피 했으면 이름이나 나이 정도는 궁금해할 테니까요.”

“그랬더니 뭐라고 했나?”

“돈값만 잘하면 된다고 하시대요.”

데보라의 대답에 안투르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던 그는 그녀의 안색을 뜯어봤다.

“정말이에요, 공작 부인께선…… 남창에게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좆만 필요하세요.”

“그 말은 그 짓만 가능하면 남창이 바뀌어도 문제없다? 아니 남창 정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겠지?”

“아마도.”

데보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공작 부인은 욕심도 기대도 희망도 없는 분이에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가엾더군요.”

“가엾다니? 매춘부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몸을 팔아먹고 사는 년이지만 제 팔자에도 꽃이 필 거라는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공작 부인에겐 그런 희망이 없어요. 그러니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보단 당장에 느낄 수 있는 쾌락에 빠져든 게 아닐까 싶네요.”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보단 당장에 느낄 수 있는 쾌락이라…….

안투르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머릿속이 복잡한 게 그늘진 얼굴에서 엿보였다. 데보라는 그에게 가면이 넣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젠 별궁으로 직접 가셔야 하니까 챙기셔야 할 것 같아서요. 공작 부인께서 매일매일 오라고 하실 테지요. 제게 연락이 오면 공작님 댁으로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안투르는 눈만 감았다가 떴다.

“이만 가야겠어. 비밀을 지켜 주면 약속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안투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면을 넣은 상자를 옆구리에 꼈다.

희망이 없다…….

안투르는 데보라가 한 말을 곱씹으며 왁자한 시내를 걸었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남창이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매일매일 살을 섞었으면 마음이 갈 텐데.

마음이 가?

안투르는 멈칫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릴 만한 충격에 당황한 그는 이마를 짚었다.

“마음이 가는 건 나였나?”

안투르는 침을 삼켰다. 가슴 안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고 눈이 흐려져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리가…….”

록시나가 무모한 것 같아 잠자리를 한 것뿐이었다. 아내의 외도를 허락한 공작이라는 불명예를 달고 싶지 않았던 결정이었다.

“아닐 거다. 내가 마음을 줄 리 없지.”

안투르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흔들릴 리 없어. 이혼 승인만 나면…….”

“호호호!”

록시나?

머리를 흔들던 안투르가 움찔했다. 록시나의 웃음소리에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가 뚝 끊어졌다. 가까운 곳에 록시나가 있었다. 그는 웃음소리를 따라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야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록시나와 세미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푸른 날개의 망토를 걸친 그는 얼핏 보면 록시나의 호위를 맡은 것 같았지만 연인처럼 달콤한 분위기가 났다.

하네스가 세미에게 호위를 맡겼나?

안투르는 벽과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다. 록시나는 녹인 초콜릿에 과자 찍어 먹으며 앞에서 조잘거리는 세미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 주먹으로 턱을 날려 줬어요!”

“호호, 세미에게 그런 면이 있었구나. 과격한걸?”

“사내답다고 해 주세요.”

“아니, 폭력을 쓰는 건 사내답지 못한 거야.”

“공작 부인이 이렇게 엄격하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세미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애교 섞인 아양을 떨었고 록시나는 흐뭇해했다. 안투르를 대할 때완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안투르 퍼시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안투르는 록시나에게 맡았던 뺨을 문질렀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부글부글 끓기도 했고 세미를 다정하게 대하는 그녀가 눈가를 시큰시큰하게 찔렸다.

안투르는 나뭇가지에 올린 손에 힘을 줬다. 우지직.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졌다.

“젠장…….”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가슴 안쪽에서 그 비슷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세미를 떼어 놓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심장 언저리 역시 근질거려 자꾸만 인상이 찌푸려진다.

젠장.

“응?”

따끔한 시선이 목덜미를 찌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린 록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투르?

조금 전 나무와 벽 사이에서 안투르를 본 것 같았다.

그저…… 닮은 사람인가?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세미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저 나무 뒤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아서.”

“아무도 없는데요?”

엉덩이를 뗀 세미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잘못 본 건가 봐.”

록시나는 싱긋 웃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 이제 슬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버, 벌써요?”

“벌써라니? 하늘을 봐. 날이 저물고 있어.”

록시나의 말대로 쪽빛에 가깝게 파랬던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시간 때문에 모든 게 아쉬웠다.

“별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니, 이대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혼자 다니시면 위험해요.”

“치안만큼은 확실한 곳이 퍼시야. 내 걱정하지 말고 이젠 복귀해.”

“그러지 마시고…….”

“세미.”

록시나가 꾸짖는 투로 세미를 불렀다. 눈에 힘까지 주고 쳐다보는 바람에 아까처럼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복귀할게요.”

“잘 생각했어.”

“조심하고 또 조심하세요.”

“잘 가.”

록시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세미가 돌아섰다. 그녀는 그가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봤다.

“기다리던 밤이 오는구나…….”

록시나는 순식간에 저물어 가는 하늘이 반가웠다.

“그를 만날 수 있어.”

***

“……당신이 이런 성격인 걸 귀부인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없어요.”

“왜 숨겼지?”

“뭐 좋은 거라고 드러내요?”

“내겐 왜 드러냈지? 좋았냐는 물음에 얼굴만 붉히고 말면 됐을걸.”

“당신에겐 숨길 필요가 없잖아요. 제가 한 요구를 생각해 보세요.”

“솔직하군.”

“……속이거나 내숭을 떨 이유가 있나요.”

“끝이다, 이건가?”

“네.”

짚은 이마에서 손을 뗄 수 없을 만큼 록시나는 안투르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정력적이었고 열정적이었다.

그런 탓에 록시나가 세미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세미에겐 잘도 숨기면서…….”

잘 보이고 싶은 건가?

잇자국이 남도록 깨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미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푸근한 록시나. 몇 번을 곱씹어도 뱃속이 뒤틀리고 뼛속이 시큰거렸다.

“이래선 질투하는 꼴이잖아.”

이혼하자고 한 건 자신이고 친정아버지인 티에리 바라단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호언장담하듯 떠들어 놓고 질투라니. 꼴이 우습게 됐다.

“젠장…….”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마를 꽉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릴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어둠이 짙게 내린 창밖을 내다보던 안투르가 몸을 틀었다. 별궁의 짐정리를 마친 필라프가 들어왔다.

“왔나?”

“예, 그리고 공작님 앞으로 서신이.”

필라프는 은쟁반에 올린 서신을 내밀었다. 안투르는 서신을 집으며 물었다.

“공작 부인께선 뭘 하고 계신가?”

“볼일이 있으시다며 외출하셨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야?”

“예.”

“공작 부인이 아니라 자유부인이라고 해야겠군.”

안투르는 심기 불편한 마음을 담아 한껏 조롱했다. 그는 서신의 봉투를 뜯어 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록시나의 필체가 시선을 끌었다. 그는 필라프에게 나가 보라고 눈짓하고는 책상에 앉아 서신을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매우 짧았지만 강렬했다.

「잔뜩 세우고 와.」

그리고 별궁의 약도가 있었다.

“잔뜩 세우고 오라…… 이보다 정확한 목적도 없지.”

안투르는 서신을 촛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화르륵 타오른 종이를 물그릇에 던진 그는 콧바람을 불었다.

“마음…… 신경 쓰여.”

안투르는 록시나에게 쏠리는 마음이 우려스럽고 걱정됐다.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속궁합이 잘 맞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질 수도 있나?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하던 그때였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잠시 후 하네스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공작 부인께서 기거하시는 별궁에 기사단을 배치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하녀와 시종이 따라가긴 했지만 경비까지 책임질 순 없었다. 안투르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입이 무겁고 충직한 기사들로 배치할 생각이긴 했다.

“생각한 자가 있나?”

“세미 그라이드를 필두로 열 명 정도의 기사들을 배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미…… 그라이드?”

“세미는 공작 부인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만한 충성심이라면 믿고 맡길 만하다는…….”

“안 돼.”

안투르는 신경질을 부렸다.

“입단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이지만 실력자입니다.”

“실력자든 뭐든, 세미는 제외한다.”

“공작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제외시켜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다고 보장할 수 있나? 우린 곧 이혼해. 세미도 곧 알게 되겠지…… 만약에 세미가 딴마음을 품는다면…….”

안투르는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속이 뒤집혔지만 하네스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활짝 웃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된 일이잖아요. 세미처럼 적극적인 사내와 재혼한다면 공작 부인도 좋은 게 아닐까요?”

안투르는 한쪽 눈썹을 높이 쳐들었다.

“하급 귀족 출신의 기사와 재혼하는 게 좋은 건가?”

“이혼녀가 되면 지위가 높아도 아비뻘이나…… 아니 재수가 완전히 나쁘면 할아비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장애가 있는 귀족에게 팔려 가듯 재혼해야 합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하급 귀족이라고 해도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세미가 낫죠. 나이도 두 살이나 어리잖아요.”

“나보단 낫겠군.”

안투르는 서랍을 여는 척하며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네스가 눈치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공작님처럼 무관심에 무시나 했던 남편보단 훨씬 낫…….”

안투르가 숨소리를 크게 낸 탓에 하네스가 입을 다물었다. 눈치 없이 떠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하네스는 그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오므렸다.

“세미는 빼고 배치한다, 이상.”

안투르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사색을 한 하네스를 지나쳤다.

“어, 어디 가십니까? 수, 술친구가 필요하시면 제가…….”

“아내에게 관심이 많고 무시하지 않는 자네는 사랑을 주러 가 봐.”

“오늘 하루쯤은…….”

“귀찮아.”

안투르는 쌀쌀맞게 말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은가 보다. 록시나에겐 뺨을 맞고 하네스에겐 조롱을 당했다. 잘생긴 얼굴이 짜증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여러 모로 불편해.”

록시나도, 세미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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